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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발병 사실을 알게 된 후 쓰기 시작한 일기를 바탕으로 정리한 내용인데 이미 대장암직장암 환우회(약칭 대직방)라는 다음 카페에 실었던 투병기를 일부 수정하였음을 밝힌다.

 1. [암에 관한 사전적 정의는 악성종양이라고 하는데, 발생 부위에 따라 암종(Carcinoma)과 육종(Sarcoma)으로 나뉜다.
 암종(Carcinoma)은 점막, 피부 같은 상피성 세포에서 발생한 악성종양을 뜻하고, 육종(Sarcoma)은 근육, 결합조직, 뼈, 연골, 혈관 등의 비상피성 세포에서 발생한 악성종양을 뜻한다.(백과사전에서 인용)]

지난 2014년 9월 15일 오전 서울 청계광장에서 대한대장항문학회 주최로 열린 '골드리본 캠페인 - 러브핸들을 잡으면 대장암이 잡힌다!' 행사에서 의사들이 대장 조형물에 들어가 용종 모형을 제거하고 있다.
 지난 2014년 9월 15일 오전 서울 청계광장에서 대한대장항문학회 주최로 열린 '골드리본 캠페인 - 러브핸들을 잡으면 대장암이 잡힌다!' 행사에서 의사들이 대장 조형물에 들어가 용종 모형을 제거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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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암에 관한 학술적인 설명은 길지만 나는 그냥 '악성 종양'이라고 이해한다. 암은 피부암 같은 사람의 눈에 보이는 암이 있는가 하면, 체내의 각종 장기, 뼈, 혈관 사람의 눈으로 발견하기 어렵고 자각 증상을 느끼기 까지 시간도 오래 걸린다고 했다. 그래서 암을 '침묵의 살인자'라고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어떤 암의 원인은 이것이다'라고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아닌 것 같다. 암의 원인은 나타나는 부위에 따라 다르고 또 학자에 따라 주장이 분분하다고 한다. 다만 공통적인 주장은 나쁜 식습관, 담배와 술, 스트레스 등이 빠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2. 나는 혈압, 혈당, 심장 등 남들에게 보이지 않은 속병을 가진 사람이었다. 혈압은 150에서 170을 오르내릴 정도였다. 혈당의 수치는 식전 최대 340까지 오른 적도 있고 수년간 200이상으로 나타나 병원에서 약을 처방받기도 했다.

그리고 오십 전후로 나타난 부정맥 현상. 그로 인해 '발작성 심방세동'이라는 진단을 받았고 몇 차례 응급실에 실려 간 적도 있었으며 심지어는 입원했던 적이 두세 번 있었다. (심장 병력이 있으면 아무리 친절한 보험회사도 보장성 보험에 가입하는 길을 막는다. 그래서 그런 보험이 없었던 나는 수술을 받아도 보험 혜택을 볼 수 없었다.)

때문에 그런 속병 치료를 위해 식이요법과 운동으로 꾸준히 해 왔는데 정원생활을 시작한 까닭도 그런 건강상의 문제를 극복하자는 일환이었다.

그리고 무엇이 되겠다는 욕심, 무엇을 갖겠다는 욕심, 심지어 남에게 봉사하겠다는 생각도 접었다. 몇 십 년 된 오래된 모임을 정리하여 사람 만나는 일도 피했다. 그리고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지인들의 애경사에도 불참했다. 사람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겠다는 노력이었다.

그리고 외식을 삼가고 시중에서 파는 음료는 입에 대지도 않았으며 그 밖의 인공적인 소시지 같은 가공 식품도 아예 먹지 않았다. 굽거나 삶은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등 육식은 피했으며, 먹더라도 내가 자청했던 적은 없었다. 매일 세끼니 식사도 현미잡곡밥 위주였다. 텃밭 농사를 시작하면서 직접 가꾼 깨끗하고 안전한 채소를 자랑했다. 

그런 노력의 결과로 혈당이나 정상치를 약간 웃도는 수치를 보였지만 의사들로부터  약을 먹을 정도는 아니라는 진단을 받아 안정된 편이었다. (다만 몇 번 혼이 난 경험이 있는 데다 "사람은 팔다리를 다치거나 심지어 뇌가 손상되어도 죽지 않으나 심장은 자동차의 엔진과 같아 한 번 잘못되면 그걸로 끝이다"는 의사의 말에 놀라 지금도 심장약은 복용하고 있다.)

3. 암은 나에게 머나먼 곳의 이야기였다. 2년마다 실시하는 건강 검진에서 이상은 나타나지 않았으며 가족력을 살펴도 암으로 인한 사망은 찾을 수 없었다. 때문에 오직 혈압과 혈당 수치를 살피며 심장병만 걱정하며 나름 식이요법과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이다.

퇴직하고 시골로 옮긴 후에는 깨끗한 공기 마시고 따뜻한 햇볕을 등에 받으며 적절하게 일하고 주변의 산책길을 걸으며 밤에는 책 읽으며 유유자적한 삶을 추구했다. 가끔 주관 없이 맹목적으로 권력에 추종한다고 오해되는 60대가 아니라는 사실과, 또 이 시대의 기록자라는 긍지로 짧은 비평을 글을 쓰는 일도 사는 재미로 여겼다. 그런데 그렇게 살았던 내 안에 암은 자라고 있었으니!

4. 처음 이상 증세가 나타난 것은 2014년 4월 터키 여행을 갔을 때였다. 변의를 자주 느꼈고 가끔 혈변도 보였다. 그러나 "물 갈아 먹으면 배탈이 난다"는 속설을 받아들였다. 혈변도 공공화장실 여건이 좋지 않은 나라에서 비데를 사용 못하기 때문에 나오는 일시 현상으로만 알았다.

사실상 잠복해있던 암 빨간 신호를 보냈음에도 나의 무지는 그 신호를 몰랐던 셈이다. 집에 돌아온 후에도 대변을 봐도 시원찮았고, 대변도 아주 가늘고 혈변이 자주 보였다.

그해 4월 잊지 못할 세월호 참사가 있은 후에 눈에 핏발이 서는 일도 있었다. 다혈질인 내 성격을 알고 있는 아내는 대변의 이상도 세월호 참사로 인한 심리적 충격의  영향일 것이라는 설명에 화를 줄이면 나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여름이 가고 가을이 되어도 가늘고 무른 대변으로 인해 화장실 출입은 줄어들지 않았다.

5. 그렇게 안이한 판단으로 세월을 허송하고 보낸 11월 말쯤이었다. 정원의 나무 옮기는 일을 하고 들어와 다용도실에서 작업복을 벗는 순간 항문에서 붉은 피가 터졌다. 대한민국 남자들의 80%가 크건 작건 항문 질환이 있다는 확인되지 않은 지식으로 위안 삼으며 대충 치질로 여기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 며칠 후 12월 10일경이었다. 하우스 안의 풀을 매주고 들어와 변을 보는데 다시 출혈이 보였다. 2차 출혈이었다. 그때의 출혈도 신경은 쓰였지만 미미하였기에 힘든 일만 하지 않고 쉬면 괜찮을 줄 알았다.

다시 12월 21일 세 번째 출혈을 보였는데 그때도 치질이 심각하다는 생각만 했다. 그런데 2015년 23일(화), 네 번째 출혈이 보였던 것이다.

6.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23일 오후 치질을 잘 본다고 알려진 항문외과를 찾았다. 문진, 1차 검사, 관장, 시티촬영의 단계를 거치면서도 하나의 과정으로만 이해했다. 1시간 가량의 진찰과 검사가 끝나고 의사를 만났더니 의사는 보호자를 찾았다.

'치질이 아니구나!'

순간 본능적인 위기의식과 함께 가슴이 철렁했다. 머뭇거리던 의사는 "화순병원으로 가십시오."라고 했다. 화순 병원은 암 전문 병원이다. 자신이 치료하거나 수술할 단계가 넘었다는 말이었다. 

그 순간 모든 사고와 판단이 정지되고 '어째서 나에게 그런 일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의사에게 다시 봐달라고 하소연 할 수 있는 일이던가. 태연한 척 몸의 중심을 잡고 밖으로 나오니 기다리던 간호사가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리고 소견서와 시티촬영 사진이 담긴 시디를 챙겨주며 의사까지 소개했다.

"인터넷 접수는 시일이 늦어집니다. 내일 바로 화순 병원으로 가십시오."

급하다는 뜻이었다. 특별한 인연이 없었던 간호사에게 인간적인 위로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병원 문을 나와서야 묻고 싶은 것을 많이 놓치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다시 들어갈 수 없었다.

7. 당시 나도 그렇지만 아내 역시 암을 불치의 병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아마 비극적 드라마의 단골 메뉴가 암이었고, 또 몇 지인들의 암으로 인해 참담한 모습으로 생을 마감했던 경우를 보았던 경험 때문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나 역시 죽음의 그림자가 먼저 어른거리며 누군가 놓은 덫에 걸렸다는 원망, 바닥을 알 수 없는 심연에 가라앉은 것 같은 절망감이 가슴을 눌렀다. 부정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현실. 살 만큼 살았다는 마음보다 아직은 아닌데 하는 비통함이 몸을 떨게 했다.

하지만 만난 이후 처음으로 소리 내어 통곡하는 아내를 그대로 볼 수도 없었다.

"받아들이세. 운명 아니겠는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만감이 교차한 2015년 12월 23일 오후였다. 어떻든 지금 생각하면 원인과 발생 시기는 알 수 없었다고 할지라도 최소한 이상이 왔을 때 병원에 갔어야 했다. 그 점은 비록 나의 무지와 과실일지라도 깊은 회한으로 남는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다음 카페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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