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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색향토문화전시관 앞에 있는 작은 논에는 전통 모심기를 함께 해보는 행사가 3 년째 열리고 있다.
▲ 고색동에서 열린 전통 모심기 체험 행사 고색향토문화전시관 앞에 있는 작은 논에는 전통 모심기를 함께 해보는 행사가 3 년째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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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몹시 파랗던 지난 27일 토요일, 경기도 수원시 고색동 고현초등학교와 고색 향토문화전시관 앞의 작은 논에서 특별한 행사가 있었다. 도심 속에서 아직 남아있는 작은 논에서 벌써 3년째 치러지고 있는 전통모심기 행사가 바로 그것이다. 고평 생태교통문화 마을협의회가 주관하는 이 행사에는 고색동 어르신들과 행사 소식을 듣고 온 수원 시민들, 중고등학교 자원봉사자들과 지역 인사들이 함께 참여했다.

식전행사가 끝나고 축하공연이 이어졌음에도 자리에 함께한 주민들의 얼굴은 시큰둥해 보였다. 각 협회 회장과 시장의 인사말을 듣느라 흥을 잃은 탓이다.

논두렁의 쥐구멍이나 벌레구멍을 막고 풀을 쉽게 잡기 위해 발로 밝거나 흙을 바른다.
▲ 논두렁 밟기하는 수원 시민들 논두렁의 쥐구멍이나 벌레구멍을 막고 풀을 쉽게 잡기 위해 발로 밝거나 흙을 바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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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내기 체험을 알리는 농악대의 놀음이 시작되자 비로소 주민들과 자원봉사자들이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고색동을 지켜온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먼저 손뼉을 치며 흥을 찾았다. 진행자의 논두렁 밟기를 함께하자는 말에 의상을 차려입은 주민들과 참가자들이 나섰다. 쭈욱 한 바퀴를 돌고 나서야 시민들 얼굴에 생기가 활짝 돌았다.

자원봉사를 하러온 중고등학생들이 고사도 직접 참여해보았다.
▲ 풍년을 기원하는 고사 자원봉사를 하러온 중고등학생들이 고사도 직접 참여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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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스마트폰만 쳐다보던 중고등학생 자원봉사자들도, 고색 농악단의 노래와 함께 시작된 풍년 고사에 해보겠다며 손을 들고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바로 모내기 체험을 시작을 알리는 말에, 양말 벗기를 망설이던 참가자들이, 하나둘 용기를 내서 맨발로 터벅터벅 논으로 들어갔다. 어느새 논은 마치 예전 농사짓던 그 마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거머리 하나도 없습니다. 아 맘 놓고 들어 오십서!  맨발이 더 좋아."

고색동 주민들로 이뤄진 고색농악단이 노래를 부르며 흥을 돋구고 있다.
▲ 일꾼들 흥을 돋구는 농악대 고색동 주민들로 이뤄진 고색농악단이 노래를 부르며 흥을 돋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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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지 않고 울려 퍼진 고색 농악단의 입담과 노래 덕에, 오늘 처음 만난 시민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초중고 학생들은 맨발로 흙을 밟는 것 자체로도 이미 행복한 얼굴이었다. 오늘 행사를 위해 의상을 멋들어지게 갖춰 입은 고색동 마을주민들은 누구보다 먼저 흥을 돋구었다. 아이들이 모심다가 실수해도 뭐라 지적하는 어른은 하나도 없었다. 모두가 그저 밝은 웃음으로 옆 사람과 떠들며 모를 심었다.

자원봉사를 하러 온 중고등학생들도 함께 모내기에 참여하고 있다.
▲ 모 심으러 오세요 자원봉사를 하러 온 중고등학생들도 함께 모내기에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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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내기 체험을 위해 고색동 주민들은 퇴근 뒤 모여 꼬박 두 달이 넘게 준비했다. 볍씨부터 싹을 틔워 모를 준비함은 물론, 농악도 맞추고, 진행도 맞추고, 새참 거리 준비에, 지푸라기 준비에, 장화 수건, 계란까지. 이걸 준비한 두 달간의 이야기만 들어도 책 한 권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논에 들어간 사람들 사이에 고향이 어디냐는 인사가 오가고 어린 시절 뭣했네 이런 말들도 오가기 시작했다. 물류창고에 식당에 둘러싸인 이 곳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이 작은 논이 농악과 사람 소리가 어우러지니 제법 시끌벅적해졌다.

모줄에 맞춰 모를 심고 있는 참가자들. 아이들에게 모심는 법을 가르쳐주는 어르신도 보인다.
▲ 손으로 모를 심어요 모줄에 맞춰 모를 심고 있는 참가자들. 아이들에게 모심는 법을 가르쳐주는 어르신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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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는 정말 알차게 준비되었다. 지푸라기로 둘러친 논 바로 앞마당엔 닭이 있었다. 어린아이들에게 닭 모이 줘보라고 토종닭 네 마리를 그 안에 풀어놓았다. 달걀도 있다. 들어가 놀고 싶다는 아이를 번쩍 들어 안아 넣어주니 닭들이 울타리를 뛰쳐나온다. 그러자 다시 꼬마들이 닭을 쫓아가느라 깔깔댄다. 어른들의 어린 시절이 그렇게 눈 앞에 만들어졌다.

지푸라기 울타리안에 닭과 달걀을 넣어두니 옛날 마당이 재현되었다.
▲ 닭 구경하세요! 지푸라기 울타리안에 닭과 달걀을 넣어두니 옛날 마당이 재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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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참을 준비하는 코너에는 장작 대신 가스버너가 들어간 아궁이가 있었다. 아궁이 위엔 솥뚜껑이 뒤집어져 올려졌다. 부침개를 해 먹으라고 만들어 놓은 것이다. 반죽과 기름은 물론 뒤집개와 접시에 비닐장갑까지 철저하게 준비해놓으셨다. 취떡도 직접 뜯어 모양 빚어가며 먹을 수 있게 했고, 주먹밥도 직접 만들어 먹으라고 식재료, 조리재료 다 갖춰놓았다. 준비하신 주민께 한 말씀 부탁하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직접 해서 먹으니 더 별미란다. 기다리는 사람들도 구경하며 웃었다.
▲ 준비는 다됐다, 해서 먹으렴 직접 해서 먹으니 더 별미란다. 기다리는 사람들도 구경하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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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모심다가 새참 먹잖아. 먹고 해야지. 아, 근데 그게 일한 사람들만 먹으라고 하는 건가? 저기 지나가는 어르신들 오시라오시라 크게 불러 모셔오고, 또 논에 나오지 못한 어르신들은 직접 댁에 가져다 드리기도 하고, 동네 꼬마들도 불러서 같이 먹이면 구경하다 재미 삼아 모종이라도 함 나르고 가지. 그리 다 같이 나눠 먹는 맛으로 그러라고 이렇게 깔아놨어." 

고색동 아주머니께서 지게를 지고 모를 날라주고 있다.
▲ 모 모자른데 없수? 고색동 아주머니께서 지게를 지고 모를 날라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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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악단의 구성진 노랫가락은 쉬지 않고 나왔다. 논두렁의 모내기 줄은 아무나 잡는 게 아니었다. 목소리도 우렁차고 재치도 있고 입담도 좋아야 한다. 거기다 노래도 좀 할 줄 알아야, 저 마이크 잡은 농악단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일하는 사람들 얼굴에 웃음이 끊이지 않게 해야 했다. 오늘은 그랬지만 옛날엔 뭐 농악단이 따로 없으니, 누군가가 먼저 한 소절 던지면 모두가 받는 노래가 그래서 흥했으리라.

줄에 맞춰 일일히 손으로 심는 참가자들이 줄을 넘길 때마다 허리를 펴고 있다.
▲ 줄 넘어간다! 줄에 맞춰 일일히 손으로 심는 참가자들이 줄을 넘길 때마다 허리를 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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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쩨이~! 줄 넘어 간다!  아, 거 할머니 고운 피부에 머드팩 또 하고 싶소. 버뜩 고개드셔잉. 허리 좀 펴시고. "

논 밖에서는 아이들 찍느라 바쁜 부모들과 뒤늦게 온 주민들이 서 있었다. 마음속에 나도 함 해볼까 하고 망설이고 있던 게 분명하다. 새참을 먹고 난 뒤에도 이어진 모내기에 새로운 시민들이 계속 참가한 걸 보면 그렇다.

두 남학생이 물을 논으로 퍼넘기고 있다.
▲ 논두렁 물 채워요! 두 남학생이 물을 논으로 퍼넘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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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먼저 들어간 어린이들과 학생들이 지루해지기도 전에 새참 먹고 하자는 소리가 나왔다. 마당은 금세 북새통이 되었다. 그러나 정말 신기하게도 누구 하나 제 것만 챙기는 사람이 없었다. 내 먹을 부침개 하러 가서는 접시 들고 줄 선 꼬마에게 하나, 옆에 앉아 계신 어르신들도 하나, 이렇게 먼저 챙겨주었다. 인심이 절로 생기는 광경이었다.

고색동 생태마을 어르신들도 행사를 함께 보며 새참을 함께 드셨다.
▲ 함께 새참을 드시는 어르신들 고색동 생태마을 어르신들도 행사를 함께 보며 새참을 함께 드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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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를 함께 심으며, 지켜보며 거기 있던 사람들 모두가 잃어버렸던 기억을 되찾은 듯했다. 그 살아난 기억 덕분에 분위기는 절정에 이르렀다. 성질 급한 어르신이 부침개가 익기도 전에 담아가자 주변에서 난리가 나도, 밤맛 나는 막걸리는 달큰했다.

기계없이 모를 혼자 심기엔 벅차다. 모내기는 자연스레 마을 일이 된다.
▲ 줄 맞춰 심어진 모 기계없이 모를 혼자 심기엔 벅차다. 모내기는 자연스레 마을 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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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들과 아이들은 돌아다니고 있어도 저기 한쪽에서는 주저앉아 새끼를 꼬는 사람들이 한 무리 있었다. 그건 오늘 행사의 경품이 달린 일이었다. 지푸라기로 삶은 계란을 담아 꾸러미를 완성하고, 새끼줄을 만들어 응모하면 추첨을 통해 쌀을 준다고 했다. 모도 심어보고 새참도 먹고, 새끼 꼬아 삶은 계란도 챙겨가자 참가자들은 흐뭇한 표정들이었다. 처음 보는 어른들과 얘기 나누는 아이들의 모습이 몹시 자연스러웠다.

고색동 할머니의 도움을 받아 새끼줄을 직접 꼬아보고 있는 꼬마친구들.
▲ 새끼줄을 꼬아보는 초등학생 고색동 할머니의 도움을 받아 새끼줄을 직접 꼬아보고 있는 꼬마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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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모는 당연하게도 엉망으로 심어졌다. 오늘 행사를 치른 고색동 257번지의 이 논은 내년에 사라진다. 보존회장은 올가을에 추수하는 행사가 한 번 더 있다고 밝혔다. 참가한 사람들의 말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들을 수 있었다.

"참 좋네요. 나도 어릴 때 모 많이 심었는데, 남들 하는 거 보고 있자니 함 들어오고 싶어지더라구요."
"흙 밟는 느낌이 너무 좋아요. 도랑물 냄새 지저분하게만 생각했는데 논 냄새였네요. 재밌어요. 또 올레요"
"요새 동네는 사람들이 재미가 없어. 아, 옛날엔 이렇게 일하다가도 뭔일 생기면 구경하러도 좀 오고, 참견하려고 좀 오고 그러면서 쉬엄쉬엄 일해갔는데. 요샌 얼굴 보기 힘들지 않아. 일만 주구장창하면 못써."

모를 심은 학생들이 도랑물에 흙 묻은 발을 씻고 있다.
▲ 도랑물에 발씻는 학생들 모를 심은 학생들이 도랑물에 흙 묻은 발을 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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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수원시민 모두가 이곳에 왔더라면 큰일이 날 뻔한 행사였다. 작은 마을 사람들이 모내기로 모두 모였던 옛날 그때처럼 오늘 행사는 딱 적당한 사람들이 몰렸다. 그 덕에 행사에 참여한 모두가 알차게 체험했다. 처음 보는 할머니에게 새끼꼬는 방법을 배울 기회가 이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피부에 꽃이 많이 핀, 지긋한 연세의 할머니께서도 새끼줄 꼼꼼히 꼬아 계란꾸러미를 만드셨다. 손바닥 안에서 지푸라기가 돌면서 꼬아져야 잘 꼬아진단다. 늘 그렇듯이 말은 참 쉽다. 그래서 할머니의 손은 그냥 손이 아니었다. 말만 앞세우는 지역 인사들은 이날 진짜 행복을 느끼지도 못하고 일찍 자리를 떴다.

지푸라기로 계란꾸러미를 만드느라 새끼줄을 꼬고 계시는 할머니의 손
▲ 새끼를 꼬는 할머니의 손 지푸라기로 계란꾸러미를 만드느라 새끼줄을 꼬고 계시는 할머니의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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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이 변하면서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더 꼭 지켜야 할 것들을 지켜야한다.  수원 시장은 바로 옆 공원에 따로 논을 만들어 이 문화를 지켜나가겠다고 약속했다. 수원에는 이미 다시 옛날처럼 마을 사람들이 어울려 즐겁게 살자는 마을 만들기가 한창이다. 풍년을 기원했던 오늘 모내기 체험의 고사처럼 올가을엔 좋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한 풍년으로 이뤄지길 소망해본다.

덧붙이는 글 | e-수원뉴스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전통 모내기 체험, #고색 생태 교통 문화 마을, #고색 향토 문화 전시관, #생태 체험 학습, #모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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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한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은 필연적으로 무섭거나 치욕적인 일들을 겪는다. 그 경험은 겹겹이 쌓여 그가 위대한 인간으로 자라는 것을 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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