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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육십 하고 하나일 때
난 그땐 어떤 사람일까.
그때도 사랑하는 건 나의 아내 내 아내뿐일까.
그때도 울 수 있고 가슴속엔 꿈이 남았을까."
- 이장희, <내 나이 육십 하고 하나일 때>(22쪽)

그땐 그랬다. 이장희와 같은 시대를 살며 사랑과 방황을 같이 했던 그땐 그랬다. 환갑이 되면 퇴물이 되어 있겠지, 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상상하기도 싫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덧 내가 육십 하고도 하나가 되었다. 여전히 아내를 사랑하고, 울기도 하며 여전히 꿈을 꾼다. 허.

살아보지 않으면 모른다. 당하지 않으면 모른다. 청년 때는 청년의 파탈을 꿈꾸며 살았다. 지금 60대는 무엇을 꿈꾸며 살까. 여전히 중년의 파탈을 꿈꾼다. 아니 노년의 파탈이 맞나? 하여튼. 근데 이건 나 혼자의 망상인 줄 알았다. 그게 아니라고 송은주가 말한다. <4050 후기청년>이란 책에서.

노년 파탈을 꿈꾸며

<4050 후기청년> (송은주 지음 / 더난출판 펴냄 / 2017. 2 / 239쪽 / 1만4000 원)
 <4050 후기청년> (송은주 지음 / 더난출판 펴냄 / 2017. 2 / 239쪽 / 1만4000 원)
ⓒ 더난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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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와 내가 다른 건 나이다. 그는 스스로를 40대라고 말한다. 중년이 하강곡선을 그리며 위기를 맞는다는 콘셉트를 완강히 거부한다. 그건 50년간 집단 최면에 빠져 고착화 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파탈을 꿈꾼다. 나 역시 그렇다. 그는 중년 파탈을, 나는 노년 파탈을.

"나에게는 이 모든 것을 부정하고 '중년의 삶은 이러이러해야 해', '그저 내리막길에 순응하며 사는 수밖에 없어', '중년은 무기력해'라는 굴레가 덧씌워져 있던 것이다. 중년의 삶이 그러하다고? 나는 어쩌다 이 프레임의 덫에 걸려 들게 됐을까? (중략) 중년이라는 터무니없는 굴레를 벗어날 때가 되었다. (중략) 중년 파탈을 유감없이 만끽하는 중인 것이다."(24, 25쪽)

"(중년이란 고정관념은) 세대에서 세대를 거치는 동안 형성되고 변형될 수 있고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으로 파괴되거나 전복될 수 있는 일시적 작품이기에 그러하다(파괴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 선배 세대에게 강요되던 중년이라는 굴레가 씌우는 망상을 우리까지 일괄적으로 물려받으라는 법은 없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을 부정할 필요도, 젊음에 구차하게 매달릴 필요도 없지만 우리 머릿속에 주입된 뻔한 중년의 상에서는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38쪽)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너무 식상한 멘트임에 틀림없다. '나이 듦'이 그리 매력적이지 않은 것은 굳이 그런 말 만들지 않아도 다 안다. 그런데 '후기청년'이란 말, 참 매력 있다. 책은 4050세대를 중년이라 말하는 대신 '후기청년'이라고 규정한다. '확장된 청년기'라며 청년의 열정, 자신감, 에너지에 더하여 지혜로움과 여유까지 아우른 세대라는 뜻이다.

책은 4050세대를 '후기청년'이라 말한다. 하지만 난 60세대다. 그럼 책이 말하는 후기청년도 아니란 말인데, 난 책을 읽으며 여전히 울고 꿈 있는 세대임을 들어 '후기청년'을 더 확장하고 싶다. 저자가 말하는 후기청년의 '메소력'으로 말하면 60대 이후도 여전하니까 말이다.

'메소력'이란 중년에 붙은 '중간(middle)'란 단어가 그리스어 '메소(meso)'라는데 착안한 말이다. M-의미 있고(Meaningful), E- 흥미진진하고(Exciting), S- 특별한(Special), O- 기회(Opportunity)는 20, 30대의 청년보다는 4050세대에 더 잘 어울린다는 뜻이다.

저자는 메소는 어정쩡하지 않고, (중간지대가 차라리) 엄청난 전략적 중요성을 갖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후기청년들이 내뿜는 '메소력'은 다른 세대는 근접할 수 없는 에너지가 된다. 중년의 위기를 탄탄한 기회로 만드는 필살기로서의 '메소력'은 나이 듦을 충만감으로 만드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이런 '메소력'의 에너지로 말한다면 60대 또한 다르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다. 저자의 말마따나, 오해와 속설로 인해 봉인되었던 '메소력'을 부활시키는 후기청년의 삶이야말로 인생을 의미 있고, 흥미진진하며, 특별한 기회(M.E.S.O)로 만든다. X세대를 주창했던 당시 청년은 지금 후기청년이 되어 세상을 다시 들썩이게 만들고 있다는 저자의 표현은 나로 하여금 다시 꿈을 꾸게 만든다.

저자의 주장처럼 20대는 청년, 40대는 중년, 60대는 노년, 이젠 이 프레임이 종언을 고할 때다. '인생은 60부터'라는 말은 옛날이야기다. 시사주간지 <타임>이 2015년 책표지에 어린아이 사진을 실으며 142세까지 살게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평균수명이 80세이지만 개발 중인 약물을 복용하면 142세를 산다는 것이다.

이제 인류는 더 긴 세월을 살게 되었다. 연령 구분도 달라져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유엔이 100세 시대 연령을 구분해 놓았다. 0세부터 17세까지가 미성년자, 18세에서 65세까지는 청년, 66세에서 79세까지가 중년, 80에서 99세까지가 노년, 100세 이상은 장수노인이다. 이에 따르면 4050세대가 후기청년이 아니고 나 같은 60대가 청년이다.

나는 아직 중년기와 노년기 그리고 장수노인기가 남아 있다. 아직은 살아내야 할 생애주기가 많이 남았다는 뜻이다. 피터 래슬릿의 표현을 빌자면, '제3의 나이'다. 그는 <새 인생의 지도>에서 '제3의 나이'를 삶의 진정한 의미를 누리고 정체성을 확보하며 개인적인 성취를 거두는 시기라고 했다. 누가 '노년'이라고 말하면, 감히 '청년'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죽음의 패러다임도 바뀌어야

나이 듦에 대한 두려움이나 거부감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내가 사는 마을의 평균 연령은 70대에 가깝다. 물론 시골 특징이라고는 하지만 어디 옛날에 그랬던가. 노령의 주민들이 아직 논밭에 엎드려 열심히 일한다. 물론 병원을 안 가는 게 아니다. 하루 걸러 하루가 병원 가는 날이다.

며칠 전 우리교회 한 성도의 장례를 치렀다. 그는 밭에서 혼자 일하다 쓰러져 갔다. 83세라는 나이로. 참 행복한 죽음이라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병치레 하다 병원 침상에서 이 세상을 하직한다. 우리네 장수 풍속도가 청년의 패러다임도 바꾸듯 이제는 죽음의 패러다임도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죽을 때가 되면 죽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자연스레 죽을 자유를 누려야 한다. 나도 기회 있을 때마다 죽음을 맞이하려고 하면 죽게 내버려 두라고 말한다. 100세 시대를 사는 우리는 생애주기에 대한 패러다임 못지않게 죽음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한다.

책은 2030년에는 손상된 몸에서 의식과 기억을 안드로이드 신체에 이식시키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라는 미래학자 토마스 프레이의 예언을 인용, 죽음이 옵션이 될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하지만 죽음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필수 사항이란 걸 잊으면 안 된다. 네덜란드의 91세 할머니 넬 볼튼이 가슴에 문신했던 글귀를 잊어선 안 되리라.

"나를 심폐 소생시키지 마시오!!! 나는 아흔한 살이오."

덧붙이는 글 | <4050 후기청년> (송은주 지음 / 더난출판 펴냄 / 2017. 2 / 239쪽 / 1만4000 원)
※뒤안길은 뒤쪽으로 나 있는 오롯한 오솔길입니다. 책을 읽으며 떠오르는 생각의 오솔길을 걷고 싶습니다. 함께 걸어 보지 않으시겠어요.



4050 후기청년 - 당신의 진짜 인생이 시작된다

송은주 지음, 더난출판사(2017)


태그:#4050 후기청년, #송은주, #노년, #중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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