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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연도나 날짜 등이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지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1949년 5월 18일은 신흥무관학교의 후신인 신흥대가 경희대로 다시 개교한 날이고, 80년 5월 18일은 광주민주화운동이 있었던 날입니다. 그리고 올해 5월 18일은 경희대 출신의 대통령이 직접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5.18을 헌법에 명시할 것을 약속한 날로 역사에 기록됐죠.

비록 아픈 현대사이긴 하지만 이런 정의의 승리는 자랑스럽고 정당하게 기록돼야 합니다. 5.18정신을 훼손하려는 시도에 엄중히 대응하겠다는 대통령의 연설은 무척이나 반가운 것이었죠.

하지만 '같은 날 다른 역사'의 기록이 늘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때론 똑같은 날짜여서 더욱 지독한 아이러니로 다가오는 경우도 있죠. 2017년 5월 24일이 그 날입니다. 이 날, 대만은 아시아 최초로 동성결혼이 법제화된 나라가 됐고, 한국의 군인은 그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해당 군인은 선고와 함께 제적됐고 유죄 판결의 충격으로 법정에서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됐습니다.

2017년 5월 24일, 같은 아시아 대륙의 대만은 동성혼이 법제화됐고 대한민국의 육군은 동성간 성관계 자체를 이유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2017년 5월 24일, 같은 아시아 대륙의 대만은 동성혼이 법제화됐고 대한민국의 육군은 동성간 성관계 자체를 이유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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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24일, 아시아 성소수자 인권 역사에 기록될 어느 날

해당 군인이 군형법 92조 6을 위배한 것 자체는 맞지 않느냐고요? 92조 6항의 위헌성은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군대 내 성군기는 중요하므로 92조 6항엔 위헌성이 없다고요? 그럼 완전히 같은 상황(영외성관계, 동영상 유포 등 없음)에서 피고인이 이성애자였다면 처벌의 대상이 전혀 아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뭐라고 답변하시겠습니까. 이번 일을 워싱턴포스트 등의 외신이 강한 비판의 어조로 보도한 점에 대해서는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성소수자 인권에 대한 논의는 성소수자 인권을 어떻게 하면 더 온전히 보장할 수 있을까에 대한 것이어야지, 성소수자에게 인권을 줄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논쟁일 수는 없습니다. 대선 토론에서 '동성애 싫어한다'는 정략적 발언을 한 현직 대통령 역시 차별금지법을 적극 추진했던 인권 변호사로 성소수자의 목소리에 언젠가는 힘을 보태줄 것으로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오늘이 아니란 사실에 피눈물이 흐릅니다.

영장도 없이 물품을 압수 당하고, 조사 과정에서도 '어디에 사정했는가' 따위의 질문을 들어야 했던 그. 전역을 코앞에 두고 제적 처리를 당해 국가에 헌신한 시간들을 온전히 부정당하고, 자신의 성적 지향을 동의 없이 가족 앞에 드러내야만 했던 그의 삶은 어디서부터 다시 쌓아 올려져야 합니까.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날 대만은 동성간 결혼을 사실상 허용하지 않았던 현행 법률에 위헌 판결을 내렸습니다. 동성간 결혼을 막는 것은 평등권을 위배하는 것이고, 성적 지향은 바뀔 수 없는 것이며, 사회 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것으로 볼 수 없고, 그것을 금지할 이유가 없다는 내용이었죠.

이는 아시아 최초입니다. 독일, 프랑스, 미국, 영국, 캐나다 등 서구 선진국이 동성혼을 법제화하는 덴 '대륙간의 문화적 차이'가 있다는 주장은 이제 힘을 잃게 됐습니다. 비행기 타면 직항으로 2시간 거리입니다. 어느 누군가는 평생을 함께할 권리를 얻었고, 어느 누구는 평생을 쌓아 온 것을 부정당하게 됐습니다. 날아서 2시간 거리인 두 나라의 성소수자에 대한 공권력의 판단은 이토록 달랐습니다.

동성애자 A 대위에게 바친다

이미 수많은 진보 언론인과 지식인들이 이번 군사재판의 판결에 대해 할 수 있는 정치적인 말은 다 한 상태이니, 저는 개인적인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국가가 비록 당신을 제적했더라도 당신이 국가를 위해 바친 시간은 결코 부정될 수 없습니다. 언젠가 당신이 나라를 위해 바친 시간을 돌려받을 수 있도록 많은 사람들이 함께 싸울 것입니다. 일단 저부터요.

지금이야 많이 피곤하고 지쳐 있겠지만 당신은 외로운 싸움 속에서 살아남았습니다. 법정에서 쓰러지며 남은 머리의 상처만 아물면 당신은 민간인이 돼 있고,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만큼 몸 또한 자유로울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여전히 찬란하도록 젊습니다. 다시 시작하기에 참 좋은 계절입니다.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하십시오. 많은 것을 잃었지만 돌려받게 될 것입니다. 싸우겠습니다. 당신을 위해서요. 혼자 싸운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증거가 있습니다. 하필 또 같은 날, 5월 24일, 당신에게 '유죄'판결을 내린 군형법 92조 6항의 폐지가 발의됐습니다. 국방부 장관정책보좌관인 정의당 김종대 의원도 참여했다는군요. 우린 많이 늦었습니다. 비행기로 고작 2시간 거리인 나라보다도 늦었습니다. 그 바람에 일찍 구할 수 있었던 당신을 쓰러뜨리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시작입니다. 당신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5월 24일은 결국 승리의 날로 기록될 것이고, 당신은 같은 날 그 출발점에 서 있던 이로 남게 될 것입니다.


태그:#성소수자, #대위, #군형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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