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회 디아스포라영화제(5월 26~30일) 개막작으로 선정된 김정은 감독의 <야간근무> 장면.

5회 디아스포라영화제(5월 26~30일) 개막작으로 선정된 김정은 감독의 <야간근무> 장면. ⓒ 김정은


"영화를 만들면서 사람이 괜찮아지고 있는 거 같아요. 예전에는 주변을 별로 살피지 않았거든요. 공부하기 바빴고, 어른들이 살라는 대로 살았어요. 영화는 인물이며 공간이고 다 내가 책임져야 해요. 그러려고 하다 보니 사람을 이해하고, 뭔가 생각해야 하고, 내가 어떻게 살고 있나 돌아보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는 거 같아요. 좋은 영화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영화를 책임지고 떳떳하려면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할 거 같아요."

지난 15일 남동구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김정은(27) 감독의 말이다.

"세상을 왜곡하지 않고 현실을 잘 주워 담고 싶어요. 현실을 담아내되 영화로 약간 희망을 주고 싶기도 해요. 현실이 각박하지만, 영화를 보는 순간만큼은 실낱같은 희망을 품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죠. 예전에는 비관적이고 무기력한 느낌의 영화를 많이 만들었는데, 위로도, 용기도 줄 수 있는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서 영화 <야간근무>도 만들었어요."

20대 여성들의 연대 이야기

인천시·문화체육관광부·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최하고, 인천시영상위원회·인천문화재단이 주관하는 디아스포라영화제(www.diaff.org)는 지난해까지 4년간 다양한 시도로 문화 다양성을 확장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올해 5회 영화제는 5월 26일부터 30일까지 인천아트플랫폼 일대에서 다양한 디아스포라를 조명한 국내외 영화 50편을 상영한다.

26일 개막작은 김정은 감독의 <야간근무>다. 27분짜리 단편인 이 영화는 인천의 공단에서 함께 일하는 캄보디아 출신 린과 한국인 연희의 만남과 자매애를 그렸다. 인천에서 태어나 초·중·고등학교를 인천에서 졸업하고 용인대학교에서 영화연출을 전공한 김 감독이 실제 경험한 내용을 영화에 담았다고 한다.

"졸업 영화를 찍는데 후반 제작비용이 모자라 야간에 공장에서 일했어요. 야간근무는 임금이 높으니까 여름방학 때 보름간 밤 근무를 했어요. 그때 공장에서 만난, 베트남이나 중국에서 일 하러 온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어요. 마침 그 무렵 제 친오빠가 캐나다로 '워킹홀리데이'를 갔는데 외국인 친구들을 만나니까 오빠 생각도 나더라고요. 제가 만난 외국인노동자들의 모습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다뤄지는 모습 하고 달랐어요.

그들은 건강하고 씩씩하게 잘 지냈어요. 일하면서 공부할 생각으로 캐나다로 간 오빠도 그 나라 국민이 보기엔 이주노동자잖아요. 오빠와 그들이 별 차이가 없더라고요. 내가 선입견과 고정관념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했고, 낯선 땅에 와서 꿋꿋하게 사는 모습을 보니 내가 위로되더라고요. 나와 같은 20대 여성들이 '좋은 일이 생길 거야, 친구가 생길 거야'라는 느낌으로 연대하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지난해 한여름에 작업하느라 고생을 많이 했던 <야간근무>는 공장 장면이 많아 더 힘들었단다. 김 감독은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장소를 빌려준 공장 사장이 처음엔 협조를 잘 해줬어요. 나중에 영화의 흐름을 보니 사장이 좋게 그려지지 않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는지, 엑스트라로 협조했던 외국인노동자한테도 찍지 말라고 말리더라고요. 또 다른 에피소드도 있어요, 술집이 많은 주안 번화가에서 밤에 촬영한 적이 있는데, 거리를 통제하니까 취객들이 반항하면서 여배우를 때리려고 했어요. 저예산 영화라 통제하는 데 어려움도 있고, 스태프이 어리다 보니 만만해 보였나 봐요."

인천영상위원회는 지난해 지원 작품 10여 개를 선정했다. 지원 사업을 마무리하면서 선정된 작품 상영회를 했는데 이주와 관련한 테마를 선택한 영화는 <야간근무>가 유일했다.

"개막작은 영화제 간판이랄 수 있잖아요. 기분 좋고, 영화제가 기대됩니다. 개막식 때 말고도 영화제 기간에 두 번 정도 상영하는데 한 번은 '감독과 대화 시간'이 있어요. 많은 관객을 만나고 싶습니다."

상업적으로 성공하기보다 고유한 색깔의 영화 만들고 싶어

 인터뷰에 응한 김정은 영화감독.

인터뷰에 응한 김정은 영화감독. ⓒ 김영숙


김 감독은 졸업 영화인 <우리가 택한 이 별>로 5회 충무로단편영화제 우수작품상을 받았다. <우리가 택한 이 별>은 같은 해인 2015년 서울독립영화제와 전주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돼 상영되기도 했다. 영화 <야간근무>도 18회 전주국제영화제 초청작에 선정됐고, 19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16회 미장센단편영화제에 출품됐다. 신인 감독치고 성적이 나쁘지 않다.

"경쟁 부분에 출품된 거라 기대는 안 해요. 초청받아서 상영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습니다. 또래나 동기 중에 잘된 경우라고 볼 수 있죠. 영화제에 출품했는데 안 된 동기들도 많고, 본인이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거든요."

김 감독은 고교 3학년 때 진로를 고민하다 우연히 초교 3학년 때 장래희망으로 '영화감독'이라고 적은 종이를 발견했다. '영화를 좋아하고 유명해지고 싶어서 그랬던 게 아닌지'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고교 3학년 때 영화감독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간호사라서, 부모는 그녀도 보건의료 쪽 전공을 선택하길 바랐다. 그러나 영화과에 합격하자 부모는 그녀의 결정을 반대하지 않았고 지금까지 지지하고 있다.

"우리 학교 커리큘럼이 엄청 빡빡해요. 2학년 때 영화를 6편 정도 찍어야 하고, 3학년 땐 필름 영화를 만들어야 해요. 그래서 3학년 때 힘들어서 자퇴하는 사람이 많아요. 남은 동기들끼리 똘똘 뭉쳤는데, 그때가 재밌었죠. 졸업반 때 다른 친구들은 취업준비로 바빴지만 저는 영화라는 결과물을 만드는 게 흥미로웠어요. 졸업 영화가 큰 영화제에 나가 응원을 많이 받았고, 더욱 용기를 얻었습니다."

김 감독은 상업영화나 이른바 '작가영화'라고 하는 독립영화에 대한 선택기준을 가지고 있다. 한쪽을 부정하는 게 아닌 관객과 소통하는 영화라면 무엇이든 도전할 가치가 있다고 덧붙였다.

"상업영화가 빤하고 재미없다는 편견을 갖는 사람도 있는데, 영화를 즐길 수 있다면 그것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만들고 싶은 건요, 관객들한테 외면당하지 않으면서도 하고 싶은 얘기를 솔직하게 하는 거예요. 상업적으로 성공해 돈을 많이 버는 감독들이 아직 부럽진 않아요. 그보다 감독의 고유한 색깔이 있는 영화를 꾸준히 만들면서 관객들한테 인정받고, 마니아층과 소통하는 영화를 만드는 게 가장 부러워요."

스릴러·액션·코믹 등, 장르 영화에도 도전

김 감독은 아직은 20대인 본인이나 친구 또는 지인들의 청춘에 관한 이야기를 영화에 담고 싶다고 했다.

"우리 세대가 겪는 고민을 얘기하고 싶어요. 내가 찍고 내가 보고 싶은 욕구로부터 출발하는 거죠. 하지만 다양한 세대를 포괄하는 영화도 고민하고 있습니다. 현실에 천착하지만, 현실과 다른 장르 영화에도 도전해 관객들에게 유쾌함을 주고 싶기도 하고요."

어떤 장르에 도전하고 싶은지 물으니, 스릴러·액션·코믹 등 다양한 답이 나왔다.

"대학 2학년 때 코믹액션 영화를 찍었어요. 여자주인공이 직장 상사로부터 회식 자리에서 술을 강요당했는데, 만취한 여자주인공이 취권으로 상사를 때려눕히는 영화에요. 찍고 나서 사람들한테 보여주는데 사람들이 웃을지 안 웃을지 긴장하면서 보는 게 싫더라고요.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진지한 영화를 찍었어요. 언젠가는 여성들이 연합해서 액션을 하는 활극을 찍고 싶기도 해요."

감독으로서 중장기적 계획을 묻자, '영화로 밥 벌어먹고 싶다'는 말을 강조했다. 대학 때 교수 중 한 명이 한 얘기라고 덧붙였다.

"신인 감독으로 단편영화를 제작하는 것도 재밌지만, 목표는 장편영화에 데뷔하는 거죠. 30대 초반에 장편으로 입봉하고 싶어요. 입봉하고서 대박 나는 영화보다는 먹고 살 정도만 되면 좋겠어요. 홍상수 감독은 매해 작품 두 편을 만드는데 관객이 5만 명 정도에요. 그 정도를 유지하면서 자신만의 색깔이 있는 영화를 꾸준히 만들잖아요. 저도 꾸준히 하면서 밥 벌어먹고 싶어요."

교수가 한 이야기를 '지원금이나 자비로 영화를 제작하는 게 아니라, 관객이 낸 돈으로 영화를 찍어야 한다'는 얘기로 김 감독은 이해하고 있다. 말 그대로 밥 벌어 먹고살 정도의 영화를 만들어 관객이 아깝지 않게 돈을 내고 볼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걸 강조하는 거라면서.

좋아하는 배우는 배두나라고 말한 김 감독은 그 이유로 '팔색조' 같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떤 영화든 배우와 영화 속 주인공이 일치되는 느낌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중성적인 이미지라 희소성 있는 배우라고도 했다. 좋아하는 감독은 봉준호 감독과 코레에다 히로카즈, 다르덴 형제(장피에르·뤼크 다르덴), 자비에 돌란 등이다.

"영화를 안 했으면요? 술집이나 게스트하우스, 펜션을 차려 한량처럼 살았을 거 같아요. 여행 다니거나 놀러 온 사람들과 만나면서 내가 하고 싶은 거 했을 것 같아요."

영화는 내 친구

 5회 디아스포라영화제(5월 26~30일) 개막작으로 선정된 김정은 감독의 <야간근무> 장면.

5회 디아스포라영화제(5월 26~30일) 개막작으로 선정된 김정은 감독의 <야간근무> 장면. ⓒ 김정은


김 감독은 단편과 장편, 두 편을 작업하고 있다. 단편영화는 10분짜리로 자신의 할머니를 다룬 작품이다.

"대학 3학년 때 <주말의 집>이라는 단편영화를 만들었어요. 저와 엄마, 할머니까지 3대를 다룬 영화인데요, 자취하던 제가 주말에 집에 가는 것과 춘천에 사는 할머니를 보러 엄마가 주말에 다녀오는 모습을 그렸어요. 짧은 만남이지만 상대방의 처지를 서로 이해하는 내용이었죠. 이번에도 비슷한데, 그냥 할머니의 모습 자체를 찍고 싶어요. 할머니께서 혼자 사시는 게 불안했던지 엄마가 할머니 집 안에 CCTV를 설치한 게 전 충격이었어요. 엄마는 할머니의 생전 모습을 녹화하려 한다고도 하셨는데, 예쁘지 않을 것 같아 제가 예쁘게 극영화로 만들겠다고 엄마께 말씀드렸어요."

마지막으로 김 감독에게 영화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친구라고 했다.

"상투적이지만 친구라고 생각해요. 즐거울 때나 슬플 때나 힘들 때나 같이 가고 싶어요. 영화로 위로받고 속마음을 터놓을 수 있을 거 같아서요. '나'라는 세계를 관통해서 생각하고, 친구한테 말을 풀어놓듯이 영화에 쏟아요. 이런 생각으로 영화를 만듭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시사인천>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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