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지력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이렇게 기가 막히게 타이밍을 맞춘 드라마도 없다 싶었다. 새 대통령이 뽑히며 시작된 새 시대에 발맞춰, 드라마 <귓속말>에도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법률 카르텔의 아성 태백이 무너지고, 그 대표 최일환(김갑수 분)은 살인 혐의로 무기를 판결받았다. 그의 비호를 받던 법조계 인사들은 모두 교도소 신세가 된다. 돈 봉투로 좌천당하는 우리의 법조계 인사들보다 한술 더 뜬다. 그 놀라운 신세계, 하지만 <귓속말>을 애청한 사람이라면 안다. 그 신세계가 도래하기까지 17부의 길고 긴 공방전이 펼쳐졌었음을.

<귓속말>은 자신들이 가진 모든 법 지식을 동원해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려는 강정일(권율 분), 최수연(박세영 분)이 결국 죗값을 받는 결말을 통해 현실 법꾸라지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건넸다.

마중물 된 이동준, 그의 고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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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자, the chaser> <황금의 제국> <펀치>. 박경수 작가는 복수 3부작을 통해 우리 사회 이권 카르텔을 속속들이 파헤친 바 있다. 복수의 대장정을 끝낸 그가 새롭게 돌고 돌아온 <귓속말>은 '박경수 표' 치정극이었다.

공정하다는 평판이 자자한 젊은 판사 이동준(이상윤 분). 하지만 너무 곧으면 부러진다 했던가. 대법원장 사위의 재판에서조차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그는 대법원장을 비롯한 그간 그로 인해 불이익을 받았던 법조계 인사들로 인해 궁지에 몰린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자신의 강직함으로 돌파하고자 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운영하시는 요양원의 어려움을 돕고자 나섰다가 엄청난 위기에 봉착하게 되고, 결국 태백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

자신의 남은 인생을 위해 딱 한 번 눈 질끈 감은 오심. 하지만 신영주(이보영 분)는 그로 인해 아버지를 억울하게 감옥에 보내야 했다. 신영주의 도발적 복수와 함께 <귓속말>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늘 착한 역만 맡던 이상윤의 캐릭터가 무색하게, 드라마 시작부터 이동준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양심을 판다. 그가 판 양심의 대가는 가혹했다. 남들은 부러워하는 태백의 사위가 되었지만, 그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아내 최수연과, 그를 다그치며 목을 죄어오는 신영주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시간을 보낸다.

양심을 파는 건 단 한 번이면 족하다고 생각했지만, 태백이라는 우리나라 최대 로펌의 일원이 되었다는 건, 그 한번이 영원으로 변하는 신호탄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된다. 바로 그 기로에서 고뇌하는 강직했던 판사는, 태백이라는 법률 카르텔의 일원으로 일신상의 안락과 영화를 누리는 대신, 신영주와 '적과의 동침'을 택한다.

한 번의 일탈이 만든 악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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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가 선택했다고 해서, 그의 삶이 바로 개과천선 될 수는 없었다. 호시탐탐 그의 목숨까지 노리는 강정일과 최수연,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의 배후에서 그를 너끈히 가지고 노는 최일환, 그리고 여전히 그를 미더워하지 않는 신영주 사이에서 그는 이리저리 끌려다녀야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는 자신의 신념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언제나 박경수 작가의 작품이 그래왔듯, 자신의 과오를 깨닫고 자신을 과오에 빠뜨린 우리 사회 기득권 체제에 도전하는 주인공의 행로는 고달프다 못해 롤러코스터가 따로 없다.

이기는 듯 싶으면 주저 앉히고, 승기를 잡았나 싶으면 궁지에 몰렸다. 그런 이동준으로 분한 이상윤은 늘 뜻하지 않게 자신을 덮치는 위협과 위험에 시달려야 했다. 여느 드라마라면 장군 멍군치고, 마지막 한판승으로 '카타르시스'를 담뿍 주며 명쾌한 승리의 세레모니를 안겨주었겠지만, 박경수 작가는 17부작 내내, 심지어 한 회에서 몇 번씩 판세를 뒤집으며 주인공을 위기로 몰아갔다. 자신의 영혼을 팔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주인공은 그래서 더 고통받고, 그런 그의 고통과 몸부림은 결국 우리 사회 '적폐'의 일소가 그만큼 '간단'치 앉음을 반증한다.

결국 스스로 태백의 주인이 되어 태백을 붕괴시키려 했지만 그 조차도 여의치 않았던 이동준은 결국 자신을 '정의의 마중물'로 바친다. 스스로 불법 자금의 유입 서류에 사인을 하고, 비자금을 든 가방을 들고 나선다. 그리고 바로 자신의 법복을 벗긴 그 '함정'을, 자신의 죄로 고백한다. 그렇게 이동준 자신을 마중물로 내던지고 나서야 견고한 태백의 '이권 카르텔'의 균열이 시작된다.

광장을 메운 촛불이 밝혀지고서야 구태의 정권이 무너지듯, 새 시대는 그렇게 느리게 그리고 완강한 저항을 넘어 힘들게 다가선다. 그러기에 이동준 판사의 지난한 고행기는 마치 많은 이들의 희생과 노력으로 맞이한 이 시대를 고스란히 상징하는 듯 반갑고 갸륵하다.

엇갈린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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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귓속말>은 그간 박경수 작가의 작품들이 '성공담' 혹은 '수사물', 그리고 정치물이었던 것과 달리, 태백이라는 로펌을 배경으로 두 연인의 사랑 이야기였다는 점에서 신선한 구도를 보였다.

아버지를 감옥으로 보낸 이동준을 파멸시키기 위해 자신을 던진 신영주. 왜 하필 이동준이었을까? 판결은 이동준이 내렸지만 그 뒤에 태백이, 그리고 그의 하수인들이 즐비하게 포진하고 있었음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신영주의 분노는 강직한 판사라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 건넨 증거를 망가뜨린 이동준을 향했다.

신영주에게 이동준은 복수의 대상이었고, 이동준에게 신영주는 자신의 목을 죄는 존재였다. 하지만 이들은 결국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이들의 사랑이 신선하고 매력적이었던 것은, 견원지간처럼 으르렁거리며 만난 이들의 '동지적 사랑'이라는 데 있다. 마지막 재판에서 "신영주 당신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것"이라던 이동준의 소회처럼, 이동준은 신념과 복수를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신영주에게 믿고 의지했다.

이동준과 신영주가 원수에서 연인이 되었다면, 같은 시간, 연인에서 원수가 된 강정일과 최수연의 사랑도 있다. 아버지의 반대에도, 최수연의 정략 결혼에도, 흔들리지 않던 두 사람은, 자신들의 사랑과 미래에 걸림돌이 되는 이동준을 제거하기 위해 의기투합한다. 이 과정에서 앙숙이자 동지인 각자의 아버지들에게 약점이 되지만, 무엇도 이들의 사랑을 막을 수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강정일은 자신의 이해 관계를 위해 최수연을 버리고, 최수연은 그런 강정일의 배신에 분노한다. 그렇게 원수가 된 두 사람의 치킨 게임은 결국 서로와 서로의 집안을 파멸 시키고 만다. 자신들이 가진 기득권에 발목이 묶인 이들의 사랑은, 자신들은 아니라 했지만 결국 '정략 연애'의 다른 버전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귓속말>은 그 이전 박경수 작가의 작품과 달리, 이 시대의 두 연인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들의 사랑은 마치 <사랑과 전쟁> 태백 편을 보는 듯, 치열했다. 이들의 서로 다른 사랑 방정식을 통해, 이 시대의 정의와 그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고민을 담아낸 <귓속말>. 그 길고도 지루한 공방의 끝은 죄값을 치르고 출소한 이동준의 밝은 표정처럼, 홀가분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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