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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 도선굴에서 바라본 구미시가지
 금오산 도선굴에서 바라본 구미시가지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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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서 이어집니다 : 금오산을 바라봤다, 갑자기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나의 할아버지(박룡해, 朴龍海)는 1900년 선산군 도개면 도개동에서 태어났다. 1910년 소년 시절 나라가 망했다. 앞날이 캄캄했던 청년 시절 할아버지는 나라 찾는 일에 도움이 될까 하여 '보천교'라는 동학계열의 종교에 심취해 가산을 모두 헌납했다. 그런 뒤 종손으로 집안과 문중의 비난에다가 호구지책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거기서 고물상으로 수중에 얼마간 목돈을 쥐게 되자 귀국해 도개면을 떠나 금오산이 빤히 올려다 보이는 구미면 원평동에 정착했다.

나의 아버지(박기홍, 朴基弘)은 1926년에 도개에서 태어나 구미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도쿄에서 중학교를 다녔다. 중학교 4학년 재학 중 귀국했는데 그때는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라 할아버지의 권유로 조혼하게 됐다. 그래서 내가 태어나게 됐고, 도쿄 공습이 심해지자 고향에서 피신 중 지서 주임에게 발각, 전시에 젊은이가 빈둥빈둥 놀고 지낸다 해 도개보통학교 교단에 서게 됐다.
아버지의 제4대 민의원 출마 당시 민주당 공천장
 아버지의 제4대 민의원 출마 당시 민주당 공천장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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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해방이 되자 모교인 구미초등학교 교사로 지내던 중, 10.1 항쟁에 연루돼 교단을 떠났다. 이후 당신의 생애는 평탄치 못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선산 구미지구 민주당 공천으로 입후보했으나 낙선 후 평생 통일운동가로 당신 생애가 파란만장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는 산이나 들에서 돌아올 때면 이따금 산딸기나 오디를 칡잎이나 호박잎에 싸오셔서 말없이 내게 건네주셨다. 요즘처럼 군것질이 흔치 않던 시절이라 그것은 나의 입을 즐겁게 했다.

여섯 살이 되던 해부터 나는 할아버지가 거처하던 사랑으로 건너가서 회초리를 맞으면서 <천자문> <동몽선습> <명심보감>을 배웠다. 지금도 그때 배운 글귀가 아련하다.

"군자는 먹는데 배부름을 구하지 않고, 사는데 편안함을 구하지 않는다.(君子 食無求飽 居無求安)"

금오산 들머리에 있는 길재의 회고가 비석
 금오산 들머리에 있는 길재의 회고가 비석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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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절의 고장

할아버지는 천문지리에 조예가 깊었다. 우리 집 마당에서는 금오산이 빤히 바라보였는데, 할아버지는 때때로 산을 바라보면서 내게 글 하는 선비가 되라고 말씀하셨다.

"저 산은 예사 산이 아니다. 일찍이 신라 때 도선이 점지한 산이다. 멧부리가 보는 곳에 따라 모양새가 달라서 '필봉(筆峰)' '귀봉(貴峰)' 또는 '거인봉(巨人峰)'이라고도 하고, 부처님이 누워있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와불상(臥佛像)'이라고 한다."

할아버지는 금오산 산수에 매료된 나머지 그 산이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곳에다 집을 마련했던 것이다. 때때로 할아버지는 명심보감 강독 중 금오산이 낳은 수많은 인물의 얘기를 내게 일렀다. 고려 말 야은 길재 선생과 조선시대의 사육신 하위지, 생육신 이맹전 그리고 김숙자, 김종직 같은 분의 얘기와 아울러 이중환의 <택리지>도 말씀하셨다.

금오산 채미정으로 뒤에는 길재를 기리는 사당이 있다.
 금오산 채미정으로 뒤에는 길재를 기리는 사당이 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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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일선(선산의 옛 지명)에 있다 한다. 그런 까닭으로 예로부터 문학하는 선비가 많았다.(朝鮮人才 半在嶺南 嶺南人才 半在一善 故舊多文士)"

그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버스는 터미널에 도착했다. 삼일문고 오픈 시간은 두어 시간 남았기에 오랜만에 고향 시가지를 살폈다. 구미역 광장에서 그새 변모한 고향의 주변 풍물들을 내 기억 속의 고향과 대조해봤다. 누렇게 퇴색된 한 장짜리 국민학교 졸업기념 사진에서 이미 칠순이 된 옛 죽마고우들의 모습을 되새기는 것처럼.

옛 모습을 지닌 금오산

내가 고향을 떠날 때인 1961년만 해도 구미 일대는 6.25 한국전쟁 전란의 잔재가 덕지덕지 마마 자국처럼 을씨년스러웠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펼쳐진 고향의 모습은 전화의 참상도, 초가집도, 진흙길도, 잡초도 보이지 않는 아스팔트길에 빌딩이 즐비한 화려한 도시로 나는 마치 고향이 아닌 타향의 어느 낯선 도시를 찾은 착각이 들었다. 다만 변함없는 것은 창공에 우뚝 솟은 금오산만이 옛 모습 그대로 어느 초라한 귀향자를 감싸줄 뿐이다.

한참이나 고향 거리를 쏘다녀도 내가 아는 사람도 나를 알아주는 사람도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사람들 중 태반은 이미 고향을 떠났거나 아니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닐 테고 남은 고향 사람조차 타지로 떠나 버렸을 것이다. 하필이면 그날 구미초등학교 중학교 동창생들은 동해안으로 나들이를 갔기에 더욱이 만날 사람이 없었다.

한 바퀴 휘돌아 본 고향은 어디를 가나 모텔, 술집, 마트, 세탁소, 미장원, 휴대전화 가게, 커피점 등으로 사람들이 복작거리는 소음의 도시, 위락의 도시, 차량들이 붐비는 도시로 지난날 가난했지만 한적한 모습으로 따사한 인정이 넘쳤던 훈훈함을 찾을 길이 없었다.

삼일문고 김기중 대표가 행사 시작 전에 미리 와서 전시된 <허형식 장군> 저자 사인을 부탁해서 1시간 전에 그곳에 도착했다. 김 대표가 내놓은 책에 사인을 마친 후 서점 내부와 별실에 마련된 신영복 선생 1주기 시화전을 둘러봤다. 제3공화국 당시 통혁당 사건으로 20년이 넘는 오랜 수감 생활 끝에 출감하여 남기신 서예 작품이 당신을 감옥으로 보낸 박정희 전 대통령 고향마을에서 시화전을 연다는 것은 저승에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도, 신영복 교수님도 놀랄 일이 아닐 수 없다.

신영복 교수님의 유작 '동행'
 신영복 교수님의 유작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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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것이 역사다. 음지가 양지가 되고, 양지가 음지가 되는 게. 나는 사형수의 아들이 이후에 대통령의 아들이 된 것을 직접 목격했고, 그 자리에 초대받아 참석하여 감개무량하다는 건배사를 하기도 했다.

나는 신영복 교수님의 여러 유작 가운데 유독 <동행>이라는 작품이 감명 깊었다. 토끼와 거북이가 동행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먼 길을 함께하는 아름다운 동행입니다"라는 신 교수님의 작은 글씨의 말에 더욱 공감했다. 이런 세상이 아름답지 않겠는가.

삼일문고 내부 서가
 삼일문고 내부 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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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20일) 오후 4시 삼일문고 창립 개점식이 열렸다. 김 대표가 내게 10분 정도로 '저자의 말' 시간을 내줬다. 나는 전날까지 준비치 못했지만 원주에서 구미로 버스를 타고 가면서 요지를 수첩에 메모해뒀지만 막상 마이크를 잡자 생각이 달라졌다.

그날 내빈석 절반은 어린이들이었다. 그들에게 아픈 현대사를 들려줘야 '쇠귀에 경읽기'일 것이리라. 그리고 작가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글로써, 작품으로 말하는 이가 아닌가. 그래서 나는 '감개무량하다'는 소감과 하필이면 삼일문고가 들어선 그 자리가 1950년 7월 하순 어느 날 우리 가족이 달구지에 살림을 싣고 낙동강으로 피란을 갔다가 인민군들의 제지로 도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미군 쌕쌕이(전투기) 공습을 만나 숨었던 그 과수원 자리였다.

그래서 나는 그때 이야기와 예로부터 금오산에는 많은 인물이 배출됐다는 얘기를 했다. 그리고 허형식 장군은 자기 부하를 위해 희생한 진정한 애국지사라는 말과 함께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을 했다. 아울러 그들에게 내 건강이 허용된다면 마지막 작품으로 '인간 박정희'를 그려보고 싶다는 말로 마무리했다.

구미초등학교 교정의 박정희 대통령 동상
 구미초등학교 교정의 박정희 대통령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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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라도 박정희 신드롬에서 벗어나야

그날 만난 몇몇 고향사람들은 이즈음 정신적으로 무척 힘들다는 얘기를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많은 고향사람들이 구미에서 태어난 박정희를 지나치게 신격화·우상화했기 때문이다. 그분은 보통 사람일 뿐인데도, 그 모든 것을 우상화했다. 살아 생전보다 사후에 일부 아첨배가 더 극성을 부렸다.

그들은 지방 토호나 주로 정치인들이었다. 솔직히 그들은 박정희를 존경해서 그런 게 아니고, 대부분 이권이나 자기들 정치적 야욕을 이루고자 신격화·우상화에 앞장 섰던 것이다. 심지어 대통령 후보자마저도 박정희 생가를 찾아가 고개를 숙였다.

어느 해 구미문화원에서 보내온 책자를 보니까 박정희 생일날은 탄신제라 하여 마치 왕조시대처럼 국회의원, 시장 등 지방 토호세력들이 죄다 몰려와 마치 종묘제례 때처럼 사대부 예복을 입고 초헌관, 아헌관으로 앞다퉈 술잔을 올리는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이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존경의 마음보다 자기 자리 보전과 더 큰 정치적 야망을 이루고자 하는 작태들이었다.

내가 알기로 어린 시절 박정희는 집안이 가난하고, 체구도 작고, 양반도 아니라고, 고향 사람들에게 숱한 냉대를 받았다. 심지어 처가에서조차도 그런 냉대에 분기충천해 청년 박정희는 긴 칼을 차고 그들을 호령하고자 교사직도, 본처도 버리고 만주로 갔다.

구미 상모동 원래의 박정희 대통령 생가 모습
 구미 상모동 원래의 박정희 대통령 생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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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실에도 고향의 토호들은 오직 자기 출세와 이익을 위해 박정희를 우상화·신격화를 시켰다. 그도 부족하여 인문 소양이 한참 부족한 그 딸마저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그 결과, 마침내 헌정사상 초유의 탄핵 사태를 맞은 것이다.

사실 구미공단도 지나치게 확장한 점이 없지 않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처럼, 무슨 일이든 지나치면 반드시 부작용을 낳게 마련이다. 구미 경제가 말이 아니라는 소리를 들은 지 오래다. 구미공단에 문 닫는 공장이 날로 늘어난다는 얘기도 들린다. 그날 내가 귀갓길에 버스를 타고 구미공단을 지나는데, 어딘지 모르게 침체된 분위기를 느꼈다.

오늘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각(23일), 박근혜 전 대통령이 쇠고랑을 차고 TV 화면에 등장했다. 누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그 1차 책임은 본인에게 있지만, 고향사람을 비롯한 우리 모두가 역사를 잘 모르고 인문을 매몰시킨 결과일 것이다. 솔직히 거기에는 평생 평교사로 별 볼 일 없이 산, 변방의 글쟁이인 내게는 책임이 없다고 빠져나오지 않겠다.

내가 항일답사길에서 만나고 살펴본 바, 일제강점기 구미 임은동 왕산 후손들은 일본 군경의 감시와 박해에 견디지 못하고 만주로 떠났다. 그들 항일 후예들은 해방이 돼도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채 아직도 세계 곳곳에서 유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반대편에 섰던 후손들은 어떠한가.

이제라도 내 고향 구미뿐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이 인문을 숭상하고, 지난 역사를 바로 알고 사랑하며, 정의와 도덕이 살아 숨쉬는 사회로 거듭 되살아났으면 좋겠다.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그날 구미에서 원주행 막차로 구미공단을 지나오는데 또 어린 시절 생각이 났다. 해마다 이맘때면 낙동강 갯밭에는 밀과 보리가 누렇게 익었다. 우리 악동들은 낙동강 둑에다 몰고온 소를 팽개친 채 남의 밭 밀을 뽑아왔다. 그것을 불에 그슬려 입술이 새까맣게 먹거나 샛강에다 소를 집어넣고 소꼬리를 잡고 멱을 감았다. 그렇게 해가 저물도록 신나게 논 다음 소등을 타고 돌아오면서 조잘거렸다.

"말 탄 놈도 끄떡, 소 탄 놈도 끄떡 …"

나는 고향을 사랑하고 그리워한다.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고향은 '반신반인(半神半人)'의 고장도 아니요, 흥청망청하는 소란의 도시, 공해 배출의 도시도 아니다. 내가 바라는 고향은 옛 것을 지키면서도 새 것을 받아들이는, 정신과 물질이 균형을 이루는, 인문과 예술을 숭상하는 그런 고향 땅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차창에서 멀어지는 금오산을 바라보며 시 한 수를 읊었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 정지용 <고향> 중에서

채미정에서 바라본 금오산
 채미정에서 바라본 금오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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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구미 , #박정희 , #삼일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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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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