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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홋카이도
 홋카이도
ⓒ 정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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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엄마 아빠와 행주산성이라는 곳에 자주 산책을 갔다. 주말이면 등산객으로 마구 붐비는 곳이었는데, 그들을 따라 조금 올라가다 보면 빽빽이 들어선 식당들이 나타났다. 우리는 고민하지 않고 언제나 꼭대기에 있는 한 식당을 들렀다.

주인 할머니는 금방 우리를 보고 반가워하셨다. 그리고 쏜살같이 부엌으로 들어가시는데, 이내 냄비와 프라이팬이 달그락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제법 정겨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름달 같은 감자전이 나오면, 나는 바삭한 끄트머리를 뜯어먹기에 여념이 없었다.

기다란 옛날식 연탄난로, 커다란 통나무 식탁, 그리고 감자전을 다 먹을 때 즈음 등장하는 오동통한 백숙…. 그 후 10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성인이 되었고, 할머니는 악화되는 건강 탓에 가게를 정리하셨다. 이곳은 영원히 나의 가슴 한구석에 변하지 않는 식당으로 남았다.

어찌 된 일일까. 설마 홋카이도의 한 가게에서 이 추억을 떠오르게 될 줄이야. 문을 열자마자 들리는 달그락거리는 냄비 소리, 투박한 통나무식탁, 벽 한쪽을 장식한 그림들…. 마치 나는 10년 전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이것은 그리움 이상의 반가움이었다. 그때의 추억에 젖어 나는 돈카츠와 녹차 한 잔을 시켰다.

진한 녹차와 바삭한 돈카츠, 선물같은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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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나온 녹차부터 심상치 않은 모습이었다. 보통 내가 알던 녹차는 티백이나, 가루를 우린 물이었다. 그런데 여기는 굉장히 농축된 듯한 색깔의 즙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적당히 쌉싸름한 것이, 부담스럽지도 않으면서 개운한 맛이었다.

이곳에서 처음 먹어본 가츠카레 또한 일품이었다. 바삭한 튀김옷을 입은 돼지고기를 반만 카레에 적신 음식이었다. 비벼 먹지 않고 밥은 꼬들한 그대로, 고기 또한 바삭한 그대로 카레와 함께 떠먹었다. 한국에서 중간고사를 보고 있는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사진을 찍어 보냈다.

"여행 잘하고 있구나. 장하다."

마치 부모님처럼 대견해 하는 아이들을 보니 재미있었다. 자신도 지금 집에서 밥을 먹고 있다고 사진을 보내준 엄마를 보니 감사함과 그리움이 교차했다. 나는 단순히 혼자 여행을 떠난 것이 아니었다. 나를 믿고 보내 준 사람들의 책임감을 짊어지고, 그들에게 색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창문이 된 것이다. 혼자 던져지면 어른스러워진다는 말이 이런 게 아니었을까. 이 식당에서 10년 전의 나를 떠올렸을 때, 나는 그때보다 많이 성장한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행에서 뜻밖의 선물을 받은 날이었다.

야무지게 구운 양고기, 그야말로 '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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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에 와서 내가 꼭 먹어보리라 생각했던 음식이 있다. 지난 1월에는 패스했었다. 그랬더니 '어떻게 이걸 안 먹고 올 수 있냐'며 다들 눈물 섞인 잔소리를 해대는 것이 아닌가. 이번에는 줄 서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먹고오리라 다짐했다. 홋카이도하면 빠질 수 없는 음식, '양고기'다.

내가 간 집은 1인 화로로, 주문한 고기가 나오면 직접 자신의 불판에 구워먹는 형식이었다. 내 옆에는 일본인 샐러리맨이 앉아있었다. 가게 직원들과 수다를 떠는 것이 한두 번 온 솜씨는 아닌 듯했다. 능숙하게 고기를 굽는 모습을 보고 절로 '오오' 추임새가 나왔다.

행복한 모습으로 맥주를 벌컥 들이키는 모습이 꼭 우리나라 술집 풍경과 비슷했다. 모든 일이 끝나고 밤이 찾아오면, 그제야 자신의 짧은 시간을 가지는 그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들 맥주 한 잔과 고기 한입에 세상을 다 가진 듯 즐겁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 양고기는 그저 맛있는 음식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는 듯했다.

드디어 내가 손수 구운 양고기를 입 속에 넣었다. 갓 구운 고기 속에서 사르르 흐르는 육즙이 그야말로 환상이었다. 맛만 보기로 했었는데, 가게를 나갈 때에는 이미 뱃속이 그득해있었다. 기분 좋은 배부름은 언제나 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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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레라는 요리는 참 신기하다. 이름은 모두 '카레'인데, 수만 가지의 새로운 모습이 있다. 일본, 한국, 인도만 봐도 그렇다. 난과 찍어먹기 딱 좋은 농도의 진한 인도의 카레도 매력적이고, 딱히 먹을 것이 없을 때 부담 없이 밥 한 그릇 비벼 먹을 수 있는 한국 카레도 좋다. 갓 튀긴 치킨 가라아게를 넣어 밥과 함께 떠먹는 일본 카레도 그 개성이 대단하다. 그리고 카레는 홋카이도에서 또 색다른 옷을 입고 등장하였다. 그 이름은 바로 '스프카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식사시간을 제대로 못 지킬 때가 많다. 이날이 그러했다. 저녁시간을 놓쳐 배가 등가죽에 붙은 상태였다. 발은 퉁퉁 붓고, 배는 고프고, 딱히 정해놓은 음식점도 없고…. 스프카레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무슨 일본까지 와서 카레를 먹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배가 계속 꼬르륵거리자, 일단 이거라도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음식점을 들어갔다.

생각보다 긴 줄, 분주한 직원들, 손님으로 꽉 찬 식당이 나를 일단 놀라게 했다. 그리고 스프카레가 내 눈 앞에 등장했을 때, 나는 입 밖으로 탄성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커다랗고 둥근 그릇에 묽고 진한 육수가 담겨있고, 갓 볶아 올린 각종 야채들, 그리고 큼지막한 닭다리 하나…. 미친 듯한 배고픔에 나는 바로 육수를 후루룩 흡입했다.

어쩜 그렇게 호박이 바삭할까? 어떻게 가지에서 고소한 감자 맛이 나는 걸까? 당근이 어찌 이렇게 부드러울까? 감자가 어떻게 이리도 달달할 수 있을까? 닭다리가 어떻게 이렇게 오동통하니 쫄깃할까? 홋카이도 거주민들이 이 스프카레를 힐링푸드(healing food)라 일컫는다는 말이 생각났다. 아, 음식에게는 정말 사람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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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에서 그동안 먹었던 음식을 나열해보았다. 이렇게 차례로 나열해보니 음식이 우리에게 왜 중요한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내가 다녀온 배낭여행은 생각보다 로맨틱하지는 않았다. 갑작스레 쏟아지는 장대비에 머플러를 뒤집어쓰기도 하고, 덜덜 떨며 열차를 기다리기도 하고, 호텔 키를 방에 넣고 문을 잠그는 바람에 종업원에게 SOS를 치기도 하고….

하지만 그런 역경에서도 '음식'이 있었기에 나의 여행은 아름다웠다. 비를 맞고 왔던, 지각을 했던, 길을 잃었던 상관없었다. 잔뜩 짜증이 쌓인 상태에서도 갓 튀긴 돈카츠 하나면 모두 용서가 되었다. 음식이란 참 신기하다. 그 비슷한 냄새만 스쳐도 거짓말처럼 그 기억이 살아나고, 와삭 튀김을 씹는 소리가 들리고, 끝에는 마침내 그 맛이 혀에 맴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 맛은 영원하다.

여행과 음식은 떨어질 수가 없는 존재다. 사진은 추억을 눈으로 담지만, 음식은 오감으로 담는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오늘도 무엇을 먹을지 행복한 고민을 멈추지 않는다.

덧붙이는 글 | 위의 글은 제라블의 글로그(http://blog.naver.com/asp835)에 동시발행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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