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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만족하는가?"

대선이 끝나고 며칠 전 늦은 밤,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탄핵정국이 시작된 이후 시국이 하수상할 때면 항상 아들에게 전화하던 당신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허니문 기간 때문인지 보수 언론들도 그나마 잠잠한 이때에 무슨 일이지?

"어머니, 무슨 일이세요?"
"그래, 문재인이 대통령 되었으니 자네는 만족하는가?"
"예?"
"말 그대로 만족하는지 궁금해서."
"에이.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찌 알아요. 그래도 뭐, 지난 정권보다는 훨씬 낫잖아요. 4년 동안 못하던 일을 단 며칠만에 해치우고. 쓰레기 치우는데 오래 걸릴 거예요. 응원하면서 지켜봐야죠."
"그래, 신선하긴 하더라. 조국 교수 들어간 것도 그렇고."

다행이었다. 주위에 태극기 집회에 참여하시는 지인들이 많으신 어머니께서 이 정도로 말씀하시는 건 그 동네도 생각보다는 잠잠하다는 뜻이다. 그래, 며칠 전 보도를 보니 태극기 집회도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정신없던데 그 아수라장에서 자괴감을 느꼈을 테지.

그 당당함은 어디로 가고
▲ 태극기 집회의 위용 그 당당함은 어디로 가고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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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 분들은 뭐라고 하세요?"
"다들 난리지 뭐. 이제 큰일 났다고."
"뭐가 큰일 나요?"
"세월호 기간제 교사에게 왜 그렇게 많은 돈을 들이느냐, 아직도 5.18에다가 돈을 쏟아 붓는다, 비정규직 저렇게 전환하면 기업 망해서 대한민국이 망한다."
"여전들 하시네. 그래도 어머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지켜보세요. 설마 MB나 박근혜보다 못할까. 촛불의 힘을 보여줘야죠."
"그려. 부디. 우리야 이제 살 날이 많지 않으니까 네가 사는 세상은 너희들이 알아서 잘 만들어야지."

어머니와의 통화는 그렇게 끝났지만,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부모님 세대가 태극기 세력들의 자멸을 보며 느끼시는 게 있을 줄 알았더니 역시나 변하지 않은 듯했다. 하기야 나이 40이 된 나도 생각을 바꾸기 이리 어려운데 나보다 갑절을 더 살고, 훨씬 더 극적인 경험을 하신 분들이 어디 쉽게 생각을 바꿀 수 있겠는가.

문뜩 2012년 대선이 끝난 뒤 내 모습이 떠올랐다. 소위 '멘붕'이 와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그때. 지금 어른들이 딱 그 심정일까? 이후 어머니는 당신 세대들이 현 시국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들에게 전달되고 있는 카톡의 글들을 내게 보내주셨다.

아들아! 딸아! 젊은 세대들아!

아직도 저들은 색깔론의 안경을 쓰고 있다
▲ 홍준표 후보의 유세장 아직도 저들은 색깔론의 안경을 쓰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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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보내주신 카톡을 보고 있자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직도 가짜뉴스들이 판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은 없어진다> 일본의 분석입니다. 재팬 포리티컬 채널의 후지이가 한국의 문재인 신 대통령의 출현으로 북조선은 <대남 공작>을 완료하였다고 했습니다. 너무나 충격적입니다. 오늘 우리나라의 현실을 일본이 더 잘 알고 더 심각하게 보고 있어서 올려드립니다.

외교 안보는 하나로, 기타는 둘로 하는 고려 연방제로 되어, 외교 안보 쪽에서 '북한에는 외국 군대가 없는데 한국은 왜 제3자인 미군이 진주해 있는가.' 라고 민중 항쟁을 통해 한미 동맹을 파기하고, 미군 철수를 완료하여 북한이 흡수 통일을 완성한다는 논조로, 문재인의 대통령 당선으로 그 계획은 시작되었기에 한국은 없어지는 길로 들어섰고, 한국은 세계에서 버려진 자식이 될 것이라는 등의 내용입니다. 일본의 현실 분석이 놀랍습니다. 태극기 집회는 이제 특공대를 만들어 지리산으로 들어가야 할 날이 가까워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지긋지긋하지만 어르신들께는 여전히 위력적인 색깔론. 도대체 언제쯤 이 허무맹랑한 색안경이 사라질 수 있을까? 지금이야 선거에서 패배한 탓에 잠자코 있지만 내년 지방선거가 다가오고 보수 결집의 필요성이 있으면 야당은 또 저 색깔론을 다시금 들고 나올 것이다. 당장 임종석 비서실장이 내정되자 '주사파'를 거론하지 않았던가. 

또한 어머니의 카톡에는 문재인 후보에 대한 저주와 홍준표 후보에 대한 칭송이 대부분이었던 대선 전과 달리 절망적이고 자조 섞인 논조들이 섞여 있었다. 하나같이 자신들의 늙음을 강조하는 한편, 문재인 정부를 비아냥댔다.

"아들아! 딸아! 젊은 세대들아! 너희들이 그렇게 원하던 대로 된 것 같구나. 축하 못해 주는 늙은 세대를 비웃지 마라! 그렇게 촛불 들고 새 세상을 만들자던 너희들의 염원이 이루어진 듯하구나. 단두대를 세우고 희희낙락 하던 너희들. 대통령의 머리를 공으로 만들어 차던 어린이들. 그토록 바라던 세상이 됐으니 이젠 잘 살겠지.

파업을 외치고 혁명을 외치던 노조들과 북한을 따라가지 못해 안달하던 전교조와 정치꾼들. 이미 대한민국은 국운이 쇠하고 있다. 보수꼴통이라는 늙은 세대가 헐벗고 굶주려가며 너희들에게 가난만은 안 물려주겠다던 그 꿈만은 실현했으니 더 이상 할 일은 없는 것 같구나.

이젠 조용히 뒷전으로 물러나 너희들이 그토록 원 하던 잘 사는 나라, 나라 같은 나라가 되어 가는 세상을 보고 있으련다. 마치 그 옛날 중국의 오자서 같은 심정으로. 그렇다고 악담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려나. 부디 후회 없는 삶을 살기 바란다. 우리가 할 일은 다 했으니 조용히 여생을 편히 살고 싶구나."

어르신들이 본 19대 대선
 어르신들이 본 19대 대선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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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을 두 어깨에 걸머진 문재인이여! 그대의 공약대로 살기 좋은 노인 천국을 만들어주길 간절히 바란다... 건투를 빌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 촌놈의 변명 아닌 변명이다. 이 촌놈은 곧 죽을 것이다!

이 나라의 침묵하는 의인들이여! 진정 잘 보시고 이 나라의 미래를 지켜 주길 바란다. 태극기 물결 속에 흔들던 정의감도 분노감도 박근혜 대통령을 위해 피를 토한 함성도 이제 물 밑으로 잠기려 한다. 대통령 취임 전 우리의 박근혜 대통령을 풀어내 태극기를 든 꼰대들 한을 풀어주길 바라는 이 마음이 어찌 나만의 바램이겠는가?... 이 태극기 애국민들을 기억해 주길 바란다. 제발 이 나라를 잘 지켜주시길 바라면서 글을 줄이는 이 꼰대의 눈에선 눈물이 촉촉이 고인다."

씁쓸했다. 답답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광장에서 태극기를 맹목적으로 흔들고, 박근혜의 집 앞에서 오열하고,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빨갱이 세상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이들 모두 우리 부모님의 친구이며, 이웃 어르신이지 않은가. 그런데 왜 그들은 내가 아는 세상과 이리도 동떨어져 있는 것인가.

혹자들은 같은 맥락으로 2012년 대선 이후 밀양 주민들을, 이번 대선 이후에는 성주 주민들을 비난하곤 한다. 어찌 그리 당하고서도 2번을 찍을 수 있냐며 한심해하며 조롱한다. 대구를 '고담시티'라고까지 한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그들을 비난만 한다고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위로해야 하며, 누가 그들을 그렇게 부추기는지 끝까지 추적하여 발본색원해야 한다. 그리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것이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이다.

가장 아름다운 복수를 위해

어머니의 카톡 속에는 현재 어르신들에게 거짓뉴스들을 전하던 세력들이 현 상황을 얼마나 심각하게 보는지도 담겨있었다. 그들은 세상이 바뀌었음을 그들이 지금까지 세상을 인식했던 방법으로 깨닫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카톡이나 문자 모두 삭제해주시기 바랍니다. 정치적인 카톡 지워주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정부는 인터넷 글 함부로 못 지우게 대항권 행사한다고 합니다. 아시는 지인들께 이 내용을 알려 지금까지 인터넷과 기타 카톡 등 모든 상황을 이번 주 안에 점검해서 삭제 정리토록 독려해 주세요. 걸면 걸린답니다. 네이버는 정부가 간섭중이며 카톡도 곧 시행할 예정이라고 하니 빨리 정리하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중요한 내용은 텔레그램을 이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당장 정부가 나서서 민간기업을 털어 문재인 대통령에게 불리한 정보를 제공한 세력들을 단죄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 최근 이슈가 되었던, 극우 사이트 일베 게시판에 많은 이들이 자신의 글들을 지워달라고 요구했던 사건 역시 같은 맥락에서 벌어진 일이다. 민간인 사찰이나 댓글 공작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MB정부나 박근혜 정부를 지지했던 이들이니 당연한 사고의 귀결이기도 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7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5.18 당시 생후 3일 만에 아버지를 잃은 김소형씨를 위로하고 있다.
▲ 아름다운 복수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7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5.18 당시 생후 3일 만에 아버지를 잃은 김소형씨를 위로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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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들의 방식대로 세상을 변화시켜서는 안 된다. 아니, 그 방식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MB와 박근혜 정부의 몰락이 그것을 증명하지 않는가. 증오는 증오를 낳을 뿐이며, 공포 정치의 끝은 결국 파국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말했듯 가장 아름다운 복수는 우리가 그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부모님 세대들에게 말을 걸어야 한다. 비록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당신들을 안고 갈 것이며, 다른 방식으로 사회변화를 일으킬 것이라고 설득해야 한다.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법을 준수하며, 원칙대로 적폐를 청산하고, 사람이 먼저인 세상을 만들 것이라고 이야기해야 한다. 그것이 촛불이 만들어낸 시대정신을 이어가는 길이다.  


태그:#문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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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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