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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17일 새벽, 강남 한 상가 화장실에서 20대 여성이 30대 남성에게 살해당했습니다. "평소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 죽였다"는 게 살인의 이유였습니다. 강남역 10번 출구는 이 애석한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사람들로 가득 찼고, 추모의 글과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는 문구들이 적힌 포스트잇이 나붙었습니다. 그 후 1년, 2017년의 대한민국은 무엇이 바뀌었을까요?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 1주기를 맞아 이 사건의 의미를 다시 되새겨봅니다. [편집자말]
공용화장실은 여전히 공포의 대상이다.
 공용화장실은 여전히 공포의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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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 한 도시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친구의 이야기다. 이 가게는 영화관, 술집, 나이트 등이 밀집한 곳에 있다. 평소에도 유동인구가 많고, 주말 저녁이면 한잔 하러 나온 사람들로 넘쳐난다. 위치로 따지자면 그 도시의 강남역 10번 출구 쯤 되는 유흥가라 할 수 있겠다.

이 가게가 자리한 건물에도 화장실이 있다. 그 건물에 세든 밥집, 술집 손님들도 함께 쓰는 개방된 공용 화장실이다. 남녀 화장실은 분리되어 있으며, 그 길목에는 CCTV가 설치되어 있다. 한 가지 문제라면, 두 화장실 모두 문이 없다는 점이다. 얼마 전 취객이 난동을 부리다 하나씩 차례대로 문을 부숴버린 탓이다. 사건은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그날도 친구는 평소처럼 여자화장실의 첫 번째 칸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 칸을 사용할 수 없었다. 그곳에는 피처럼 보이는 빨간 액체가, 엉덩이를 대고 앉는 양변기 시트 부분에 흥건하게 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휴지도 없었다. 누군가 뒤처리를 잘못 했겠거니 싶었다. 그리고 두 번째 칸으로 향했다.(건물주에게 꼬박꼬박 비싼 관리비를 내고 있고, 자기 손님들은 거의 화장실을 이용하지 않으므로, 그녀가 굳이 변기를 청소할 이유는 없다.)

여기도 이상했다. 변기 커버가 산산조각나서 앉을 수조차 없었다. 세 번째 칸은 청소도구함이라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결국 두 번째 칸에서 제대로 앉지도 못한 채 엉덩이를 살짝 들고 볼일을 봤다. 왠지 기분이 찝찝했다.

다음날, 화장실에서 그녀는 어제와 같은 장면을 목격한다. 첫 번째 칸에는 화장지 없이 피가 묻어 있고, 두 번째 칸의 변기 커버는 부서진 채였다. 자세히 보니 두 번째 칸 위로 난 창문 아래 틈에 붙여둔 테이프도 떼어져 있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관리인한테 화장실 청소와 수리를 요구했다. 관리인은 알겠다고 했다. 그날 변기 커버를 갈아서 꼈다. 하지만 그 다음날이면 또 다시 변기 커버가 깨진 채로 발견됐다.

이주일 째 화장실의 미스터리가 반복되고 있다. 이상하지만 짐작 가는 바가 없다. 대안도 없다. 불안하지만 두 번째 칸에서 볼일을 보는 수밖에.

수수께끼는 토요일 아침에 풀렸다. 간밤에 경찰이 출동했다. 금요일 저녁 12시, 이 화장실을 이용하러 온 여성이 신고자였다. 그녀 역시 첫 번째 칸이 지저분해서 두 번째 칸으로 향했다. 그녀는 창문 쪽 테이프가 떼어진 것을 발견했다. 바로 주인한테 가서 이를 말해서 붙였는데, 나중에 다시 가서 보니 그 부분이 또 떼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틈에서 카메라를 발견했다.

사실 그 화장실 너머는 비공식적인 흡연구역이었다. 많은 사람이 오가지만 창문이 워낙 높은 곳에 조그맣게 나 있어, 누군가 들여다볼 거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흡연구역에서 빈 토마토주스 병이 발견됐다. 그렇다. 첫 번째 칸에 뿌려졌던 붉은 액체의 정체는 바로 토마토 주스였던 것이다.

범인은 철저하게 계획적이었다. 시나리오는 이랬다. 피와 비슷해 보이는 토마토주스를 사서 화장실의 첫 번째 칸에 뿌려서 두 번째 칸으로 유인한다. 그 칸의 변기 커버를 파손해서 엉거주춤 앉게끔 한다. 그래야 카메라에 엉덩이가 더 잘 잡히기 때문이다. 그 너머 흡연구역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사람이 들어오기를 기다리다가, 때가 맞으면 카메라를 들이민다. 다행히 CCTV에 여자화장실에 들락날락하는 모습이 찍혔다. 정확한 얼굴은 몰라도 인상착의는 알아볼 수 있는 정도였다.

신원을 확보할 결정적인 단서도 나왔다. 그 일대 편의점을 수사한 결과, 2주 동안 토마토주스를 사간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워낙 평상시에 손님들이 찾지 않는 품목이라 금세 꼬리가 밟힌 것이다. 대담하게도 그는 신용카드를 이용했다. 차림새는 CCTV에 찍힌 남자와 꼭 같았다. 경찰 쪽에서 개인정보 조회하고, 토마토주스나 화장실에 남았을 것으로 예상되는 지문과 대조해보면 범인을 잡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건물주는 이후에 화장실 문을 새로 달았다. 비용은 그 해당 층의 세입자들에게 나눠서 부과했다고 한다. 친구는 본인이 피해자인 동시에 비용 부담까지 떠안은 것이다. 억울하지만 내라면 내야지 어쩔 것인가. 가게 빼라고 하면 할 말 없는데…. 그럴 거면 차라리 일찍이나 하지, 그랬으면 이런 일을 예방이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강남역 10번 출구 사건 후 1년, 공중 화장실 무엇이 달라졌나

강남역여성살인사건이 발생한지 이틀이 지난 2016년 5월 19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에서 피해자를 추모하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강남역여성살인사건이 발생한지 이틀이 지난 2016년 5월 19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에서 피해자를 추모하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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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공중 화장실과 관련된 소름끼치는 이야기는 차고 넘친다. 가장 흔한 유형은 몰카에 관련된 것들이다. 신문 아래 넣어둔 몰래카메라는 양반이다. 아마존에서는 나사 모양으로 생긴 초소형 몰래카메라를 2만 원도 안 되는 가격에 판다고 하니, 육안으로는 화장실에 숨겨둔 몰카를 찾아내기가 불가능하다.

얼마 전 SNS에서는 남녀 공용 화장실에서 숨어 있는 남성이 찍힌 사진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만약 가게를 운영하는 친구가 썼다는 화장실에서도 범인이 숨어 있다가 흉기라도 휘둘렀으면 어쩔 뻔했나 싶다. 강남역 10번 출구 사건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공중 화장실에 대한 여성들의 공포는 날로 커져가고만 있다.

정책적인 차원의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해, 강남역 10번 출구 사건을 계기로 지자체에서는 공중 화장실에 대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대부분이 여자 화장실 안에 비상벨을 달거나, 공중 화장실 앞에 CCTV를 설치하는 식이다. 이는 지자체나 공공기관에서 운영하는 공중 화장실에만 적용된다. 경찰청 발표에 따르면 2014년 기준, 이러한 공중 화장실 5만여 개에서 발생한 범죄 건수만 1795건이다. 지자체의 규정은 이러한 사건들을 예방하는 데에 어느 정도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문제는 민간에서 운영하는 화장실이다. 강남역 10번 출구 사건은 인근의 한 노래방 건물에 있는 남녀 공용 화장실에서 일어났다. 범인은 한 시간이나 여성 혼자 화장실에 가는 순간을 기다렸다. 치밀하게 계산된 살인이었다. 지나가는 사람은 많았지만, 남녀 공용 화장실에 들어가는 그를 아무도 수상하게 여기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사건이 일어난 지 1년이 되는 지금도 이 환경은 그대로다. 민간에서 운영하는 남녀 공용 화장실에 대해 정부가 별다른 규제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공중 화장실 관련법에 따르면 상가 시설의 경우 2000㎡ 이상일 때 남녀 화장실을 분리 설치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2004년 이전에 지어진 건물들은 그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범죄자가 건물 연식을 따지며 출몰할 리도 없는데, 오래된 건물의 남녀 공용 화장실은 규제 대상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건물주가 자기 돈을 들여가며 화장실 공사를 감행하겠는가. 그렇다고 갑을 관계에 있는 세입자 처지에서 화장실 공사를 강하게 주장하기도 어렵다. 고객이 컴플레인을 제기하려고 해도 건물주가 누군지 알 길이 없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정부의 규제다. 정부 차원에서 나서서 민간 차원에서 운영하는 공중 화장실에 대해 실효성 있는, 강력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해야 한다. 그간 언론에서 전문가들이 언급한 해결책들에 주관적인 의견을 더해 봤다.

① 남녀 화장실 분리 의무화
건물 연식에 상관없이 남녀 화장실 분리를 의무화해야 한다. 규모가 작은 건물의 경우, 1층은 여자 화장실, 2층은 남자 화장실 하는 식으로 층별로 공간을 분리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여기에 들어가는 공사비는 건물주가 부담하는 게 옳다고 본다. 그간 허술한 화장실을 방치하면서도 임대 수익과 관리비로 이익을 실현했으니,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자기 돈으로 공사를 해야 대차대조표가 맞지 않나 싶다.     

② CCTV 설치 의무화
사생활 침해를 이유로 들기에는 여성들이 감당하고 있는 공중 화장실 공포가 너무 크다. 이미 지하철이며 버스, 골목길 등에 치안을 이유로 설치된 CCTV가 26만 대에 달한다. 여자 화장실이라고 그 예외가 될 이유가 없다. 화장실 내부는 볼 수 없지만 들고나는 사람은 확인할 수 있는 안전거리에 CCTV 설치를 의무화해야 한다.

③ 도어락 설치
요새 도어락 최저가로 사면 개당 4만 원밖에 안 한다. 설치비까지 다 줘도 5만 원이면 충분히 단다. 여자 화장실과 남자 화장실 비밀번호를 달리 하고, 관리자가 주기적으로 바꿔 가며 관리하면, 남자가 여자 화장실에 숨어서 기다리는 일은 상당 부분 차단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이유에서이긴 하지만, 상당수 점포에서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아마도 비용 대비 가장 효과가 좋은 방법이 아닐까 싶다. 

④ 몰래카메라 탐지 서비스 
이제는 몰래카메라 탐지를 생활화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몰카 범죄는 2009년에 800여 건에 불과하던 것이 2013년도에는 4800건으로, 4년 만에 약 5배나 증가했다고 한다. 위치도 목욕탕, 헬스장과 수영장 탈의실 등 업종을 가리지 않는다. 이 정도면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다.

한 일간지에서는 어떤 여성들은 공중 화장실에 갈 때마다 아예 마스크나 스카프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여성들의 사연을 다뤘다. 엉덩이는 어쩔 수 없으니, 얼굴이라도 가려서 자기 신원을 보호하겠다는 것이다.(<머니투데이> 4월 19일자, "내 엉덩이가 공공재인가요." 몰카 공포에 '히잡' 쓰는 여성들) 실제로 효과가 있는 몰카 탐지기는 가격이 상당하고 매일 사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니, 직접 구입하기에는 부담이 클 것이다. 지자체에서 탐지기를 사서 주기적으로 체크해주는 서비스를 저렴한 가격에 운영하면 어떨까?

여성 혐오 사건에 대한 인식이 선행되어야

강남역여성살인사건이 발생한지 이틀이 지난 2016년 5월 19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에서 피해자를 추모하는 시민들이 손피켓과 촛불을 들고 있다.
▲ "저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강남역여성살인사건이 발생한지 이틀이 지난 2016년 5월 19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에서 피해자를 추모하는 시민들이 손피켓과 촛불을 들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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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는 별도로 사법부 차원에서도 여성혐오 사건에 대한 인식을 달리 했으면 좋겠다. 술에 취해서, 정신질환이 있어서, 분노를 참지 못해서 여성을 상대로 범죄를 저질렀다는 남성들이 왕왕 있다. 그런 사람들 붙잡아다 마동석 같은 남자 앞에 데려다놔 봐라. 가출했다던 제정신이 바로 돌아온다.

강남역 10번 출구를 비롯한 불특정 여성을 타깃으로 한 범죄들은, 결코 저항할 수 없는 순간을 노려 계산된 범죄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나는 이러한 사건들의 경우, 알코올이나 조현병, 분노조절 장애 등을 이유로 재판에서 피고인의 죄를 감형해 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육체적·사회적 체급을 고려해 자기보다 약자인 여성을 골라서, 밑바탕에 깔린 혐오를 토대로 저지른 이런 범죄들은 죄질이 더 나쁘다. 그러니 형을 강하게 때려야 하는 게 아닐까.

이런 점에서 강남역 10번 출구 사건의 판결은 유감스럽다. 1, 2심에서 모두 징역 30년 형을 언도했지만, 정신상태 등을 고려해 여성혐오 범죄로 보긴 어렵다고 판결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에 대해 여성들이 왜 그렇게 공분하는지 그 맥락을 읽어주지 않은 것이 못내 씁쓸하다.

<그것이 알고 싶다>보다 더 두려운 현실을 보라 

나는 토요일마다 <그것이 알고 싶다>를 즐겨보는 애청자다. 권력형 비리를 파헤치는 것도 시원하지만, '그알싶'의 백미는 역시 미제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장면이다. 헌데 그 많은 살인사건의 피해자는 대체로 여성이다.

면식범이든 아니든 간에 많은 여성들이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갔다. 그리고 강남역 10번 출구 사건이 일어났다. 후배, 친구, 동료, 여성들이 입을 열어 자신들의 경험을 말하기 시작했다. 모두들 한낮에도 시선을 의심하고, 오밤중에는 종종 걸음으로 뛰어가며 강간과 죽음을 두려워하며 살고 있었다. 이유는 단지 우리가 여자라는 것, 그뿐이다. 그리고 깨달았다. 한국에서 2017년을 사는 오늘날의 여성들은 다큐멘터리보다 더 지독한 현실을 살고 있다는 것을.

여성들이 내는 절박한 목소리를 이해한다면, 지금이라도 정부 차원에서 실질적인 변화를 위해 나서주었으면 한다. 민간 건물에 있는 여성 화장실과 관련한 규정을 마련하는 것은 그 첫걸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안전한 공간에서 마음 놓고 용변을 볼 수 있는 것, 그것은 문명화된 국가에 사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보편적으로 누려야 할 가장 기초적인 권리이다.


태그:#강남역 10번 출구, #여성혐오, #공중화장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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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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