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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언니의 목소리'가 책으로 출간됐다. 언니 홍승은의 책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다. 보기만 해도 불편해 보이는 제목이다. 하지만 책을 펼쳐 활자를 읽다보면 자유롭고 편안해진다.

책에는 언니가 살아오면서 겪은 불편함과 지키고 싶었던 작고 소소한 일상이 담겨있다. 작은 것을 지키기 위해 얽히고 설킨 갈등을 끈질기게 풀어내고 청산하고, 다시 질문을 던지는 삶의 장면이.

비참함과 수치심을 말하기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 홍승은 페미니즘 에세이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 홍승은 페미니즘 에세이
ⓒ 동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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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에 다닐 때 언니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가방을 내려놓고 엄마와 식탁에 앉아 오늘 있었던 일들을 말했다.

학교에서 어떤 상을 받게된 것, 선생님이 어떤 칭찬을 했는지. 그리고 친구들과 오늘 이런 것 때문에 싸워서 기분이 상했고, 어떤 말을 들으면서 상처를 받았는지도 이야기했다.

어떤 날은 이야기를 하면서 엄마 앞에서 펑펑 울기도 하고, 함께 분노하며 욕하기도 했다. 언니가 그런 이야기를 하면 엄마도 고민을 털어놓았다.

어제 있었던 슬픈 일,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 어디가 아픈지 등등. 그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다시 기분이 좋아져서 식탁에 촛불을 켜놓고 맛있는 음식을 해먹곤 했다.

나도 엄마와 언니가 앉은 식탁에 앉아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언니와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신나게 맞장구를 치고, 함께 슬퍼하고 분노하기도 했다. 어떤 때는 내가 선생님이라도 된 마냥 조언을 하기도 했다. 조언을 하는 동안 나는 우쭐해지면서 기분이 좋았던 것 같다. 내가 털어놓는 이야기는 선생님에게 칭찬받은 일, 누가 나를 좋아한다고 고백한 일 같은 것 뿐이었다.

학교에서 성적이 낮은 나의 시험지를 바닥에 던졌던 선생님에게 받은 모욕감, 옆자리의 짝꿍이 나의 지우개를 칼로 쪼갰을 때 느낀 모욕감과 무기력함을 털어놓진 못했다. 그런 나와 다르게 상처받은 일을 쉽게 털어놓는 언니가 신기했다. 나는 그런 슬픈 일들을 말하면 내가 정말 비참해질 것만 같아서 두려웠다. 상처를 애써 모른 척 하고, 숨기고 괜찮은 척 하는 게 나의 자존심을 지키는 방법이었으니까.

언니와 다르게 나는 나의 비참함, 수치심, 연약함을 일기장 속에만 빼곡히 적혔다. 15살 이 되어 남자친구와 갑작스러운 첫경험을 한 후, 나는 나의 이야기를 더욱 꽁꽁 감췄다. 열여섯 살이던 어느날이었다. 언니가 이불 속에서 눈물이 그렁 그렁 맺힌 눈으로 나에게 말했다. 

"승희야, 나 비밀이 있어. 사실은..."

언니는 남자친구와의 관계에서 겪은 수치스러운 경험들을 내게 처음으로 털어놓았다. 언니의 눈물을 보면서 나도 눌러놓았던 눈물이 올라왔다. 나도 언니에게 수치스러웠던 첫경험, 그 이후의 두려움을 털어놓았다.

그날 밤 나는 언니와 뜨거운 연대의식과 유대감을 느꼈다. 이후 나는 언니에게 나의 경험을 가감없이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불편하고 쓰라린 경험을 나누면서 우리는 아팠지만, 그만큼 상처에서 자유로워졌다. 아픔과 슬픔이 연결될수록 강해진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언니가 먼저 용기있게 입을 열어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연약함을 말할 수 있는 힘

언니는 어제 있었던 아픔을 오늘 털어놓고, 구체적인 갈등을 풀어내려고 친구들과 열렬히 싸우고 화해하고 또 싸웠다. 갈등이 싫어서 덮어두고 대충 회피하고 비참해질까 봐 괜찮은 척 하는 나와 달랐다.

"강한 사람은 작고 구체적인 것들과 싸운다"는 페미니스트 린다 웨스트의 말처럼, 언니는 작고 구체적인 불편함을 말하고 배려하고 싸웠다. "내 경험을 말했을 뿐인데, 세상이 딸꾹질했다. 어느새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었다"는 언니의 말처럼, 어느새 언니는 페미니스트라고 불리고 있다. 늘 그랬듯이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썼을 뿐인데.

생각해보면 나의 가해 사실을 말하는 것은 오히려 쉽다. 정말 어려운 것은 나의 연약함, 비참함, 수치심을 말하는 일이다. 나의 가해자성을 이야기하고 반성하는 것보다 어려운 건 나의 연약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약자를 혐오하는 이유는 내 안의 수치심을 그들에게 투영해서다. 내 안의 약자를 혐오하는 사람이 약자를 혐오한다. '계집애처럼' 약해빠진 자신의 모습을 혐오하는 남성들이 약해빠진 '계집애'들을 혐오하게 되는 것처럼. 그래서 페미니즘은 여자도 남자처럼 '강해지자'는게 아니다.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피해 경험을 증언할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낼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연약함을 말할 수 있는 힘이 세상을 바꿀 거라 믿는다. 그래서 지금 시기, 이 사회에 언니의 목소리가 책으로 출간된 것이 무척 반갑고, 다행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상상력과 용기를 나눴으면 좋겠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언니의 목소리가 책으로 나왔다.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다, 그래서 함께 자유로우면 좋겠다."
▲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 홍승은, 동녘 언니의 목소리가 책으로 나왔다.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다, 그래서 함께 자유로우면 좋겠다."
ⓒ 홍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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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작업을 해야할지 고민하는 나에게 언니는 늘 말했다.

"승희야, 너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써줘. 너만이 그릴 수 있는 그림을 그려줘. 너의 삐뚤빼뚤한 그림의 선들이 나는 너무 좋아."

언니의 목소리가 책에도 그대로 담겨있다.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 그릇을 한 곳에 정리하고, 눈을 마주치며 점원들에게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빼먹지 않고, 길에서 전단지를 돌리는 사람의 손에서 꼬박 전단지를 받는 언니가 '프로불편러'가 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작고 사소한 일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작고 구체적인 것들이 불편해서 싸우는 게 아닐까.

거대담론과 추상적인 언어, 대의의 당위에 숨지 않고, 덤덤하게 나의 감각과 감정을 말하기. 그래서 함께 울고, 분노하다가 식탁에 앉아 맛있는 음식을 해먹기. 다감하고 역동적인 오늘을 언니의 책을 읽으며 다시 배우고 있다.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

홍승은 지음, 동녘(2017)


태그:#홍승은, #페미니즘, #당신이계속불편하면좋겠습니다, #서평, #페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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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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