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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정 정의당 후보와 남편 이승배씨가 9일 오전 경기도 고양시 신원초등학교에서 투표하고 있다.
▲ 투표하는 심상정 후보 부부 심상정 정의당 후보와 남편 이승배씨가 9일 오전 경기도 고양시 신원초등학교에서 투표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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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 전날, 두 시간밖에 못 잤다. 커피를 많이 마신 탓인지, 투표 후보를 정하지 못한 탓인지 심장이 두근거려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침 11시, 일찌감치 마음을 정한 남편과 함께 투표소로 향했다. 일부러 그의 손을 떨치고 걸었다. 문재인 후보를 찍겠다는 마음과 거리를 두고 싶었다.

머릿속은 계산으로 분주했다.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문 후보의 지지율은 약 40%, 더 오르지도 않고 내려가지도 않는 상태였다. 반면 홍준표 후보를 지지하는 표는 매섭게 결집하고 있었다.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던 이들이 막판에 심상정 후보로 왕창 갈아타서, 만에 하나 홍준표 후보가 당선된다면? 상상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시나리오다. 투표소에 다다랐을 무렵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1번을 찍었단다. 몇 달 동안 설득하고 전날 어버이날이라고 간지러운 소리 보태가며 영업한 결과였다. '문재인 빨갱이' 설에 동조하던 모친을 이렇게까지 돌려놨으면, 난 이제 심상정 후보를 찍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동사무소에 도착했다. 나는 투표소가 마련된 2층으로 선뜻 올라가지 못하고 투표율을 검색했다. 지난번 총선에 비해 오전 시간 투표율이 낮단다. 눈뜨자마자 투표소로 향하는 어르신들의 동선을 생각해볼 때, 보수 표를 쓸어가는 홍 후보에게 불리한 징조였다. 대신 상대적으로 젊은 층이 많이 참여하는 사전투표율도 높은 것은 그 외 모든 후보에게 좋은 징조였다. 그래, 이 정도면 충분하다. 기표소에 가서 두 눈 질끈 감고 기호 5번 심상정 후보를 찍었다.

막상 기표함에 표를 넣고 오는데 이게 잘하는 짓인가 싶었다. 이러다 정말 만에 하나 홍 후보가 되면 남편을 비롯한 주변의 문재인 지지자들한테 얼마나 욕을 먹겠는가! 다시 뒤돌아서 내 투표용지 꺼내달라고 말하고픈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그저 나와 같은 선택을 한 지지자가 많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심상정을 지지하면서도 양가 부모님한테는 1번을 권하고, 5번의 지지율이 높지 않기를 바라는 지독한 아이러니.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의 심정이 이랬을까 싶다.

6퍼센트, 그냥 6퍼센트가 아니다

심상정 정의당 후보가 8일 오후 서울 신촌에서 ‘심상정X촛불시민과 함께 하는 12시간 필리버스킹’ 유세를 하며 시민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심상정 후보, 12시간 필리버스킹 유세 심상정 정의당 후보가 8일 오후 서울 신촌에서 ‘심상정X촛불시민과 함께 하는 12시간 필리버스킹’ 유세를 하며 시민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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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득표율 6.2퍼센트. 막판 여론조사에서 심상정 후보의 지지율이 최대 11.4퍼센트까지 나왔던 것을 고려하면 반토막이다. 득표율과 지지율 사이의 이 간극은 나 같은 고민을 하던 이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거칠게 산술적으로 따지자면, 심상정 후보를 지지하지만 정권교체를 위해 문재인 후보를 찍어준 이들이 5퍼센트 포인트는 된다는 이야기다.

아마도 이들이 출구조사 발표 후 1억 5천만 원이나 정의당에 들어왔다는 '지못미' 후원금을 낸 모양이다. 이를 증명하듯 심상정 후보의 페이스북에는 5번을 찍지 못해 미안하다는 댓글들이 달렸다. 예상보다 낮은 득표율에 심상정 후보의 얼굴이 굳은 것을 보며 나 또한 미안했다. 다음날 심상정 후보가 대선 캠프 해단식에서 눈물을 보인 영상을 찾아보며 집에서 나 혼자 글썽였다.

19대 대통령으로 문재인 후보가 당선되어 기쁘지만, 한편으로는 심상정 후보의 득표율이 낮아서 슬프기도 하다. 모두가 축제 분위기인데 나만 온전히 웃지 못해서, 심 후보가 나온 영상을 뒤져서 보고 또 보고, 몇 개 나와 있지도 않은 인터뷰 기사를 찾아 읽고, 댓글들을 스크린하며 어딘가에 있을 나 같은 심상정 후보 지지자들과 마음을 나누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억울하기도 했다. 우리는 왜 마음가는 대로 투표를 할 수 없을까. 프랑스에서는 의석 수 하나 없는 신생 정당의 마크롱 후보가 당선됐다는데, 왜 우리는 정치 경력 10년에 국회에 6개나 의석을 갖고 있는 정당의 후보를 찍을 수 없는지 자괴감이 들었다. 한국에도 결선 투표제가 있었더라면 적어도 유권자 스스로 전략적 투표를 고민해야 하는 상황은 없었을 것이다.

혹자는 말한다. 진보정당에서 낸 대선후보 가운데 3퍼센트 이상을 가져간 사람이 없었으니 이번 더블 스코어에 가까운 6퍼센트 지지율만 해도 대단한 성과라고 말이다. 아니, 틀렸다. 6퍼센트 지지율은 더블 스코어가 아니라,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정권교체 요구가 거셌던 18대 대선에서는 단일화를 위해 사퇴했으니 지지율은 측정조차 할 수 없었다. 0에서 시작해 6이 되었으니 곱셈으로는 다가갈 수 없는 수치다.

물론 보수 정당이 분열했고, 다당제 하에서 치러졌으니 이전 대선과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정권교체를 위한 단일화, 사표론 이야기는 이번에도 심심치 않게 흘러나왔다. 오죽하면 심 후보가 JTBC와의 첫 인터뷰에서 완주할 거냐는 질문을 받았겠는가. 이런 불리한 지형을 딛고서 토론회를 발판 삼아 씩씩하게 지지율을 견인해간 심상정 후보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정의당과 심상정은 최선을 다해 싸워주었다. 그리고 이를 알아본 국민들이 있다. 그러니 심상정 후보도, 지지자도 이제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 0에서 6, 이 차이가 작아보일지 몰라도 실은 무에서 유를 창조해낸 것이므로. 

'을'들의 이야기 말해준 심크러시, 고마웠어요

심상정 정의당 대선후보가 10일 오전 서울 여의도 제2당사에서 열린 선대위 해단식에 참석해 제19대 대통령선거 기간 동안 고생한 당직자들을 일일이 안아주고 있다.
▲ 고생한 당직자 안아주는 심상정 심상정 정의당 대선후보가 10일 오전 서울 여의도 제2당사에서 열린 선대위 해단식에 참석해 제19대 대통령선거 기간 동안 고생한 당직자들을 일일이 안아주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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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정은 사회적 '을'의 고통을 당사자의 언어로 대변한 유일한 후보였다. 성소수자, 여성,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 노조... 이들은 원래 신문의 사회면에나 단골로 등장하는 손님들이다. 그 앞의 정치면에서 다뤄지려면 최소한 누군가가 죽거나 혹은 죽을 만큼 힘들다는 것이 통계 수치로 확인될 때 뿐이다. 이는 토론회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다른 후보들도 자신이 박근혜 정부의 이후를 책임질 기수로서 개혁의 적임자임을 주장했지만(홍준표 후보는 예외), 일반 국민의 삶의 결을 구체적인 근거로 제시하지 못했다.

그 틈을 심 후보는 파고들었다. 그에게는 확실한 강점이 있다. 일반 대중의 정서를 알고, 언어를 구사한다는 점이다. 삶이 전쟁터가 된 현장들을 묵직하게 누비며 을들의 이야기를 들어온 경험을 토대로, 그들의 편에서 서서, 쉬운 말로 말해주었다. 설령 그것이 동성애처럼 기독교계 다수 유권자의 반발을 불러올 만한 이슈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래도 누군가는 꼭 해야 할 말이었다. 심 후보가 3차 토론회에서 1분 찬스를 이용해 단호하게 발언한 것은, 그래서 참 고마웠다.

"저는 동성애는 찬성이나 반대를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봅니다. 성 정체성은 말 그대로 정체성입니다. 저는 이성애자이지만 성소수자들의 인권과 자유가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사자후를 토하는 심상정 후보와는 달리, 일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목소리를 죽이고 살아간다. 우리는 적당히 순응하고 침묵해야 생존에 유리하다는 걸 알고 있다. 상사한테, 회사에, 대기업에 항의해봤자 을의 위치에 있는 사람만 손해 본다. 법을 찾아봐도 있는 사람들한테 유리할 뿐이고, 시간도, 돈도, 조직력도 부족하다.

그래도 직접 나서서 싸우는 '송곳' 같은 사람들이 있다. 노조를 만들어 회사와 한판 붙기도 하고, 국가의 결정을 따르지 못하겠다며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는 이들이 있다. 그러면 이길 수 있을까? 많은 싸움들이 패배한다. 생업은 고사하고 손해배상 소송에 알량한 재산마저 지키기 어렵다. 때로는 대중의 조롱과 혐오도 감수해야 한다. 이러한 뉴스가, 일상이 주는 교훈은 명백하다. 소리내지 말 것, 남 탓할 시간에 자기 실력이나 키울 것, 타인을 위해 나서지 말 것, 그러려거든 자기 인생을 통째로 걸고 시작할 것.

사람들은 그렇게 목소리를 잃어간다. 온라인에 넘쳐나는 과격한 발언들은 우리가 일상에서 그것들을 차마 말할 수 없기 때문은 아닐까. 그 삼킨 목소리들을 심상정 후보가 공론장에서 말해주었다. 유세현장에서 많은 이들이 심상정 후보를 붙잡고 운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나는 이번 선거에서 내 삶이 정치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다. 국익을 위해 참아야 하는 사람은 늘 권력 없는 사람들이었다. 국가의 발전이나 안보라는 거창한 명분에 밀려 일상의 고통을 감내하기를 요구받았다. 그런데 심상정 후보는 이 대의에 의문을 제기한다. 대통령도 없는 시기에 기습적으로 사드를 들여온 미국 정부는 한국 정부를 과연 존중하고 있는가? 사드 배치로 인해 피해를 보는 것은 누구인가? 당신들이 말하는 국익이라는 것은 결국 기득권의 이익을 포장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그리고 주장의 근거로 고통받는 국민이 있음을 드러낸다. 나는 성주 출신이 아니다. 그리고 성소수자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여자이고, 비정규직도 못되는 프리랜서 노동자이며, 내 주변 모든 이가 노동자이며 소상공인이다. 우리가 그 언젠가처럼 대의를 위해 불이익을 감수하라는 요구를 받을 때, 정의당의 심상정이 더 낮은 자의 고통을 이유로 들어 싸워줄 거라 기대해 본다.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

  제19대 대통령 선거날인 9일 오후 서울 여의도 정의당 상황실에서 심상정 대통령후보가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 감사인사하는 심상정 정의당 대통령후보 제19대 대통령 선거날인 9일 오후 서울 여의도 정의당 상황실에서 심상정 대통령후보가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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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심상정 후보가 완벽하다는 뜻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일부 정책들은 마음에 들지 않았고, 토론회에서 한 모든 발언이 옳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또한 심상정과는 별개로 정의당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심상정을 뽑은 이로부터 세월호나 성주 같은 현장에서의 존재감이 희미하다고 성토하는 목소리를 듣기도 했다. 작년에는 '메갈리아' 관련한 논쟁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당 차원에서 내상을 입었다. 이 때문에 남녀 불문, 정의당 이야기만 나와도 싫어하는 이들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제 정의당에 입당 신청서를 냈다. 심상정 후보가 내 목소리를 대변해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나, 나는 이제 그 고마움에 울고 싶지 않다. 여성으로서 노동자로서 실질적인 목소리를 가진 정치적 주체가 되고 싶다. 한 주간지에서 진보정당사는 활동가들을 갈아 넣은 운동사라는 글을 읽었다. 워낙 사람이 없어 일이 몰리다 보니 과로하다 죽은 활동가들의 이야기였다. 밖에서 비판만 하기보다는 안에서 같이 힘을 보태주면, 시간이 없으면 돈이라도 보태주면,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다.

심상정 후보에 대한 지지가 정의당을 키워주는 자양분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19대 문재인 정부에서 개혁을 꿋꿋하게 완수해나갈 수 있도록 왼쪽에서 역할을 잘 해주었으면 좋겠다. 그 안에는 반드시 결선 투표제 도입도 포함되기를.(그렇게 되면 주변에 더욱 적극적으로 영업하겠다!)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 축을 옮기기 위해 열심히 일해 달라.
20대 대선을 향한 심상정의 여정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태그:#심상정, #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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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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