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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선거 투표율이 사상최고를 기록했습니다. 천만 명이 훨씬 넘는 사전선거 열기 속에서 다양한 이야기거리도 있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뜨거웠던 화제가 아마도 투표용지의 여백 문제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급기야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후보자 간 여백 없는 선거용지가 발급됐다'는 허위 사실을 유포한 혐의로 11명을 고발 조치했다는 기사까지 나왔습니다. 그런데 시각장애인들은 투표용지 말고 투표보조용구(아래부터 '보조용구')로 시끄러웠습니다.

투표보조용구는 시각장애인의 투표를 위해 제작된 보조용구입니다. 봉투처럼 생긴 보조용구 안에 투표용지를 넣으면 겉면에 점자로 기호와 후보자 이름, 정당명이 점자로 씌여 있고 그 옆에 구멍이 뚫려있는 형태입니다. 시각장애인은 그 구멍을 손으로 찾아 기표를 하면 되는 것이죠. (관련기사: 시각장애인 재외투표. 이것 없어서 대신 찍을 사람 데려오라니)

지난 18대 총선에서 한 사회복지사가 시각장애인에게 투표보조용구를 이용해 기표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자료사진)
 지난 18대 총선에서 한 사회복지사가 시각장애인에게 투표보조용구를 이용해 기표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자료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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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시각장애인을 위한 보조용구가 잘못 제작되어 오히려 투표하기 불편했다고 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실제로 서울에 거주하는 1급 시각장애인 김준범(32)씨는 보조용구 때문에 제대로 기표하지 못했다며 항의했다고 합니다.

"지난번 투표에서는 투표용지와 투표보조용구 크기가 같았거든요. 그런데 이번 선거에서는 투표용지보다 투표보조용구가 조금 더 크더라고요. 그래서 투표보조용구안에 있어야 할 용지가 흔들려 원하는 후보에게 정확히 투표하지 못했습니다."

김씨는 1급 시각장애인이지만 약간의 시력은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투표를 할 때는 보조용구를 사용해야 하지만 자신이 기표한 내용은 확인이 가능합니다. 투표 후 올바르게 기표했나를 확인한 결과 투표용지와 보조용구가 살짝 어긋나 있어 원하는 칸에 기표되지 않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선관위 관계자에게 투표용지와 보조용구를 잘못 끼워준 것이 원인이므로 재투표를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김씨는 자신의 표가 아마도 무효표가 될 것이라고 토로했습니다.

"시각장애인도 대한민국의 국민이고 헌법이 보장한 참정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보조용구는 너무 불편했습니다. 시각장애인도 편하게 투표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기표란 너무 작고 확인할 방법도 없어

투표용지와 보조용구의 크기가 다른 것만이 아닙니다. 다른 시각장애인들은 이번 투표란 크기가 너무 작다며 불편을 호소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자신이 제대로 기표를 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는 것도 문제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역시 1급 시각장애인이면서 팟캐스트 진행자인 권순철씨도 사전선거를 했습니다.

"투표용지와 보조용구가 크기가 다르다는 말을 듣고 무척 신경을 쓰며 투표했습니다. 그런데 기표할 란이 너무 작아 매우 신경이 쓰이더군요. 아무래도 0.5cm은 작은 것 같습니다. 시각장애인 뿐만 아니라 어르신이나 손떨림이 있는 장애인들은 기표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제가 제대로 투표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어 걱정됩니다."

시각장애인들이 편하게 투표할 방법은 없을까요? 이번 사전선거를 위해 몇몇 시각장애인을 취재하면서 여러가지 아이디어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장 선거 등 시각장애인계의 내부 선거를 할 때는 기표란이 점선으로 표기가 되어 있고 그 안에 스티커를 붙이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런 방법이라면 시각장애인도 혼자서 투표할 수 있다며 시각장애인용 투표용지를 별도로 만들면 좋겠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또 일본과 같이 점자로 투표할 수 있는 방법도 도입하자고 주장하는 시각장애인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일본은 후보자의 이름을 한자나 일본 가나로 기입하는 방법으로 투표를 합니다. 시각장애인을 위해서는 일반 종이보다 조금 더 두꺼운 점자용 투표용지를 사용하며 점자로 이름을 기입할 수 있도록 점자필기도구도 투표소에 비치합니다.

이렇게 되면 개표시에도 점자를 읽을 수 있는 점역교정사가 개표 현장에 있어야 합니다. 매우 번거로운 과정인듯 하지만 한 사람의 참정권을 보장 위해서는 이런 번거로움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최영호씨의 이야기를 들으며 좋은 대안이 떠올랐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다양한 방법을 통해 투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최영호씨는 현재 워싱턴주 시애틀시에 살고 있는 1급 시각장애인입니다.

"시애틀은 원칙적으로 투표소가 없고 우편으로 투표를 합니다. 우리나라 거소 투표와 같이 선관위에서 투표용지를 집으로 보내면 기표하여 우편으로 보내는 방법을 사용하죠. 시각장애인은 인터넷으로 접속해 컴퓨터로 투표를 하고 이를 프린트하여 우편으로 보내는 방법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또 투표소가 없는 것이 원칙이나 시각장애인 등 특별한 사정이 있는 사람이 희망할 경우 따로 투표소를 일정기간 설치하기도 합니다. 투표소에 가서 이어폰이 연결된 기계에서 음성 안내를 따라 화살표를 움직여 원하는 후보에게 기표한 후 출력된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을 수도 있지요."

이런 방법은 어떨까요? 후보자의 이름이 인쇄된 일반 투표용지 외에 특별히 지원이 필요한 사람을 위한 별도의 투표용지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일반 투표용지처럼 선관위원장과 선거관리인의 직인이 인쇄된 백지 투표용지를 준비하여 점자로 쓰거나 숫자를 직접 기입하는 방법을 사용한다면 특별한 예산과 절차를 만들지 않아도 누구나 다양하게 투표할 수 있지 않을까요?

중요한 것은 누구나 어떤 방법으로든 투표권을 행사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태그:#재외선거, #대선, #시각장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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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1급 시각장애인으로 이 땅에서 소외된 삶을 살아가는 장애인의 삶과 그 삶에 맞서 분투하는 장애인, 그리고 장애인을 둘러싼 환경을 기사화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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