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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고공단식 농성자들은 공복은 물론 추위와도 싸우고 있다. 이인근 금속노조 콜텍지회장의 모습
 광화문 고공단식 농성자들은 공복은 물론 추위와도 싸우고 있다. 이인근 금속노조 콜텍지회장의 모습
ⓒ 투쟁사업장공동투쟁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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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고공농성장 아래에서 바보처럼 눈물 흘리고 싶지 않았다. 다시는 단식을 하다 병원으로 실려 가는 이를 보며 분노하고 싶지 않았다. 다시는 부당하게 경찰에 끌려가는 사람들을 보며 발 동동거리고 싶지 않았다. 다시는 며칠씩 장례식장을 지키며 밤을 새우고 싶지 않았으며, 다시는 물대포에 의해 쓰러진 이를 위한, 스스로 자신의 몸에 불을 놓은 이를 위한, 스스로 번개탄을 피우고, 스스로 목을 걸며 부당한 세상에 대해 항거하며 돌아가신 분들을 위한 추모시를 쓰고 싶지 않았다.

채 먹지 못한 컵라면을 남기고 구의역 9-1 스크린도어에 끼어 죽는 20살 청년 비정규직이 없는 세상이기를 바랐고, 강남역 10번 출구 화장실에서 까닭 없이 죽어 가야 하는 여성이 없는 세상이기를 바랐다. 어떠한 안전판도 출구도 없는 삶에 비관한 수많은 서민이 자식을 껴안고 스스로 생을 마감해야 하는 헬조선, 자살공화국의 시대가 이제 그만 멈추기를 바랐다. 다시는 먼 제주도 강정까지 평화대행진에 나서야 하는 일이, 먼 성주까지 '사드 가고 평화 오라' 버스를 타야 하는 일이, 그 너머 밀양까지 탈핵버스를 타야 하는 일이, 그, 그 너머 비정규직 우선 대량해고에 반대해 거제까지 가야하는 일이 없어지기를 바랐다.

국정교과서 농단에 반대해 청계광장에 다시 서야 하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수사권 기소권 있는 세월호 특별법 재개정으로 광화문 세월호 분향소의 유가족 분들이 이제 그만 아픔을 조금은 삭이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세상을, 부당한 위안부 합의에 항의해 일본대사관 앞에서 해를 넘겨 노숙하는 청년학생들이 이제 그만 집과 학교로 돌아갈 수 있는 세상을, 부양의무제 장애등급제 폐지를 힘들게 웅얼거리며 광화문 9번 출구 아래에서 4년여째 농성 중인 장애인 분들이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랐다.

작년 11월 4일부터 올해 3월 25일까지 근 다섯 달 동안 광화문 광장에 '박근혜 퇴진 캠핑촌'을 꾸리고 노숙농성을 했던 까닭이다. 혹여라도 퇴진운동이 실패로 돌아가 박근혜 정권이 계엄, 공안탄압, 또는 백색맞불집회를 통한 충돌 조장 등 대대적인 반격과 역공으로 나선다면 이 길이 생의 마지막 길이 될 수도 있다는 질문, 이번에 끌려가면 외상값까지 더해 한참을 빵에서 보내야 할 거라는 각오를 하고 배낭을 꾸려 나선 길이었다. 배터리가 다 된 건전지처럼 가지고 있는 모든 힘과 마음을 소진시켜야 했던 시간이었지만 다시는 폭력과 불의가 넘치는 거리에서 바보처럼 눈물 흘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나는 다시 울었다

5일 오전 22일간 서울 광화문 광고탑에서 정리해고 반대 등을 요구하며 고공 단식농성을 한 이인근 지회장이 119차에 실려 병원으로 호송되고 있다.
▲ 병원 호송 5일 오전 22일간 서울 광화문 광고탑에서 정리해고 반대 등을 요구하며 고공 단식농성을 한 이인근 지회장이 119차에 실려 병원으로 호송되고 있다.
ⓒ 공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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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5일 다시 또 그 거리에서 바보처럼 울어야 했다. 광화문 세월호 분향소 길 건너편 빌딩 옥상 광고탑 고공농성장이었다. 얼마 전까지 내가 노숙농성을 하던 캠핑촌 바로 길 건너였다. 한때 200만 명의 촛불이 켜지던 그 광화문 광장 한복판이었다. 전날 저녁부터 콜트지회장 이인근의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다는 속보가 올라왔다. 고공단식 21일차였다. 평지에서도 버티기 힘든 시간이었다.

몸 하나 제대로 누일 곳 없이 비좁고 발 하나 떼고 디디기도 위험하고 가파른 철 구조물 위 고공에서 여섯 명이 초긴장 상태에서 웅크리고 하는 단식은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지경이다. 주변 사람들이 초기부터 효소라도 먹는 단식을 호소했지만, 물과 소금만으로 버티겠다는 결의들이었다. 어떤 존엄과 정의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특별한 결단을 할 수 있는 인간이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그러기에 더 위태롭고 가슴 아프고 비정한 일이다.

이인근은 산송장처럼 목 하나를 제 힘으로 들지 못하는 상태라고 했다. 이날 급하게 올라간 의사 선생님이 병원으로 갈 것을 설득 중이라고 했다. 함께 올라간 이들도 우리가 잘 지킬 테니 이제 그만 내려가 보라고 설득 중이라고 했다. 그 하늘 위에서의 시간과 대화란 어떤 것일까. 그런 고결하지만 너무나도 끔찍한 시간이 언제까지 이어져야 하는 것일까.

보탤 것 없이 손 한 번이라도 잡아줘야 하지 않겠냐고 쫓아갔는데 병원으로 후송되었다고 했다. 침울하게 고개를 떨구는 사람들, 충혈된 눈동자들, 눈물을 훔치는 사람들 곁에서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모든 불의와 부정과 불공정과 반민주 반노동자민중의 상징이었던 박근혜를 파면시키고, 감옥으로 보낸 그 광장에서 다시 또 죄 없이 청명한 하늘만 쳐다보고 있어야 하는 오늘이 서럽기도 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일이지만 현재 고공농성에 돌입한 공동투쟁단 노동자들도 박근혜 퇴진을 위한 광장 운동에 최선을 다해 왔다. 지난해 11월 1일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앞에 농성장을 꾸리고 겨울을 꼬박 광장에서 지새웠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게이트가 지난해 10월 24일 JTBC에서 첫 보도되고 채 열흘도 안 된 시점이었다. 수백만 촛불은커녕 수만 촛불도 잘 상상되지 않고, 모두 분개했지만 살아 있는 권력인 박근혜를 실제 퇴진 시킬 수 있을 거라는 확신 또한 많지 않던 때였다.

그러나 정의를 위해 누군가는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때였다. 박근혜 정권 치하에서 가장 고통받고 탄압받으며 싸워 왔던 장기투쟁사업장 노동자들이 민주주의의 광장을 열고 지키는 일에 앞장서자는 결의들이었다. 하이텍알씨디코리아, 콜트콜텍, 아사히글라스, 삼표동양시멘트, 세종호텔, 하이디스, 현대자동차비정규직 노동자들이었다. 광화문 캠핑촌에는 기륭전자, 쌍용자동차, 기아차비정규직, 유성기업, 파인텍(구 스타케미컬) 등의 해고노동자가 함께 했다. 10년, 8년, 짧아도 3년 이상씩 힘겨운 현장 투쟁을 하는 이들이었지만 본인들의 사업장 문제 해결을 위한 게 아니었다.

이번 광화문 집단고공단식농성의 요구도 지난 촛불항쟁(혁명) 이후 한국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위해서는 형식적인 야권으로의 정권교체를 넘어 2200만 노동자 가족의 권리와 안전이 우선되는 사회로의 이행이라는 사회적 메시지다. 1100만 비정규직 제도화를 폐기해야 한다는 요구이며, 대자본의 이해만을 위한 광범위한 정리해고 제도가 폐기되어야 한다는 요구다. 헌법에 보장된 최소한의 기본 권리인 노동3권이 제대로 지켜지고, 바르게 고쳐져야 한다는 요구다.

100대 재벌 일가와 소수의 대주주가 1500조 원에 이르는 사회적 부를 사내유보금 형태로 독점한 초유의 재벌특권독점사회를 넘어서서 모든 국민, 서민, 노동자민중이 조금은 더 평화롭고 평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사회로 가야 하지 않겠냐는 간절한 호소다. 그런 실제적인 사회구조 변화, 가치관과 윤리의 변화로 나아가라는 게 모든 촛불광장, 모든 촛불시민의 근원적 명령이자 요구 아니겠냐는 이야기다.

"뭐. 한두 번이야. 제일 힘들었던 거. 몸 힘든 거보다 마음 힘든 게 어려웠지. 고공에서 외롭게 외치는 우리 소식을 들어주는 좀 더 많은 귀가 있었다면, 함께 쳐다봐 주는 눈이 조금은 더 많다면 좋겠다는 아쉬움이었어. 우리가 요구한 건 비정규직과 정리해고 관련 악법 폐지, 헌법에 보장된 노동3권의 실제적인 보장 등 2200만 노동자 가족의 최소 권익이 지켜져야 한다는 거였어. 그게 지켜질 때 한국사회 민주주의도 실제 진전이 될 거라고 생각해. 그게 없으면 촛불항쟁도 뭣도 겉 때깔만 곱지 말짱 도루묵 아니야."

"정리해고, 위장폐업에 맞서 길거리 노숙생활 10년 동안 단식만 세 번째네. 2008년 10월 15일이었을 거야. 여의도 국회 강 건너편 양화대교 송전탑 45m 높이에 올라 안전벨트를 매고 30일 동안 고공농성을 해야 했어. 거긴 정말 아찔했지. 허공에 베니어합판 쪼가리 몇 장 엇대고 매달려 있었어. 그때도 단식까지 해야 했어. 지금 달고 사는 골다공증도 그때 악화된 거야. 국회의사당에서 건너 보이는 곳이니 누구라도 한 명 우리의 절박한 얘기를 들어주러 오지 않을까 했는데 쓸데없는 기대였지. 죽지 못해 내려왔지. 내려 온 다음 날 콜트콜텍 등촌동 본사로 박영호 사장을 만나러 갔다 조합원 전원이 경찰특공대에게 끌려 나와야 했어.

두 번째는 지난 2015년 11월 16일부터였을 거야. 새누리당 여의도 당사 앞 노숙농성장에서 했지. 당시 새누리당 대표였던 김무성이 노동법개악 관련 국면에서 했던 반노동자적 발언과 콜트콜텍 관련 사실왜곡에 맞서는 단식이었어. 방종운 콜트지회장이 단식 40여 일만에 병원으로 실려 가고 바로 받아서 한 단식이었는데 13일 만에 그때도 이곳 녹색병원으로 실려 왔어. 그해 11월 14일, 그러니까 백남기 어른께서 물대포에 쓰러진 민중총궐기 날이잖아. 그날 그 거리에서 함께 싸우다 연행되었다가 48시간 만에 간신히 풀려나왔는데 나오자마자 단식에 돌입을 했잖아. 그런데 그 당시 경찰들에게 연행되던 과정에서 갈비뼈가 금간 것을 몰랐던 거지. 단식 중에 계속 가슴께가 너무 아파 진찰해 보니 금이 가 있는 거야. 버티려고 했지만 절대로 안 된다고 병원으로 실어 보내데."

심한 골다공증에 갈비뼈가 금 간 채로 단식을 해야 했던 시절을 이인근은 그냥 담담히 이야기하는데 도리어 내가 울컥해 말을 못 잇겠다. 생각해 보니 그 세 번의 현장에 모두 나도 있어야 했다. 2008년 10월 그가 양화대교 고공농성에 돌입하던 날 아침엔 기륭전자 비정규직 농성장이 싹슬이 당했던 날이었다. 싹쓸이 당한 농성장과 이제 막 철탑에 올라간 현장 양 쪽을 벗인 노순택과 함께 오가며 내 정신조차 위태롭게 이리저리 휩쓸리던 날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처음 만난 후 8년여를 거리에서 함께 보내야 했다. 말할 수 없지만 어느 날인가는 그가 사라졌던 날도 있다. 새벽녘 그는 등촌동 콜트콜텍 본사 앞 나무 아래 멍하니 서 있었다고 한다. 안타깝지만 장기투쟁에 장사 없다고, 바닥인 생계와 수년에 걸쳐 지속되는 상경투쟁 과정을 견딜 수 없었던 가족과도 이별해야 했다.

2007년 정리해고 당하던 당시 중1, 초교5학년이던 딸과 아들이 이젠 스물다섯, 스물셋의 청년들로 성장하는 동안 무엇도 해줄 수 없었던 아픔과 분노를 잊을 수 없다. 그렇게 상상하기도 싫고 상상할 수도 없는 날이 참 많았다. 주변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힘겨운 날들이었는데 당사자는, 당사자들은 오죽했을까.

그들이 원하는 건, 2200만 노동자 가족 모두의 요구

그간 10여년 콜트콜텍 노동자들도 안 해 본 것 없이 다 해 봤다. 정리해고 투쟁 초기 이동호 조합원은 분신을 했다 간신히 살아났다.

"신탄진에 있는 대한이연에서도 일했었지. 결혼하고 서른두 살 때였나 봐. 열심히 살아 봐야겠다고 들어간 공장이었어. 정규직이라 했지만 최저임금보다 조금 많이 받는 정도였어. 포장반에서 일했지. 자꾸 밖을 쳐다보면 생산성이 떨어진다고 창문이 하나도 없던 공장이었지만 괜찮았어. '빼빠질'과 그라인더질, 기타줄을 당기고 피스를 박다가 40% 넘는 이들이 근골격계 질환에 시달려도, 밀폐된 도장실에서 유기용제에 노출되어 직업병을 앓는 사람들이 전체의 59%가 넘어가도, 기관지 천식자가 36%를 넘어가도, 만성기관지염 환자가 40%를 넘어가도 모두 참고 일했어. 출근시간보다 1~2시간 빨리 나오게 해도, 일손이 달려 근처 집에 있는 아내를 불러들여 잔업, 철야를 하면서도 기타를 만들며 나오는 조금의 월급에 감사하면서 살았지."

전 세계 기타 시장 매출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작지 않은 회사였다. 세계적인 기타인 펜더, 알바레즈 등에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방식으로 다량의 기타를 납품하고 있었다. 30년 동안 이 공장을 운영하며 박영호 사장은 1000억 원대의 자산가로 한국 부자순위 120위가 되었다. 이것도 모자라 박영호 사장은 1993년 인도네시아 수라바야와 1999년 중국 대련에 공장을 설립하고는 천천히 기술과 수주량을 빼돌리며 국내 생산 라인을 축소시켜 나갔다.

2007년 4월에는 인천 콜트악기 노동자 56명을 정리해고하고, 7월에는 계룡시에 있는 콜텍 악기를 위장폐업하고 남아있던 67명 전원을 정리해고 했다. 2008년 8월에는 인천 콜트악기마저 위장폐업하고 말았다. 지금도 인도네시아와 중국 공장에서 연간 100만 대에 육박하는 기타를 생산 수출하고'(콜트악기 홈페이지 기업 소개란) 있다. 2012년 12월에는 한국지식경제부에서 선정하는 세계 일류 상품으로 콜트 기타가 선정되기도 했다. 정리해고와 위장폐업을 할 어떤 경영상의 위기도 없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끝내 대한민국 대법원은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10년을 외면했다. 부당한 정리해고라는 2심 판결마저 뒤집고 '미래에 다가올 경영상의 위기'만으로도 정리해고가 정당하다는 반사회적 판결을 내렸다. 그간은 경영상의 위기임을 명확히 증명할 수 있어야 했고, 노사의 성실한 협의, 최소화 노력 등을 거쳐야 정리해고가 가능했다.

이 판례는 콜트콜텍 노동자들을 넘어 대한민국 노동자 2200만 명의 '미래'를 송두리째 자본가들에게 넘겨준 반공공적 판결이었다. 10년 동안 다국적 자본이 된 콜트콜텍의 악행을 알리기 위해 여섯 차례의 국제 원정 투쟁에 나서보기도 했다. 최소한의 생계를 위해 수세미와 된장, 고추장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만들 줄은 알아도 칠 줄은 몰랐던 기타를 배워 '콜밴'이라는 밴드를 만들어 유랑을 다닌 지도 벌써 4년이 되었다.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힘은 연대해 주는 사람들이었다. 홍대 앞 클럽 '빵'에서 매달 한 번씩 '기타 만드는 노동자들을 위한 콘서트'를 8년째 열어주는 한국의 문화예술인들과 뮤지션들이 있었다. 국제연대도 많았다. 미국에서 만난 세계적인 록그룹 RATM의 기타리스트 탐 모렐로는 "기타는 결코 노동자들의 피와 땀을 쥐어짜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다국적 자본이 노동을 착취하려 한다면 이에 대한 노동의 투쟁 역시 다국적 차원에서 진행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콜트콜텍 노동자들을 위한 'Worldwide Rebel Song'이라는 노래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행사 동안 30여만 명이 다녀간다는 일본 '후지 락페스티벌' 사무국에서는 공식 초청을 해주기도 했다. <꿈의 공장>, <기타 이야기> 등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준 감독이 있었고, <구일만의 햄릿> 등 극을 만들어 주는 연극인들과, 그림과 만화를 그려주는 문화예술인들도 많았다. 모두에게 고맙고 미안하다. 그 고마움과 미안함을 갚을 길은 어떤 제2의 박영호도, 제3의 박영호도 나오지 않게 진실을 바로잡아 놓는 일이라고 이인근과 그의 동료들은 믿고 있다.

반사회적인 대법원 판결을 바로잡고, 그 누구도 함부로 자본가의 무한한 이윤만을 위해서 함부로 쫓겨나거나 탄압받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어놓고 싶다. 집도 가족도 평범한 일상도 모두 빼앗아 간 무자비한 세상의 풍속을 바로잡는 일 하나밖에 자신에겐 남지 않았다고, 자신은 모든 것을 박영호에게 빼앗겼지만 다시는 그 누구도 박영호 같은 인간에게 부당하게 삶을 빼앗기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이 이인근을 지탱시켜 주는 유일한 힘이다.

그런 세상을 지키고 만들어 보겠다고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또 한 번의 겨울을 나고, 새로운 시대의 봄이 왔다고 하는 때 다시 고공으로 올라야 했던 그. 모두가 황금연휴라고 여행을 떠나는 때, 누구도 잘 보아주지 않는 고공에서 삐쩍 마른 채 야위어가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든 산송장이 되어 실려 내려와야 했던 그. 그의 삶이 참 아프다.

"비정규․정리해고 악법 철폐, 노조탄압 없는 세상, 노동3권 완전보장" 그들이 요구하는 게 기실 우리 사회 2200만 노동자 가족 모두의 요구인데도, 촛불항쟁 이후 한국 사회의 핵심 의제인데도 대선 정국에 메아리 없이 묻혀 있는 현실이 참 아프다. 누구에게 요구하기보다 지난 광장에서 우리가 그랬듯이 우리 스스로가 그런 시대적 요구를 관철시키는 집단적 주체로 함께 행동해 나가자고 그들은 얘기하고 있지만, '그건 너무 과도한 요구 아니에요'라고, 그것은 '다음에, 천천히'라고 쉽게 얘기하고 있는 건 아닌지, 우리의 현실이 참 아프다.

그렇게 나는, 우리는 현실로 다시 돌아와 있다. 울산 현대기아차비정규직들과 광주 교육공무직비정규직들은 다시 고공농성에 들어가 있다. 부당한 노조탄압에 시달리던 갑을오토텍 노동자 김종중씨가 다시 목을 매야 했다. 세계 노동자의 날 행사가 열리던 5월 1일 거제도 삼성중공업에서는 안전사고로 여섯 명이 숨지고 이십여 명이 부상을 당해야 했다. 모두 비정규직 하청노동자들이었다.

세월호 진상규명은 여전히 요원하고, 사드 배치는 기습적으로 진행된다. 현장에서 다시 사람들이 끌려간다. 조기 대선을 이끌어 낸 사람들은 다시 TV 앞에서 철늦은 좌파, 주적 얘기, 돼지발정제나 동성애자를 사람으로 인정하느니 안하느니 하는 말도 안 되는 코미디를 시청해야 한다. 시민촛불혁명이 열어 둔 민주주의의 새로운 공간에 이상한 사람들이 나서서 자신들이 대표고, 이 사회를 이끌겠다고 한다.

물론 짧은 시간 동안의 큰 변화였으니, 최소한의 정권 교체 후 천천히 실제적인 변화를 이루어나가면 되지 않겠느냐는 낙관도 있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지난 촛불항쟁이 박근혜와 그 구체적인 범죄 집단에 대한 단죄였다면, 다시 일어설 광장은 박근혜로 대표되던 반민주, 반평화, 반노동자민중 정책과 구조, 세력들에 대한 더 구체적인 단죄와 단절로 가야 한다. 구시대적 정치집단들을 내리고 좀 더 진일보한 새로운 가치관과 윤리를 가진 이들로 정치권도 물갈이되어야 한다.

그 모든 질문으로 지금 광화문 네거리 변 광고탑 위에서 다섯 명의 노동자들이 자신의 몸을 환하게 말려가고 있다. 그들이 오늘 보는 하늘은 어떤 하늘일까. 지난 3월 10일, 넉 달을 노숙하고 있던 광화문 광장에서 현장에 설치된 거대한 LED 화면으로 헌법재판소 탄핵 판결을 보다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라는 한마디에 모두가 얼싸안고 뛰어오르던 그날 하늘은 얼마나 투명하고 맑았던지. 그렇게 우리가 맞이한 새로운 시대의 하늘이 좀 더 많은 이들에게 더 많이 평화롭고 평등한 하늘로 열리는 그날은 지금 오고 있는 것인지.

1960년 4.19 항쟁으로 이승만 당시 대통령을 하야시킨 후 신동엽 시인이 썼던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라는 시구가 머리속에서 자꾸 떠나지 않는다. '내가 본 건 지붕 덮은 / 쇠항아리, / 그걸 하늘로 알고 / 일생을 살아갔다'. 혹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도 그런 쇠항아리 아닐지. 아직 우리가 찢어내야 할 먹구름이, 쇠항아리들이 아직도 많은 건 아닌지 돌이켜본다.

"정리해고, 비정규직 문제는 어느 누구에게 국한된 게 아니잖아. 어느 누구든 당사자가 될 수 있어. 정리해고 비정규직 제도는 무슨 경영상의 위기 같은 게 이유가 아니잖아. 자본가들의 이윤보장을 위한 도구일 뿐, 반드시 폐기되어야 해. 또 대한민국 2200만 노동자들은 헌법에 보장된 노동3권마저 보장받지 못하고 있잖아. 비정규직은 노조 만들면 즉각 계약해지 해고당하고, 원청에 의해서든 자의에 의해서든 위장폐업하고 말지. 국회에서 복수노조법 만들어 민주노조 탄압하고, 공권력이 부당함에 항의하는 노동자 민중 때려잡는 자본의 사병 역할 하는 것이 변할까. 우리 콜트콜텍처럼 '미래에 올 경영상의 위기'에도 정리해고가 정당한 세상이라면 어떤 노동자, 노동조합이 온전히 배겨날 수 있겠어. 헌법에 보장된 노동3권이나마 충분히 누릴 수 있는 세상으로 함께 나가야지 않겠어. 좋은 말로 청원하면 되지 않냐고, 저들이 그냥 내주는 것 봤어 뭐."

그렇게 다시 저 하늘의 쇠항아리를 이고 살다 온몸이 무너져 이 땅으로 내려 온 이인근은 서울 면목동 녹색병원 6308호실에 누워 다시 걸어 나올 날을 꿈꾸고 있다. 지난해 11월 겨울 초입부터 올해 5월 늦봄까지 거의 반년을 광화문 광장에서 노숙을 하며 촛불항쟁의 진심을 지켜 온 이 중의 한 사람인 그에게 고맙다는 말 몇 마디쯤은, 수고했다는 말 몇 마디는 전해 줄 수 있는 것 아닐까.

"나야 뭐. 이젠 걱정할 거 없고, 고공에 남은 다섯 동지들 많이 좀 도와줘. 그래 알았어. 빨리 몸조리하고 나갈게 기다려. 이번엔 정말 박영호 사장도 혼을 내야 하지 않겠어."

그랬으면 정말 좋겠다. 생각해 보면 콜트콜텍은 집중 투쟁만 하려고 하면 늘 다른 사회적 사안이 생겼다. 그때마다 그들은 묵묵히 자신들의 투쟁을 접고 사회적 사안에 연대하는 일로 나섰다. 그게 당연한 일 아니냐고 했다. 지난 6개월 동안도 그들은 그랬다. 이인근은 비정규정리해고 노조탄압 분쇄 공동투쟁단으로 정부종합청사 앞 농성장을 지키고, 김경봉 형은 광화문 캠핑촌 사무국을 함께 지켰다. 남은 방종운과 임재춘 형 둘이 입이 쑥 나온 채로 여의도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 앞 농성장을 지키는 이산가족 생활이었지만 그들은 단 한 번도 힘들어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라고 누군가 물으면 이런 이들은 혹 보지 않았을지 물어보자고 해야겠다. 세 번씩이나 고공단식농성을 해야 했던 이인근은 좀 다른 하늘을 봤지 않을지. 광화문 광장 하늘 위에서 말라가고 있는 저들, 강원 삼척의 동양시멘트비정규직 김경래, 하이텍알씨디코리아 해고자 김혜진, 세종호텔조합원 고진수, 구미 아사히글라스비정규직 해고자 오수일, 현대차울산비정규직 장재영은 조금은 다른 하늘을 봤지 않을지, 조금은 다른 하늘을 꿈꾸지 않았을지, 물어보자고 해야겠다. 내가 본 것도 대개는 '쇠항아리'들이었다.


태그:#광화문 고공농성, #고공농성, #이인근, #송경동, #콜트콜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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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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