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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겨울 촛불 집회를 계기로 '18세 선거권' 등 청소년들의 참정권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일부 정당들의 소극적 자세나 반대 속에 대선 정국이 되자 청소년 참정권에 대한 관심은 다시 사그라지고 있는 분위기다. '청소년인권연대 추진단'은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 전반의 문제가 이슈화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3월부터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가 탄압당한 사례를 수집했다. 그 결과 모인 사례들을 소개하며 청소년 참정권 보장을 위해 풀어야 할 과제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5월 9일 대선일에는 청소년 참정권 보장을 요구하는 청소년 집회가 열릴 예정이다. - 기자 말

94년 전의 어린이날, 그리고 오늘

1923년 처음으로 열렸던 어린이날 행사는, 이전까지 '애'나 '아이'와 같은 멸칭으로 불리며 무시 받던 소년들이 "어린이에게 경어를 써 주시고 사람답게 대하여 주십시오"라는 표어를 내걸고 인격적 대우를 요구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이로부터 거의 한 세기가 지난 지금, 한때 '애'나 '아이'로 불리던 사람들을 지칭하는 단어는 '어린이'가 되었다. 그러나 '어린이'에 대한 '어른'들의 인식이나 어린이가 누리는 사회적 지위가, 한 세기 전의 그것에서 근본적으로 변화했다고 볼 수 있을까?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사회 공동체의 울타리 속에서 살아가는 시민이 된다. 아동과 청소년 역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사회와 상호작용하며 현재를 살아가는 주체적 존재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아동기나 청소년기는 대개 '미래에 사회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해 나가는 시기'로 인식되어 오고 있으며, 사회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청소년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는 '사회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기에는 미성숙하다'라는 이유로 유예되고는 한다.

연소자를 대하는 '어른'들의 시각은 94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연장선상에서 보면, 한 세기 전의 '어른'들이 사용하던 '애'나 지금의 '어른'들이 사용하는 '어린이' 모두, '주체적이지 못한 인간 이하의 존재'라는 혐오적인 의미가 담긴 멸칭에 불과하다.

청소년, 기특한 '2등 시민'

학생과 시민이 지난 2016년 11월 5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모이자! 분노하자! #내려와라 박근혜 2차 범국민대회'에 참석해 '최순실 게이트'로 불거진 국정농단을 규탄하며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고 있다.
▲ '죽어가는 우리나라, 청소년이 살리겠습니다' 학생과 시민이 지난 2016년 11월 5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모이자! 분노하자! #내려와라 박근혜 2차 범국민대회'에 참석해 '최순실 게이트'로 불거진 국정농단을 규탄하며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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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과 함께 사회 속에서 살아가지만 동등한 구성원으로는 인정받지 못하는 청소년의 모순적인 정체성은 지난 촛불 정국에서 크게 드러났다. 박근혜 게이트에 분노한 많은 청소년들은 자발적으로 광장에 모여 민주주의를 외쳤고, '중고생이 앞장서서 혁명정권 세워내자'라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을 들고 거리로 나온 중고생연대는 집회 현장의 시민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청소년이 주권자로서의 권리를 당당하게 행사하는 순간들이었지만, 집회에 함께 했던 '어른'들이 수많은 군중들의 대오 속에서 자리를 지킨 청소년들을 자신들과 동등한 인격체, 혹은 동등한 대한민국의 주권자로 인정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청소년 참정권 침해사례 실태조사에 참여했던 대부분의 제보자들은, 광장에서 마주친 대개의 '어른'들이 일종의 부채 의식이나 대견스러움과 같은 감정이 담긴 말로 자신들을 대했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 나이에 이런 곳에 다 오고, 기특하네', '아이들이 집회에 나오게 해서 어른들이 미안하다'와 같은 말들은 청소년이 시위 현장에서 가장 쉽게 마주할 수 있는 표현들이다. 실태조사에 참여한 청소년활동가 A씨는, 집회의 진행자가 '우리 아이들 기특하다'와 같은 발언을 무대에서 쏟아내었던 장면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청소년을 대하는 이러한 반응들은 비단 집회 및 시위 뿐만 아닌, '어른'들의 영역으로 치부되는 많은 사회활동에서 나타나고는 한다. 일례로, 청소년 참정권 침해 사례 실태조사에 참여했던 어느 고등학생은, 본인이 참여하는 워크숍과 포럼에서 '어린 나이에 이런 데도 오고 대단하다!' 와 같은 발언을 반말조로 들어오고는 했다. 이러한 맥락의 표현들은, 언뜻 호의적으로 들리지만 지독히도 억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위와 같은 말들을 거꾸로 뒤집어 보면, '대개의 청소년들은 정치적 판단을 내리기에는 미숙하기 때문에, 집회, 시위와 같은 사회참여를 하지 않는다'와 같은 '어른'들의 편견이 드러난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미성숙한 청소년'은 정치적 주체로 인정받지 못한다. 다만 운동의 현장에서 어른들이 지켜주어야 할 대상이 되거나, 어른들의 판단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도구적인 존재가 될 뿐이다.

나아가, 이러한 인식은 '청소년은 미숙하므로 정치적 판단을 유보하고 사회참여에 거리를 두어야만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어른'들의 기특하다는 말들 속에서 청소년 집회 참가자들이 느끼는 것은, 같은 공간 속에서 같은 목소리를 내는 '어른'들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커다란 장벽과, 정치적 목소리를 내기 위해 나온 집회에서조차 정치적 주체로 존재할 수 없음에서 기인하는 무력감이다.

어디에서도 우리의 권리는 '나중에'

많은 청소년들은 거리에서 자신들을 동등한 인격이 아닌 기특한 존재로 여기는 발화와 마주함과 동시에, 가정과 학교에서 사회참여를 가로막는 탄압과 마주하게 된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다'라는 슬로건 아래에서, 학교는 기상천외한 방법들로 청소년의 사회 참여를 가로막는다. 국회에서 하는 행사에 참여하려고 교사에게 야간자율학습 공결을 부탁한 학생을 '고등학생이 무슨 정치냐'는 말로 돌려보내는가 하면, 정치적 활동을 한다는 이유로 수업시간에 불러내 몇 시간 동안 설교를 하기도 한다.

이는 가정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실태조사에 참여한 청소년들은 '집회에 가면 죽여 버리겠다'는 막말을 듣거나, 집회 관련 내용이 올라오는 sns 계정을 감시당하고, 모든 통신수단을 차단당하기도 했다. 청소년의 정치적 권리를 유예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청소년이 성숙해질 때 까지 연장자의 관리 하에 두어야 한다는 '어른'들의 인식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어른'과 동등한 정치적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청소년은 자연스레 타자화된다. 또한 청소년들이 연장자들과 동등한 사회적 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곧 동등한 인격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데까지 이어지게 된다.

청소년을 동등한 인격으로 인정하지 않는 '어른'들의 생각은, 청소년을 억압하는 위계와 차별을 만들어낸다. 청소년들에게 반말을 툭툭 던지고 하대하는 것이나, '어른'들이 생각하는 청소년의 순수한 이미지에 당사자들을 가두고, 그러한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않는 발언과 행동을 청소년에게 요구하는 것, 그리고 청소년들의 경험을 '어른'의 경험에 비해 보잘 것 없는 무언가로 치부하는 것 등은, 청소년이 집회에 참여하고 일상을 살아가며 흔하게 겪을 수 있는 위계와 차별의 대표적인 예다.

동등한 시민이 되기 위하여

지난 2015년 10월 24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 부근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범국민촛불문화제가 열렸다.
 지난 2015년 10월 24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 부근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범국민촛불문화제가 열렸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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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해오던 것과 같이, 청소년은 사회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어른'들과 같은 공동체의 성원이다. 자유롭게 말하고 참여하는 것은 청소년이 사회 공동체의 성원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다. 하지만 이러한 권리는, 청소년을 동등한 시민으로 인정하지 않은 채 사회 참여를 유예하고 위계와 차별을 만들어내는 어른들의 편견과 태도, 그리고 우리 사회에 깊게 뿌리박힌 나이주의적인 문화에 의해 지워지고 있다.

청소년들이 집회 및 시위 현장에서 존중받고, 자유롭게 목소리를 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정말 뻔한 것들이다. '어른'들이 청소년들을 동등한 인격체로 인정하는 것이다. 처음 보는 청소년들을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할 때와 같이 존대하고, 청소년의 사회 참여를 특별하거나 예외적인 일로 바라보지 않는 데에서부터 인식의 변화를 시작해 가는 것이다.

참정권의 확대를 통해, '성인'으로만 생각되어 오던 시민의 개념을 청소년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아우르는 것으로 재정립해나가는 과정 또한, 청소년이 집회 현장과 사회 속에서 '있는 그대로 있을 수 있기 위해' 넘어야 할 중요한 산이라고 할 수 있다.

청소년이었던 지난해의 나는, 모두가 함께 느끼는 분노를 이야기하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 하지만 그 속에서조차 평등한 개인으로 존재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라는 단어 속에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나는 모든 사람이 나이를 비롯한 어떤 장애물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광장을 꿈꾼다. 이것이 먼 훗날의 이야기가 아니기를, 가까운 시일 내에 당연한 문화로 받아들여지기를 소망한다.


태그:#청소년인권, #학생인권, #참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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