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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물단지 스키, 무인헛에 다시 왔다

독일인들은 먼저 출발했다. 살카에서 보자고 했다. 무인헛을 지나면 바로 내리막 길이다. 눈이 없는 여름이라면 어땠을까. 얘기 하며 같이 쉬기도 하고 가는 길이 지루하지 않았을 텐데 지금은 보낼 수밖에 없었다. 누가 옆에 없더라도 사실 지루하지는 않다. 항상 넘어지고 뒤집어지고 눈에 파묻히고 버라이어티의 연속 이니까. 그냥 옆에 사람이 있었으면 했다.

이번엔 넘어지지 않으려고 굳게 다짐하며 내려갔지만 얼마 가지 않아 꼬꾸라졌다. 얼굴부터 눈속에 박아버렸다. 그 이후로 수없이 넘어지고 일어섰다. 오기가 생겼다. 누가 이기나 해보자 다짐하며 다시 내려갔지만 또 넘어졌다. 스키를 버리고 싶은데 버릴 수가 없다. 없으면 걷지를 못하는데, 설피도 없는데, 애물단지 스키는 항상 내리막길에서 나를 힘들게 했다.

두 사람이 보인다. 무인헛을 향해 오르고 있었다. 눈속에서 빠져나오려 안간힘을 쓸 때 그는 말했다.

"괜찮니?."
"아니, 안 괜찮아."

보면 모르냐고 그냥 가라고 속에선 불이 나고 있는데 차라리 아무말 없이 갔으면 했다. 그들은 언덕을 아주 잘 올라가고 있었다. 눈에 파묻힌 지금 상황이 너무 싫었다. 포기했다. 아비스코로 돌아가기로 마음 먹었다. 무인헛에 올라가 쉬다 내려가자 결정했다.

커플은 스키강국 오스트리아에서 왔다. 무인헛에 도착했을 때 남자는 난로에 불을 지펴놨다. 축 쳐져있는 모습에 몇마디 말을 건넨다. 아비스코로 돌아갈꺼라는 내 말에 이미 반이나 왔는데 도전에 성공하라며 다시 내려가라고 했다. 돌아가는건 너의 결정이지만 풀코스는 아니더라도 니칼루옥타까지만 가도 대단한 거라며 계속 다독여줬다.

수시로 마음이 변해 하루에도 몇번씩 돌아갈까 마음먹었지만 참고 걸었다. 그래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가기에도 그동안 걸어온 시간이 아깝다. 다시 한번 강한 결심을 했다. 가자. 가보자. 넘어지다보면 내려가겠지. 떠나는 나에게 꼭 성공하라며 할 수 있다고 격려해줬다.

오스트리아 사람. 무인헛을 향해 올라오는 중.
 오스트리아 사람. 무인헛을 향해 올라오는 중.
ⓒ 정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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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킨,  플레이트에 붙여놓은 모습.  오스트리아인 신고 있던 스키
 스킨, 플레이트에 붙여놓은 모습. 오스트리아인 신고 있던 스키
ⓒ 정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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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탈진 길은 끝이났다. 활강하다 몇번 자빠졌지만 처음보다 내려가는 속도는 빨라졌고 다시 평이한 길이 나왔을 땐 소리를 질렀다.

기분은 한결 나아졌다. 익숙한 풍경에 지루할 때 쯤이면 사람이 나타난다. 추운 날씨에 이런 오지같은 곳을 오는 나같은 사람이 있을까 했는데 세상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우크라이나에서 단체로 온 그들이 그랬고 2인 이상 오는 친구들도 다양했다. 스웨덴 사람보다 독일 사람을 더 많이 만난 건 의아한 부분이지만 그래도 나만 이 길을 걷지 않다는 걸 알기에 힘들지만 버틸 수 있었다.

우크라이나에서 온 팀.
 우크라이나에서 온 팀.
ⓒ 정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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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이 넘친 사람들

살카에 도착했다. 숙소에 도착하면 텐트자리 마련을 위해 1~2시간 정도 삽질을 해야 하는데 다행히 이곳엔 전날 밤 텐트치고 잤던 트레커들이 있었나 보다. 먼저 떠났던 독일 친구들은 이미 저녁먹을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곳엔 유럽에서 온 친구들이 많이 보였다. 많다고 해도 10명쯤. 다들 숙소 내부에서 잠을 자는 친구들이라 밖에서 자는 사람은 내가 유일했다.

젖어있던 장비를 난로 근처에 말리며 여행 얘기를 주고 받았다. 텐트자리 비용을 지불하려 데스크에 갔던 내게 그곳에 계신 분은 웰컴티를 주셨고 많은 질문을 하셨다. 정말 아시아 사람이 겨울 시즌에 이곳에 오는 일이 드문가 보다. 알고 있는 몇 가지 스웨덴어를 하니 본인 나라 말을 한다며 좋아해 주셨고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시는데 그저 웃기만 했다.

차와 곁들여 먹으라며 쿠키도 주셨다. 한국에 대한 궁금한 점을 설명해 드리며 부족한 나의 장비 한탄과 포기할뻔 한 얘기, 스키를 버리고 싶었던 얘기, 호수 위를 걸으며 조마조마 했던 얘기를 나눴고 궁금했던 12~1월에 극야를 체험 할 수 있는지, 오로라는 잘 보이는지, 얼마나 추운지 물어봤다. 하나하나 열심히 설명해 주셨다.

살카 숙소
 살카 숙소
ⓒ 정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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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카 산장
 살카 산장
ⓒ 정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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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사이 눈이 내렸다. 텐트자리는 사라져 버렸다. 밖으로 나와보니 내 자리역시 사라져 있다. 지난밤 계속 침낭 커버가 얼굴을 치고 바람소리도 요란하게 들렸는데 역시나 예상한 대로 많은 양의 눈이 쌓여 있었다. 자리 정리도 쉽지 않았다. 길이 사라져 있어 오늘도 만만치 않은 하루가 될거라 짐작했다. 오후부터 눈폭풍이 온다고 했다. 서둘러 다음 목적지 '싱이'로 가기 위해 출발했다.

밤사이 눈이 많이 내렸다. 옆에 매트가 있는 곳이 전부 텐트 자리였는데 눈에 다 사라졌다.
 밤사이 눈이 많이 내렸다. 옆에 매트가 있는 곳이 전부 텐트 자리였는데 눈에 다 사라졌다.
ⓒ 정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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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2016년 3월 11일부터 3월 19일까지 걸었던 이야기입니다.



태그:#쿵스레덴, #스키트레킹, #스웨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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