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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킨의 부재

스키를 신고 언덕을 오르려면 알파인 스키로는 오를 수가 없다. 옆으로 서서 한 발 한 발 오르던지 갈지(之)자로 지그재그 올라야 하는데 이마저도 심하지 않는 경사로 일 때 얘기며 꾸준히 올라야 하는 언덕이나 산에선 스킨이 꼭 필요하다. 스킨이 없다면 차라리 스키를 벗고 오르는 편히 더 쉽다(스킨은 플레이트 바닥에 붙여 사용하는 장비로 경사로를 미끄러지지 않고 올라가게 해줍니다. 산악스키에선 꼭 필요합니다).

아비스코야우레를 벗어나 황무지와 같은 곳을 지나자 길게 늘어선 언덕이 보인다. 스킨이 없는 상태에서 걷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스키를 벗어야 했는데 불편했던 건 신발을 갈아 신어야 한다. 크로스컨트리 전용 신발은 스키 없이 걷기엔 신발 바닥이 딱딱해 충격이 오면 발이 저리며 가죽이 얇아 발이 시리다. 스키를 신고 걸을 때 눈을 다져주며 나가기 때문에 신발 안으로 눈이 잘 들어오지도 않는다. 장비의 부재는 여러 번 시험에 빠트렸다.

스페인 그룹은 먼저 올라갔다.
 스페인 그룹은 먼저 올라갔다.
ⓒ 정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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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스코를 떠나 아비스코야우레로 가는 초입 길. 상당히 가파른 언덕길이다.
 아비스코를 떠나 아비스코야우레로 가는 초입 길. 상당히 가파른 언덕길이다.
ⓒ 정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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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넓은 평지는 거리감각을 상실케 하다

쿵스레덴 길에는 호수가 많다. 여름엔 이곳을 우회하며 걷지만 겨울엔 얼어있는 호수 위를 걷는다. 눈에 쌓여있어 호수인지 길인지 알 수 없을 땐 주기적으로 발밑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이곳이 호수 위라는 걸 깨닫게 해준다. 가슴 졸이며 걷기엔 이 만한 곳도 없다.

드넓은 평지에 거리감각이 사라졌다. 목적지가 눈앞에 보이지만 가도 가도 끝이 없고 계속 그 자리에 있다. 시간이 흘러도 도무지 가까워지지지 않는다. 체감상 2km는 거의 두세배는 되는 거리였나 보다. 알레스야우레에 도착한 시간은 걸은지 10시간이 지난 후였다.

알레스야유레가 보인다.
▲ 호수 위에서 알레스야유레가 보인다.
ⓒ 정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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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그룹 선두가 먼저 가고 있는 모습
▲ 알레스야우레 스페인 그룹 선두가 먼저 가고 있는 모습
ⓒ 정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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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 아저씨 아셀을 만난 곳은 사우나에서였다. 독일인 아저씨답게 사우나에서조차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맛이 없다며 계속 투덜거리셨지만 꾸준히 마셨다. 식당에서도 마셨으니 그날 아저씨가 마신 맥주는 5병은 족히 넘었을거다. 알몸인 상태로 아셀, 스페인 아저씨, 나 이렇게 3명이 있었다.

겨울에 이곳에서 아시아인을 처음 본다는 아저씨는 궁금한 게 많았다. 어떻게 이곳에 올 생각을 했는지, 스키는 가지고 왔는지, 춥지 않은지, 어디까지 가려고 하는지 물어보셨다. 밖에서 잔다는 내 말에 제대로 북극권을 즐기는 여행이라며 건배와 저녁은 식당에서 같이 먹자고 제의하셨다. 본인은 풀코스를 두 번 했으니 궁금한 게 있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물어보라 했다. 스페인 아저씨는 아셀과 오랜된 친구 사이였다.

식당엔 스페인 그룹도 함께 있었다. 테이블 위엔 다양한 치즈, 햄, 빵, 수프, 파스타, 과자, 젤리, 맥주로 가득 찼다. 본인들은 이제 이틀 남았으니 먹을 수 있을 만큼 원 없이 먹으라며 계속 권해주셨다. 입맛은 중요치 않았고 고열량 음식으로 배를 채울 수 있었다.

장비 얘기를 할 때쯤 '키비요크에서 암나마스' 구간을 걱정하고 있다는 내 얘기를 들은 아셀은 GPS 기계가 두 개 있으니 선뜻 빌려주시려 했다. 사용법도 알려주시고 한국에 무사히 도착하면 우편으로 보내달라는 말에 감사했지만 받지는 못했다.

보온병을 주셨다. 그러고 보니 겨울에 장기간 오지로 여행을 떠나면서 꼭 필요했던 그 흔한 보온병조차 챙기기 않았다. 트레킹을 시작하며 잠시 쉴 때면 체온 유지와 수분 섭취를 위해 필요했던 것을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살얼음이 낀 물만 마셨다. 최대한 가볍게 떠나고자 무게를 줄여가며 배낭을 꾸렸지만 무게에 신경 쓴 나머지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장비를 놓쳤던 셈이다.

연거푸 감사함을 전달했고 아셀은 별거 아니라는 듯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라고 했지만 이미 받은 따뜻한 정과 배려에 괜찮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다음 날 그들과 헤어지기 전 아셀의 아내는 가면서 먹으라며 한 봉지의 음식을 챙겨주셨다. 배낭에 들어갈 공간이 있을까 그런 걱정은 잊은지 오래고 나는 그저 감사함을 전했다.

#프랑스 커플은 아비스코로 되돌아갔다

프랑스 커플이 보인다. 재차 확인을 했지만 그들은 되돌아오고 있었다. 문제가 생긴 걸까. 그랬다. 폴이 부러졌다. 더 이상 갈 수 없다고 아비스코로 돌아간다고 했다. 폴 없이 걷는 건 위험하다며 말했던 그들의 얼굴에는 짙은 어둠이나 아쉬움은 없었다. 평온해 보였다. 나였다면 어땠을까. 2개월간 준비하고 스키를 배우고 굳은 결심으로 이곳에 왔는데 돌아가야 할 상황이 생겼다면 몹시도 슬펐을 것이다.

프랑스 니옹에 살던 그들은 가까운 거리에 살아서 쉽게 결정을 내린 거라 생각지 않는다. 그들 역시 이번 여행을 준비하며 썰매, 하네스, 트레킹 장비에 상당한 돈을 지불했다고 들었다. 안전을 선택한 것이다. 먼 거리에서 날아온 나에겐 좀처럼 내리기 힘든 결정이었을 테다.

"괜찮겠니?"
"괜찮을 거야... 아마도."
"무사하길 바래. 혼자니까."

이틀을 같이 걸으며 나는 그들에게 의지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고요보다 못해 적막한 이곳에서 돼돌아 간다는 말에 한참을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스페인 그룹은 아비스코야우레에서 다른 길로 떠났고 프랑스 커플만이 같은 길로 걸었던 유일한 팀이었다. 그들이 점점 눈에서 멀어지자 애써 두려움을 감추고 걷기 시작했다. 누가 보고 있지도 옆에 있지도 않지만 이 두려움이 보일까 어서 없어지기를 기도했다.

더욱 차가워진 바람은 얼굴을 세차게 때렸으며 수시로 플레이트에 붙은 눈을 제거하느라 속도가 나지 않는다. 얼마나 더 가야 오늘 목적지에 갈 수 있을까. 앞으로 3시간이면 도착할 예정이던 다음 숙소는 두렵고 홀로 외로운 마음에 주저앉았다.

차라리 이곳에서 야영을 하자 마음을 잡고 텐트 자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1시간의 삽질은 괜찮은 자리가 되었고 텐트를 피고 짐을 풀고 누워본다. 누구 하나 지나가면 좋으려만 주위를 둘러봐도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벌레마저 보이지 않았던 이곳은 그야말로 오지 Out of no where.

먹어도 먹어도 배낭 무게는 줄지 않는다. 첫 노숙지에서
 먹어도 먹어도 배낭 무게는 줄지 않는다. 첫 노숙지에서
ⓒ 정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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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 삽질의 결과로 안락한 텐트 자리를 마련했고 안으로 들어왔다
 1시간 삽질의 결과로 안락한 텐트 자리를 마련했고 안으로 들어왔다
ⓒ 정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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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3월 11일부터 3월 20일까지 여행한 이야기입니다.



태그:#쿵스레덴, #스웨덴, #스키트레킹, #북극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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