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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봄에 곳곳에서 풀이 돋습니다. 이 풀을 놓고서 싫어하는 분이 있고, 반기는 분이 있어요. 지난날에는 봄이 되어 들이며 숲이며 풀이 돋으면 짐승을 먹이기에 좋다고 여겨서 반겼을 테지만, 요사이는 소먹이도 나물도 아닌 잡풀로 여겨서 꺼리기 일쑤입니다.

새봄에 마당에서 돋는 솔을 즐겁게 훑습니다. 이 솔로 '솔겉절이'를 마련하고 '솔부침개'를 합니다. 솔을 날로 씹으면 알싸하게 감도는 맛이 싱그럽습니다. 부침개를 하면 여러 푸성귀하고 얼크러지는 냄새가 향긋합니다.

새봄에 솔도 훑지만 찔구도 훑습니다. 이 찔구로는 '찔구무침'을 합니다. 새봄이 아니면 도무지 맛볼 수 없는 찔구무침은 사오월에 남달리 누리는 기쁜 봄밥이라 할 만합니다. 봄이 베푸는 선물이라고 할까요.

전라도에서는 '솔·찔구'라 하고, 서울에서는 '부추·찔레'라 합니다. 새봄에 누리는 나물을 놓고, 또 풀이나 꽃을 놓고, 퍽 다른 이름이 있습니다. 이 이름을 놓고 나라 어디에서나 모두 알아듣기 좋도록 '서울 표준말'을 세우지요.

서울 표준말은 '찔레꽃'. 전라말은 '찔구꽃'
 서울 표준말은 '찔레꽃'. 전라말은 '찔구꽃'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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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표준말은 어느 모로 본다면 서로서로 도움이 되는 말일 수 있고, 시골사람한테는 아예 새롭게 배워야 하는 말일 수 있습니다. 시골에서 나고 자라며 살림하는 사람으로서는 굳이 서울 표준말을 알아야 할 일이 없거든요. 집에서 쓰는 말이나 마을에서 쓰는 말을 구태여 서울 표준말로 해야 하지 않을 테고요.

'시기상조(時機尙早)'는 "어떤 일을 하기에 아직 때가 이름"을 뜻하는 한자말입니다. "아직 시기상조이다"라 하면 겹말이에요. '시기상조' 같은 한자말을 쓰는 일은 잘못이 아니나, 이런 말을 쓰려면 말뜻을 제대로 살펴서 올바로 써야겠지요? 더 생각할 수 있다면 굳이 '시기상조'를 안 쓰고 "아직 이르다"나 "아직 때가 아니다"라 해 볼 만합니다.

'일조일석(一朝一夕)'은 "하루의 아침과 하루의 저녁이란 뜻으로, 짧은 시일을 이르는 말"이라고 해요. 이 같은 한자말도 얼마든지 쓰고 싶으면 쓸 노릇이지만 '하루아침'이라든지 "하루 만에"나 '곧·곧장·곧바로' 같은 낱말을 알맞게 쓸 수 있습니다. "일조일석으로는 할 수 없어요" 같은 글월이라면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할 수 없어요"나 "서둘러서는 할 수 없어요"나 "다그쳐서는 할 수 없어요"처럼 새롭게 가다듬어 볼 만합니다.

윤(潤) : = 윤기(潤氣)
윤기(潤氣) : 반질반질하고 매끄러운 기운
반질반질 : 1. 거죽이 윤기가 흐르고 매우 매끄러운 모양

'윤(潤)'이라고 하는 한자를 쓰는 분이 있습니다. 이 한자를 "빛날 윤"으로 읽기도 합니다. 한자 새김처럼 '윤·윤기'는 빛이 나는 모습을 가리키고, 한국말로는 '반질반질'이에요. 한국말사전을 살피면 '반질반질'을 '윤기'로 풀이하고, '윤기'를 '반질반질'로 풀이합니다. 바보스러운 돌림풀이입니다. 이 같은 바보스러운 돌림풀이는 우리가 늘 쓰는 말을 제대로 못 살핀 탓에 불거집니다. 한국말하고 한자말은 '다른 말'인 줄 깨닫지 못한 탓에 사전을 엉망으로 엮지요. 말풀이를 다음처럼 고쳐야 알맞으리라 봅니다.

윤(潤) : → 반질반질
윤기(潤氣) : → 반질반질
반질반질 : 1. 거죽에 빛이 나고 매우 매끄러운 모습

'반질반질'하고 비슷한 '번지르르·반들반들'이 있습니다. 이 낱말을 한국말사전에서 살피면 '윤'이라는 한자로 풀이를 해요. 이 같은 대목도 고쳐야 할 테지요.

광(光) : 1. = 빛 2. 물체의 표면에 빛이 반사되어 매끈거리고 어른어른 비치는 촉촉한 기운
빛 : 4. 찬란하게 반짝이는 광채

'윤'하고 비슷한 '광(光)'이라는 한자가 있어요. "구두를 광이 나게 닦는다"고들 말합니다. 이 '광'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빛'입니다. "구두를 빛이 나게 닦는다"라고 말하면 됩니다. 또는 "구두를 반질반질 닦는다"나 "구두를 번쩍거리게 닦는다"라 말할 수 있어요.

새로 옻을 바른 평상이 반질반질합니다.
 새로 옻을 바른 평상이 반질반질합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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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르다 : 3. 남의 요구를 야무지게 거절하다
거절하다(拒絶-) : 상대편의 요구, 제안, 선물, 부탁 따위를 받아들이지 않고 물리치다
물리치다 : 3. 거절하여 받아들이지 아니하다

한국말사전을 살피면 '자르다'를 '거절하다'로 풀이하고, '거절하다'를 '물리치다'로 풀이하는데, '물리치다'는 다시 '거절하다'로 풀이합니다. 돌고 도는 뜻풀이랍니다. 사람들은 "딱 잘라 거절하지 말고" 같은 말을 흔히 쓰기도 하는데, 이 말씨는 겹말이에요. '거절하다'라는 한자말은 얼마든지 쓸 수 있습니다만, 이 한자말이 어떤 뜻인지 찬찬히 안 살핀 탓에 겹말을 쓰고 말아요.

더 헤아릴 수 있다면 "딱 자르지 말고"나 "딱 물리치지 말고"처럼 수수하게 쓸 만합니다. "손사래를 치지 말고"나 "고개를 젓지 말고"라 해 볼 수 있어요. 뜻하고 느낌을 고이 살펴서 수수하게 쓰면 겹말이 나타나지 않을 뿐 아니라, 어른도 아이도 곧장 알아들을 수 있어요.

'추가(追加)'라는 한자말을 살펴봅니다. "나중에 더 보탬"을 뜻하고, 한국말사전에는 "≒ 추증(追增)"처럼 비슷한말을 싣습니다. '추증'은 "= 추가(追加)"로 풀이합니다. '추증'은 굳이 쓸 일이 없겠지요. "더 보탬"을 뜻한다는 '추가'이니 "추가로 더 주다"처럼 말하면 겹말이에요. 쉽고 수수하게 "더 주다"라고 하면 그만입니다.

한국말사전은 '추증' 같은 한자말을 괜히 실어서 한자말 숫자를 불립니다. 이밖에도 한국말사전에 '추가(秋稼)'라는 한자말을 "[농업] = 추수(秋收)"로 풀이하며 실어요. '가을걷이'라는 낱말이 있는데 구태여 '추가·추수' 같은 한자말을 써야 할는지 생각해 볼 노릇입니다. 안 써도 되거나 쓸 만한 자리가 없는 애먼 한자말을 사전에 왜 실었는지를 곰곰이 따져야지 싶어요.

우리는 한국말사전에 토박이말이 적고 한자말이 많은 듯 쉽게 생각하지만, 이는 썩 올바르지 않습니다. 막상 한국말사전을 찬찬히 살피면 '追增'이나 '秋稼'처럼 쓰임새조차 없는 한자말이 대단히 많습니다. '구조'라고 하면 어떤 한자말이 떠오를까요? 한국말사전에는 '얼개'를 뜻하는 '構造'나 '살리기'를 뜻하는 '救助'뿐 아니라 '九條·久阻·口調·狗蚤·救助·舅祖·鉤爪' 같은 한자말을 실어요. 이런 '구조'를 듣거나 보거나 쓸 일이 있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狗蚤'는 '개벼룩'이라는데, '개벼룩'이라 안 하고 '구조'라 할 까닭이 없어요. '鉤爪'는 '갈고랑이'라는데, '갈고랑이'라 안 하고 '구조'라 할 까닭도 없습니다.

한국말을 담는 그릇인 사전이 제구실을 안 하고 엉뚱한 한자말을 마구 싣느라, 정작 시골말을 찬찬히 살펴서 알려주는 일은 얼마 못합니다. 마치 한국말이라는 보금자리에 한자로 된 낱말이 대단히 많은 듯 부풀리는 꼴이 되기까지 합니다. 사전이나 교과서는 표준 서울말로 적어야 좋다고 할 터이나, 고장마다 다 다르면서 즐겁게 쓰는 수많은 말을 고루 살펴서 갈무리하지 않는다면 한국말은 제대로 숨을 쉬기 어렵습니다.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고장마다 서로 아끼는 마음을 북돋우자면, 서울에서는 시골말을 가르쳐 주고, 전라도에서는 경상말을 가르쳐 주며, 경상도에서는 전라말을 가르칠 수 있어야지 싶어요. 먼저 말부터 즐겁게 살피고 알 적에 서로 마음을 넉넉히 나누는 길을 틀 테니까요. 이제는 '서울 표준말'을 내려놓고 '서로 아끼며 싱그러이 숨쉬는 오래되고 새로운 말'을 바라볼 수 있기를 빕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글쓴이 누리집(http://blog.naver.com/hbooklove)에도 함께 올립니다.



태그:#숲에서 짓는 글살림, #숲말 , #한국말, #우리말 살려쓰기, #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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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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