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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내내 내게 말을 건다. 내가 나에게 해야 할 말들, 알고는 있으나 잊었던 말들을 이 책 속에서 발견한다. 밑줄로 확인하며 다짐해야 하는 말들을 숱하게 본다. 오늘도 거뜬히(!) 자리에서 일어 날 수 있다는 이유로 까맣게 잊고 사는 말들. 병을 얻어 극심한 고통 앞에서 비로소 되새김질 하게 되는 말을.

저자인 26살 여성이 오른쪽 난소에서 20센티미터나 되는 '경계성' 종양을 발견했을 때 그녀는 대상조차 알 수 없는 노여움과 원망의 응어리를 마주해야 했다. 온갖 생각들이 뒤엉켜 소용돌이 칠 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컥컥 울면서 병원을, 그것도 무조건 '큰' 병원을 찾아가는 것밖엔.

처음에는 세상을 향해 따질 듯이 "원망과 화가 뒤엉킨 질문들이 고함처럼 내 안에서 터져 나왔다. 그러나 누구도 답해 줄 사람이 없었고 길을 잃은 질문들은 차가운 하늘에 깃발처럼 나부꼈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동일하다. 누구에게나 여기까지는 같을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그 다음부터 달랐다. 그 과정이 농밀한 자기와의 대화 형식으로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겼다. 몰인정하고 건조한 병원. 수술하라는 한 마디 외에 환자의 연이은 질문에는 "네에~", "네에~"를 연발하면서 환자기록 화면만 바라보면서 왜 이리 귀찮게 하냐는 듯 건성인 의사. 저자는 결단한다.

"몸 전체를 조화롭게 연결된 하나의 유기체로 보지 않고 부위별로 나눠서 따로 판단하고 바꾸거나 없애는 것, 몸이 가진 자생력과 치유과정을 병증으로 보고 무력화시키는" 의사와 결별한다.(25쪽)

이 결단이 쉽지 않은 것임을 알아야한다. 건강할 때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병들면 병원에서 약물에 의지하여 지루하게 사느니 어디 숲 속에 들어가서 곡기를 끊고 <스코트니어링>처럼 맑고 곱게 생을 마쳐야지'라고 하지만 정작 병이 들면 이런 판단과 정신 자체가 흐려진다. 숲으로 들어가야 할 시점인지 자꾸 지연된다. 이것만, 이번만, 마지막으로, 혹시 모르니까 등을 연발하며 숲으로 들어 갈 시점을 놓치고 만다.

스물여섯 처자는 병원을 나서서 어디로 갔을까. 딸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한결같은 엄마의 지지에 힘입어 서울을 떠나 고향인 통영으로 내려와 엄마와 함께 자연치유의 길을 간다. 그 과정이 이 책의 백미인 자기와의 적나라한 대면이 시작되는 내용들이다.

생채식과 단식, 소식과 절식을 하면서 허기와 직면한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경험을 갖지 못하는 현대인들은 허기가 무엇인지 모른다. 현대인들은 배고파서가 아니라 맛이나 재미, 심심풀이로 끊임없이 먹는다. 앉아서도 서서도, 들고 다니면서도 먹는다. 저자는 배고픔을 생생하게 바라보게 된다. 그것이 삶에 대한 의지이자 동력임을 본다. 자신을 격려하는 몸의 응원 소리라고 읽어낸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피부가 변하고, 습관이 변하고, 두통이 변하고, 체질이 변하고, 체형까지 변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거울 앞에서 알몸을 제대로 본다. 섬세한 감각으로 발견한다. 평소에는 관심조차 없던 곳에 시선이 가 닿자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저자의 깨우침은 책의 모든 페이지에 고스란히 담겨진다. 살이 빠져 날씬해진 몸매를 보고 "괜찮아 보이는데?" 하다가 금방 "그게 아니지. 살아 있어서 고마워. 몸과 마음 즐겁게 건강히 살아야지"라고 되뇐다.

무겁고 칙칙한 악몽에 시달리다 깨어나서도 그 악몽에 끌려 다니지 않고 꿈속의 땀과 비명과 눈물이 자신의 어둠과 무거움을 떨쳐내기 위한 치유 과정이라면서 자신을 격려한다.

자작가수인 저자 '예슬'은 해외공연을 위해 대만에 체류하던 중 음식을 잘못 먹어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간 적이 있다. 의식을 잃다시피 했고 죽음이 코앞에 어른거렸다. 오토바이에 실려 병원에 실려 갔다. 이런 큰 소동을 빚은 저자는 감사하게도 다시 '깨어났다'고 술회한다.

깨어나다. 깨우침. 알아차림. 깨닫다. 이런 경지는 의식의 차원을 넘어가는 경계다. 삶의 모든 고비에서 우리는 깨달음의 기회를 만난다. 곤란과 위기를 통해서만 깨달음은 온다. 그러나 대부분 그걸 놓친다. 깨달음은 고통과 압박의 이면에 숨어서 오기 때문이다. 저자의 책이 갖는 핵심은 바로 이 부분으로 보인다. 갖은 곤란 앞에서 그것을 수용하고 '깨어나는' 과정으로 승화하는 장면이다.

식욕, 구겨진 감정들, 성욕과 애정욕, 수면욕, 숙성되는 시간, 자신에게 질문하는 시간, 물꼬를 트는 시간, 자신을 배우고 확장하는 시간 등을 별도의 꼭지로 만들어 하나하나 자신과 만나나가는 대목이 있다. 그러면서 도달한다. 욕망이란 무엇인가. 욕망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무엇인가. 욕망을 없애거나 욕망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섬세하게 알아차리고 그것과 함께 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저자가 자연치유 센터에서 막무가내인 중학생을 만나 짜증이 나는 대목이 있다. 종일 스마트폰에 코를 박고 게임만 하는 아이다. 밥을 먹고 숟가락을 던지면 설거지도 않고 청소도 않는다. 뭐라 얘길 하면 힐끔 쳐다만 보고 마냥 태평이다. 짜증이 나면서 저자는 바로 깨닫는다. "아. 내가 쟤를 질투하고 있구나"라고.

늘 야무지다느니 예의바르다느니 똑똑하다느니 잘 챙긴다는 말만 듣고 자라서 한 치라도 벗어나면 안 된다는 강박에 묶였던 자기를 본다. 저렇게 한 번도 해 보지 못해서 부러운 마음에 질투하는 것이라고 자신의 짜증을 식별한다.

책을 읽다보면 한 권의 시집을 읽는 느낌이 든다. 절제된 표현들과 압축된 언어들. 감각이 살아 숨 쉬는 어휘들. 여전히 종양과 함께 살아가는 저자. 책의 제목처럼 고통을 살아있는 따뜻한 감각이라고 말하는 저자. 저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슬아. 엄마 아빠 다 잘 계셔? 너는 이제 좀 어떠니? 네가 이런 고비를 겪었다는 걸 전혀 몰랐어."

저자는 그때처럼 "아버님~" 했다. 코흘리개 14살 때에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때는 선생님들이나 학부모들이나 다들 누구누구 아버님이라고 불렀다. 저자는 내 딸과 친구다. 같은 학교를 다녔던 친구다. 중학 과정인 '실상사 작은학교'.

책 뒤에 있는 저자의 노래시디(CD)를 돌릴 시디드라이버가 없어서 오늘 문자를 보냈다. 혹시 mp3 파일이 있는지를. 노래를 들어보면서 그녀의 선택과 용기에 다시 박수를 보내고 싶다. 종양과의 사이 좋은 동거를 축하하고 싶다. 책은 엊그제 병원에 다녀 온 이웃에 빌려줬다. 예슬이를 만나면 서명을 받아야지.

덧붙이는 글 | <고통이라는 따뜻한 감각>(예슬. 들녘. 2017년 4월. 12,000원)



고통이라는 따뜻한 감각 - 몸의 신호에 마음을 멈추고

예슬 지음, 들녘(2017)


태그:#고통이라는 따뜻한 감각, #예슬, #자연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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