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은 갈등을 유발하고 드라마의 활력을 불어 넣는 강력한 카드 중 하나다. 각종 악역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지금 방영되고 있는 월화드라마 <역적-백성을 훔친 도적>(이하<역적>), <완벽한 아내><귓속말>에 등장하는 악역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악역들은 조금 특별하다. '사이코 패스'에 가까운 캐릭터로 주인공 이상의 존재감을 발휘하기에 그렇다. 사실상 세 드라마 모두 악역의 힘을 밀어 붙이는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역적> : 사이코 패스 연산군

 <역적>의 연산군, 김지석

<역적>의 연산군, 김지석 ⓒ mbc


<역적>은 3사 월화 드라마 중 가장 스토리의 결이 매끄러운 편이다. 시의성을 반영하여 권력에 대항하는 힘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감정을 파고든다. 영웅이 되어가는 홍길동(윤균상 분)은 백성에 대한 긍휼한 마음으로 그들을 돕고자 하고 그런 백성들의 반란을 폭동으로 여기는 연산군(김지석 분)은 절대 권력을 가진 기득권층으로 대표되며 절대 악으로 묘사된다.

연산군은 수많은 드라마에 등장한 캐릭터다. 폐비 윤 씨의 사사,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등 드라마를 수 놓을 수 있는 극적인 사건들에 연루돼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김지석의 연산군은 광폭한 폭군으로 묘사되었던 연산군의 계보를 잇고 있지만, 단순히 어떤 계기로 인해 폭군이 되었다기 보다는 애초에 보편적인 감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이코 패스' 기질이 있는 것처럼 묘사된다.

'인간 사냥'을 통해 홍길동의 몸을 부수는 연산군의 표정에는 죄책감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다. 인간을 사냥하며 짐승 취급하는 그의 모습은 그의 내면이 짐승과 다를 바 없다는 걸 엿보게 한다. 서늘하고 소름끼치는 감정표현으로 김지석은 '인생 캐릭터'를 만났다는 평을 듣고 있다.

사람 죽이는 일을 놀이 취급 할 만큼의 사이코 패스적 성격을 보여주면서도 김지석의 연산군은 초조한 심리까지 갖추고 있다. 드라마 후반부에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완벽한 아내> : 속을 알 수 없는 사이코

 <완벽한 아내> 속 조여정

<완벽한 아내> 속 조여정 ⓒ kbs


<완벽한 아내>는 후반으로 갈수록 모호한 스토리로 뒷심을 잃어버렸지만, 이은희 역할의 조여정만큼은 끝까지 중심을 놓치지 않는다. 이은희는 극 초반부터 웃음을 가장하고 있지만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캐릭터로서 극의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조여정은 이 이해하기 힘든 캐릭터를 시청자들에게 설득시킨 일등 공신이다. 주인공 심재복(고소영 분)의 이혼에 기뻐하다가도 언뜻 보이는 서늘한 표정은 이 캐릭터의 심리 상태를 제대로 표현해 낸 것이었다.이은희의 정체를 숨기면서도 그 캐릭터가 안에 숨겨진 정상적이지 않은 자아를 표현해 내는데 조여정은 더할나위 없는 적역이었다.

이은희는 주인공 심재복 보다 훨씬 더 주목도가 높다. 이은희가 벌이는 사건이 큰 중심 축이기 때문이다. 종영을 앞두고 정신병원에 심재복과 이은희를 가두는 등 다소 어이없는 전개로 간 건 아쉬운 부분이지만 그 안에서도 조여정은 소름끼치는 연기력을 선보였다. 불안한 정신상태로 다른 사람을 상처입히며 즐거워 하는 '사이코' 캐릭터는 <완벽한 아내>의 최고의 수확이라 할 수 있다.

<귓속말> : 물불 가리지 않는 사이코

 <귓속말> 속 권율

<귓속말> 속 권율 ⓒ sbs


이보영, 이상윤 주연에 박경수 작가가 집필하여 화제가 된 <귓속말>은 작가의 색채가 짙게 배어 나오지만 전작들에 비해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사건은 사건의 꼬리를 물고 연속적으로 터지지만 반복되는 위기 상황 속에서 긴장감은 오히려 줄어든다. 강약 조절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 탓이다.

특히 이보영이 연기하는 신영주 캐릭터에는 오류가 많다. 아버지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고, 불치병까지 걸린 마당에 복수심에 불타는 것은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너무 앞뒤없이 사건에 덤벼드는 탓에 오히려 사건 해결에 걸림돌이 되고 만다. 뚜렷한 대책이나 계획 없이 무작정 달려드는 여자 주인공의 행동은 오히려 시청자들의 호감도를 떨어뜨리는 걸로 작용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악역 캐릭터인 강정일(권율 분)과 최일환(김갑수 분)이 주목받고 있다. 강정일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살인까지 저지르는 인물로, 자신이 가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빼앗기자 점차 괴물이 되어간다. 어떻게 보면 사랑 때문에 저지른 악행이지만, 그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 씌우고, 뜻대로 안 되자 분노하는 모습은 결코 인간적이지 않다.

그러나 악역의 심리와 고뇌를 놓치지 않는 스토리 라인 덕분에 '섹시한 악역'으로 거듭나고 있다. 강정일을 연기하는 권율 역시, 이 드라마로 그동안의 순수하고 착한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연기 변신을 인정받고 있다. 다른 두 드라마 보다 감정적으로 절제된 캐릭터지만 어쩌면 주인공보다 더욱 주목받는 악역이라 할 수 있다.

 <귓속말> 속 김갑수

<귓속말> 속 김갑수 ⓒ sbs


그 뒤에 있는 절대악 최일환은 <귓속말>에서 가장 큰 사건을 만들어 내는 최종보스격 악의 축이다. 최일환은 신영주의 아버지 사건을 조작한데 이어서 이제는 강정일의 유일한 혈육이었던 강유택(김홍파 분)마저 살해했다. 자신의 이익과 성공을 위해서라면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는 그의 캐릭터가 주는 무게감은 드라마 전반을 짓누르고 있다.

강정일이 괴물이라면 최일환은 악마에 비견된다. 김갑수의 뛰어난 명불허전 연기력은 캐릭터의 존재감을 키우며 절대권력을 가진 가장 강력한 벽으로서의 역할을 확실하게 해낸다.

악역의 공통점

지금 주목받고 있는 악역들은 단순히 감정을 쏟아내며 악행과 거짓말을 서슴지 않는 게 아닌,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감정을 포기한 캐릭터들이다. 잘못을 하지만 실제로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남들 고통에 대한 이해는 없으며 자신이 처한 고통은 참지 못하는 '사이코 패스'가 악역의 대세로 떠오른 것이다.
 
이런 악역들이 주목받고 그 캐릭터를 연기하는 연기자의 인기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은 시청자들이 그들에게 감정이입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생활에 마주칠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닌, 무지막지한 '사이코' 캐릭터들은 '역할'로서 각인될 수 있다. 그런 캐릭터를 소화해 내는 배우들에 대한 찬사 역시 경험하지 못한 영역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능력에 대한 놀라움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악역에 힘을 지나치게 실어준 나머지 스토리 구조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도 적지 않다. 주인공의 존재감이 약해지는 것은 물론 캐릭터의 붕괴 역시 일어날 수 있다. 주목받는 악역을 만들어 내는 것 보다 그 캐릭터를 스토리 안에서 어떻게 잘 공존시켜 나갈 것인지를 먼저 고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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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아내 귓속말 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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