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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길이 깔리는 곳마다 삶과 꿈이 부서져 나갔다 (1)(2)(3)

우리 곁, 살아 숨쉬는 최순실의 분신들
17.04.26 16:15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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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생나무글(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철길이 깔리는 곳마다 삶과 꿈이 부서져 나갔다 (1)

어린 새싹 공동체

나는 시골교회 목사다.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에 내려 온지 8년차, 아무것도 몰랐던 27세 하룻강아지에겐 꿈이 있었다. 자립과 공생, 생명 중심의 가치를 실천하는 건강한 농촌마을로의 회복, 그리고 거기서 건강한 나라를 이끌 인물들을 길러내는 것. 그 일에 평생을 바칠 각오로 대학원 졸업과 함께 내려왔다. 그러나 낯설기만 한 이 곳, 그것도 유불교 문화 전통의 뿌리가 깊어 젊은 여성은 무시의 대상, 유기농업 보급률 전국 최하위권(2%이하)인 곳에서 나의 꿈을 나누면 비웃음만 당하였다. 마을 잔치, 이미용 봉사, 의료봉사 등 수많은 섬김과 만남을 통한 대화를 시도하였지만 고마운 마음과는 별개로 여전히 무시의 대상이었다. 그래도 좋았다. 꿈이 있으니까.

빛마을 첫 개척지 첫 둥지를 틀었다가 쫓겨나온 월세집 ⓒ 이희진

그러면서 마을 어린이 17명이 모여 함께 꿈을 가꾸어가던 중 월세집 주인이 갑자기 월세를 2배로 올린다고 하여 다 쓰러져가던 집으로 쫓겨나 이사를 가게 되었고, 우울증과 자살충동에 시달리던 1명의 청년 외에는 모두 떠났다. 그러나 꿈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 한 사람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나를 보며 더 기도하며 삶을 쏟아 그를 돌보았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개척 3년 차 되던 해 기적은 일어났다. 적합한 곳을 찾아내 땅을 구입하고 안정적인 터전이 될 교회를 짓게 되었다. 누군가가 은퇴 선물로 드리겠다는 외제차를 포기하고 빛마을교회의 꿈을 이루기 원하신 목사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2번째 살았던 석면슬레이트 흙집 닭이 살고 있던 곳을 치우고 한 사람과 공동체 생활하며 마을을 섬겼던 곳 ⓒ 이희진

건축물 대장상으로는 종교 시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나와 공동체 식구들이 농촌에 뿌리내리기 위하여 함께 생활하는 곳이다. 대안학교 꿈을 위해 학업을 하는 가운데 도시에서 만난 청년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다. 생명을 돌보며 더불어 사는 공동체가 이 문명의 독을 해독하는 대안이라고 생각했기에 우리는 그렇게 함께 땀 흘리고 일하며 나누고,  찾아오는 이들을 정성으로 섬기며 꿈을 키웠다. 이 삶의 현장에 기적이 일어났다. 문명에 길들여진 삶, 욕망의 지배권 아래 소비적이던 삶에서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이던 우리가 먹거리를 직접 생산하여 먹고, 살림과 노동 훈련을 통하여 자신의 삶을 책임질 뿐 아니라 생명(어린이, 장애인, 동식물)을 돌보는 사랑의 존재로 변화되고 있다. 그 삶에서 두피건선, 자궁내막증식증과 같은 육체적 난치병이 치유되고, 아스퍼거 증후군과 조현병(환청증상)이 완화되었다. 그저 믿음과 사랑으로 단순하게 산 삶이 준 선물이다. 공동체 와해의 위기도 있었지만 그 때마다 기도하면 서로가 더 사랑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미안한 마음을 주셨고, 그렇게 우리는 점점 한 가족이 되어갔다. 그리고 맡겨진 어린이와 장애인도 함께 어우러져 삶을 꾸릴 줄 아는 공동체가 되어가고 있다.
우리 공동체 건강한 농촌마을 재생을 고민하며 공동체 생활하는 청년들이 산촌유학 온 어린이 2명과 마을 어린이들, 정신지체 장애인을 돌보며 함께 살아간다 ⓒ 이희진

짓밟힌 삶 1.
그러나 이제서야 안정적인 생활터전을 마련하여 교회를 신축한지 2년도 채 되기 전 2015년 5월, 철도시설공단으로부터 공문 하나가 날아왔다. 중앙선 복선전철화(도담~영천 4공구) 사업으로 교회부지와 건물 전부가 철도부지로 편입된다는 것이다. 뭐지? 마을에서 한동안 철길이 새로 난다는 소문이 돌긴 하였지만 교회와는 거리가 먼 곳에 예정된 것으로 알고 있었고, 교회는 1년 5개월 전 영주시청 건축과를 통하여 건축허가와 준공승인이 된 곳이기에 안심하고 있던 터였다. 그래서 문서를 받았어도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아 반신반의하였다. 그러나 곧 낯선 사람들의 방문이 이어졌다. 그들은 전략적으로 움직였다.

현재 우리들의 집이자 교회 전경 종교생활과 함께 귀농을 준비하는 청년들이 함께 생활하며 경제적 자립을 도모하는 생활터전이기도 하다. ⓒ 이희진

철길이 깔리는 곳마다 삶과 꿈이 부서져 나갔다 (2)

토지보상에 있어서 상대하기 어려운 상대가 재개발-> 시나 구에서 하는 사업 -> 수자원공사, 전력공사와 같은 공기관 -> 마지막이 철도와 원자력개발과 같은 기간 산업 순이라고 한다. 스물일곱, 농촌에 내려와 자립과 공생의 가치를 실천하는 대안교육 공동체 건설에만 매진해왔던 나는 그런 사정에 밝지 못하였고, 모든 것이 끝나가는 지금에서야 상황이 파악된다. 혹, 토지보상을 당할 일이 생기신다면 다음의 로드맵을 참조하시라. 그리고 절대 우리와 같은 피해를 입지 않으셨으면 한다.

작전1. 안심시키기
교회 주변으로 관계자들이 지나다니며 살갑게 인사를 한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국가가 하는 일이니 터무니없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믿고 기다리면 된다." 그 말을 들으며 염려되는 마음을 달랬다. 그래, 국가가 하는 일이니 설마... 그러면서 교회 이전할 부지를 찾아다녔다. 겨우야 자리 잡은 곳에서 갑자기 나가야한다니, 그리고 그 지옥 같은 건축을 다시 또 해야 하다니 말로 표현하기 힘든 심적 부담이 있었지만 철길을 돌릴 수는 없으니 현실을 받아들이려 마음을 추스렸다. 우린 젊으니까. 그리고 꿈이 있으니까. 빈손으로 쫓겨나는 것도 아니고 길이 있겠지. 서로 위로하며 놀랜 가슴 가라앉혔다. 그러나 인근 부동산 가격을 알아볼수록 2년 전 건축할 때보다 기본 2배에서 많게는 3-4배 올라 있었다. 인근 수몰지역 사람들이 몰리고 지척에 국고 200억을 쏟아 붓는 무섬마을 테마파크 조성 때문에 주변의 땅값이 치솟은 것이다. 그나마도 적당한 부지가 나오지도 않았다. 그런데 막상 감정평가결과를 받고 보니 토지보상액은 3년 전 매입할 당시와 다를 바 없었다. 현실적으로 이전이 불가능한 조건이다. 너무나 황당하여 그제서야 알아보니 토지 보상액은 일방적으로 사업고시를 한 날짜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실제로 이전해야 하는 시점의 지가를 절대 따라갈 수 없다. 이에 대하여 구 건설교통부에서 상당기간 토지수용법령을 직접 운영하였던 류하백 법률학자는 보상대상 주민에게는 개발이익을 배제한 보상액을 지급하고 결과적으로 소수 개발 주체만 이익을 독점하게 되는 현행 토지보상제도가 총제적으로 위헌이라고 한다. (『토지수용사건에서의 헌법소원판례평석』 2009) 이렇게 현실적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법 때문이었다. 1962.1.15 제정당시의 토지수용법에서는 인근토지의 거래가격을 고려한 적정가격으로 손실보상액을 산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제46조) 그러나 2,3차 개정하면서 기준지 공시지가에 의하여 산정하도록 강제하는 것으로 오히려 퇴보하였다. 그나마 노무현 정부에서 기준지 실거래가로 다시 조정하였다고 하지만 보상받고 이주하는 시점이 아닌 고시할 당시의 가격으로 고정하다보니 당연히 1-2년 후 보상을 받고 나가야 할 사람이 인근에 다시 자리를 잡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투기를 막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그런 여력을 가진 사람들은 극소수다. 그들을 막는답시고, 보상대상의 90% 이상 되는 지역주민들까지 피해를 입어야 한다니 불합리한 제도이다. 이는 개발독재로 대표되는 한국의 왜곡된 경제정책과 그 궤를 같이한다. 국가와 소수 기업이 개발이익을 독점하여 점점 배를 불리고, 주민들은 피땀흘려 가꾸어놓은 삶의 터전을 빼앗기면서도 현실적 보상을 받을 수 없는 것이 이 나라 법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알 턱 없었던 우리는 감정평가 결과가 나오기까지 안심시키는 그들의 말만 믿고 기다렸다가 비현실적 결과 앞에 망연자실하였다. 그 와중에도 우리는 꿈을 놓지 않았고, 교회에 귀농교육을 유치하여 이수하였다.

1년에 걸쳐 귀농교육을 받고 이수한 공동체 식구들 생태친화적 삶, 적정기술, 농사의 기초, 농촌 현실, 귀농인의 삶 등을 배우며 우리의 꿈을 구체화시켜나가고 있다. ⓒ 이희진

작전 2. 은근한 협박으로 절망감 조성하기
당시 담당자는 지장물 조사를 도둑처럼 슬그머니 하고 갔다. 토지소유주에게 안내도 없이 사진까지 찍어 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지장물 조사가 이루어지는 순간부터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지장물 조사를 허락하였다는 것은 내 소유권을 국가에 넘기겠다는 의미로 해석되어 이후로는 협의의 가능성은 최소화되고 일방적인 강제수용의 법적 절차가 시작된다. 영문도 모르고 지장물 조사를 당한 우리는 또 다시 우편물이 날아와 지장물 조사를 했으니 이의가 있으면 신청하라는 안내에 담당자를 찾아갔는데 공란에 싸인을 해야만 된다는 식으로 안내하여 얼떨결에 싸인을 하고 말았는데, 이것 또한 소유권을 넘겨주는 절차였다. 나중에 이를 알게 되어 속상한 나머지 따지려 하였지만 이미 담당자는 바뀌어 있었다. 억울하지만 책임을 물을 사람이 없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분 중에 국가로부터 토지가 수용될 상황이라면 무조건 지장물 조사부터 막아야 한다. 그래야만 그나마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있어 시행사와 협상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우리는 순진하게도 그들을 믿었고,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하다가 그 소중한 기회를 놓쳤다. 사회경험이 부족한 청년들이었던 탓이다. 평가 결과는 참담 그 자체였다. 신축비용의 70%도 안 되고, 땅값은 3년 전 매입할 때 가격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지장물들도 이설비만 책정되는데, 실제로는 이설이 불가능한 액수다. 더 황당한 것은 우리 교회는 엄연히 18명이 함께 생활하고 있지만 비영리 기관이라는 이유로 이전하는 기간에 발생되는 기회손실비용이나 임시거처 규정도 없고, 이주대책대상에서도 제외되었다. 몇 번이나 민원을 제기하고, 실거주사실 확인이 가능한 서류까지 제출했지만 소용없었다. 모든 물건 포함, 18명의 이사비용이 겨우 100만원.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꿈과 삶을 산산조각 내고 발가벗겨 내쫓기는 느낌이다, 그런데도 철도시설공단 측은 협의 같은 건 한 번도 해오지 않았다. 이미 지장물조사도 끝난 상태고 서류상 법적으로는 하자가 없기에 아쉬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답답한 마음에 몇 번이고 찾아가 이의를 제기하고, 민원을 넣었지만 돌아온 답은 "한 번 평가된 것은 거의 달라지지 않는다. 게다가 국가를 상대로 절대 이길 수 없으니 빨리 포기 할수록 좋다, 그렇지 않으면 어차피 강제 수용된다."는 은근한 협박을 관계자 모두로부터 반복하여 들어야 하였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큰 것도 아니고, 현재와 같은 땅과 이만한 건물만 지을 수 있으면 당장이라도 옮기겠다. 그러나 이것 가지고는 부지구입만도 어렵다, 당장 18명이 어디로 가서 살아야 하는가 생활의 근거지를 잃게 되니 현실적인 보상과 임시거처 제공을 원하였지만 오히려 과욕을 부리는 사람으로 취급하였다. 이들과의 관계에선 인간 대 인간의 관계가 없다. 모든 것은 서류로 처리해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적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을(녹취, 내용증명) 남겨야만 한다. 슬프지만 이것이 이 사회에서 살아남는 길이다.

작전 3. 초기 주민규합 실패, 무방비 상태로 만들다.
알고 보니 사업계획이 발표된 초기에 부시장과 대책위원회가 보상협의회를 통하여 주민들의 권리를 찾도록 적극적으로 나서야 했지만 소극적이었을 뿐 아니라 대책위원회 관련자들은 초기 법률적 자문을 거부하였다. 그리고 지장물 조사를 거부하자는 일부 주민들의 의견도 무시하고 오히려 일단 감정평가부터 받아보자는 쪽으로 끌고 갔다. 아직 결과도 받아보지 않고서 지나치게 대응할 필요가 있겠냐는 대책위원회 임원들 말에 대다수 주민이 반응하였다. 점잖은 양반 문화와 체면문화, 국가에 대한 충성이 강한 지역 정서 때문인지 오히려 초기 지장물 조사를 거부하였다가 주변에서 욕을 먹었다는 사람까지 있었다. 그렇게 대책위원회 모임은 흐지부지되었다. 그리고 전체 지장물 조사가 허망하게 일어났고, 이미 협상의 주도권을 빼앗긴 상태에서 헐값으로 평가된 감정평가 결과 앞에 모두가 분통 터져하였지만 아무 말도 통하지 않는 현실의 벽 앞에 하나둘 포기하기 시작하였다. 거기에 이런 주민들이 우습게 보였던지 주민들이 선정한 감정평가사마저 관에서 임명된 감정평가사와 다를 것 없이 평가한 최악의 케이스. 혹, 주민 선정 감정평가사를 세우실 때는 반드시 주민 편에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확약서를 받아 두어야 한다. 우리는 그 종이 한 장이 없어 그 평가사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다. 선정해달라고 주민 서명 받을 때에는 굽신거리던 그가 업무가 끝난 후에는 억울하여 따져 묻는 주민들에게 오만하게도 폭언으로 답한다. 이 모든 것이 주민 편에서 싸워주어야 할 주민대책위원회, 영주시청, 이들이 제 구실을 못하였고 무엇보다 그것을 방치한 우리의 순진함, 혹은 무관심함 때문이다. 덕분에 각자 그 거대한 힘이 휘두르는 폭력을 온 몸으로 맞아내야 했다.

작전 4. 공익사업이라는 명분으로 밀어붙이기.
화를 내고, 호소하고, 무엇을 해도 한 번 정해진 감정평가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는 담당자들. 그리고 정해진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협의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중앙토지수용위원회에 넘기게 되는데 이때에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공탁을 걸어놓고 국가가 소유권을 가져갈 수 있는 것이 이 나라 법이다. 강제수용. 이와 같이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절차가 법으로 보장될 수 있는 것은 이것이 공익사업이기 때문이다. 주민 권익을 위한 조정기관인 중앙토지수용위원회나 재판부도 공익성의 명분으로 인하여 절대적으로 그들의 손을 들어주곤 한다. 국민 다수의 이익을 위하여 소수의 주민은 희생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논리다. 이제야 모든 것이 명쾌해졌다. 그동안 그들이 그토록 자신감 있게 주민 협의를 거부하고, 일방적으로 처신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공익성이라는 절대적 명분이 있고, 그것을 법과 관련 기관들이 보장하여 주기 때문이다. 또한 영주시청이 왜 소극적이었는가를 살펴보니, 영주시를 교통물류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해 스스로 복선전철화 사업을 제안하고 추진하여 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철도공단이 정말 공익을 위하여 봉사하는 기관인가? 철도공단은 지금 탄핵국면의 혼란한 틈을 타서 철도 민영화를 추진하고 있었다. 현재의 적자를 메꿀 수 있는 알짜노선을 대형 건설사와 기업에게 넘기고, 이후에 수익구조가 더욱 악화되면 자연스럽게 철도 민영화가 추진 되도록 하려는 포석을 놓는 중이다. 무소불위의 막강한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던 그 공익성을 스스로 포기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주민들에게는 최저보상을 강요하는 현실, 철도공단에도 최순실이 있는가? 그럴듯하게 포장된 공익성의 명분 밑에는 수많은 약자들이 짓밟히고 있다.

철길이 깔리는 곳마다 삶과 꿈이 부서져 나갔다 (3)

짓밟힌 삶 2.
장애인 아들을 위한 우사 앞에서 노부모님과 함께 이곳은 그의 생활과 생업의 터전이다 ⓒ 이희진

그는 정신지체 2급 장애인이다. 어릴 적 총명하였던 그가 산으로 끌려가 폭행을 당하였다. 아들이 버려진 것을 엄마가 겨우 찾아냈다. 그는 이미 뇌를 다쳐 지적 장애와 반신 마비 증상을 가지게 된 상태였다. 가해자를 찾아낼 수도, 처벌할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그가 중년에 이르기까지 노부모의 고민은 자신들이 죽은 뒤 아들의 생계다. 사회에 나가 할 만한 일도, 할 수 있는 능력도 없어 그 아들을 위하여 20년 전 우사를 짓고, 소여물 주는 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똑똑한 필리핀 여성을 아내로 맞게 하여 가정도 꾸렸다. 예쁜 딸도 낳았다. 우사는 그들의 생계수단이며 그 앞에 지어진 작은 집은 장애인 아들 가족의 생활터전이다. 이런데 이 집과 우사가 함께 철도부지로 편입된다. 구제역 때문에 지역 내에서 새로운 우사를 짓고 허가받는 일은 하늘의 별따기다. 그래서 폐업을 할 수 밖에 없는데, 황당하게도 폐업보상 항목이 없다며 이주비만 지급하겠다고 한다. 이 집도 현재의 보상가로는 인근에 부지 구입도 어렵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대안도 없이 생계수단과 생활터전을 잃게 되었다. 그들이 누려온 작은 행복이 부서져 나갔다. 여기도 현실적으로 나갈 수 없어 버틸 뿐인데 강제수용이 가능한 수용재결을 앞두고 있다. 게다가 바로 옆 산에서 아무 보호 장치도 없이 이루어진 토목공사와 터널 발파 소리로 그 해 송아지가 3마리나 괴사되고, 인공 수정율도 예년과 다르게 현저히 떨어졌다. 이런데도 손해배상 안내 같은 것도 없이 막무가내로 공사를 강행한다.

짓밟힌 삶 3.
그녀는 자동차 부품 대리점을 운영한다. 그녀 집 가까운 곳에 토지보상 전문 행정사가 살고 있어 수차례 만나고 설명도 들었다. 그러나 결국은 의뢰하지 않았다. 대책위원회의 제안과 행정사의 안내가 달랐고 그녀는 대책위원회를 더 믿었다. 그러나 막상 감정평가를 받았는데 사업 손실보상까지 합쳐도 인근에 토지, 그것도 현재의 절반으로 줄여도 살 수 없는 수준이다. 그 정도로 터무니없는 결과에 폐업보상을 요구했지만 앞서 우사의 경우처럼 규정이 없어 폐업보상은 불가능하다는 답변만이 돌아온다. 그녀도 그저 버티고 있을 뿐이다.

짓밟힌 삶 4.
심지어 교회 바로 옆, 산에서 돌을 깨고, 흙을 퍼 날랐던 현장의 토지주는 사용승낙을 한 적도 없는데 문화재 조사한다고 해놓고는 공사를 했다. 단 한 번 시공사 부장이 서울까지 올라와 문화재조사 동의서에 도장을 찍어달라고 하여 자신의 땅은 건드리지 않는 것을 다짐받고 도장을 찍어주었다. 그런데 얼마 전 고향에 내려와 보니 자신의 소유지가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무슨 해괴한 일인가 싶어 시공사 부장에게 항의를 하였다. 그러나 기다려달라는 말만 믿고 있던 그는 이미 강제 수용시점에 와있다. 그런데도 시공사 부장은 자신이 책임져 줄 것처럼 안심시킨다. 수용재결이 된 다음에는 책임질 수 없는데 말이다. 그러면서 지금도 그 땅에서 공사가 계속 진행되고 있다. 안타까운 건 지금이라도 빠르게 조치하여 권리를 찾으라는 권면보다 시공사 부장의 말을 더 신뢰한다.

교회 옆 직선거리 6m 산에서 산촌유학 온 어린이가 아침에 스쿨버스를 타는데 그 옆에서 아무 보호장치 없이 공사를 강행하였다 ⓒ 이희진

짓밟힌 삶 5.
왜 시공사는 이렇게까지 무리하게 공사를 진행하는가? 알고 보니 이 곳 도담~영천 4공구는 최저가 발주 계약된 곳이다. 정상적인 공사비용이 100만원이면 7-80만원에 해보겠다고 최저가를 써낸 업체가 낙찰 받는 형태이다. 이는 벌써 5~6년 전부터 공사업체에 부담만 지우고, 부실공사 위험을 키운다고 하여 꾸준히 문제가 제기되어 왔던 방식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정부에서는(특히 기획재정부) 오히려 공공건설에 있어서 최저가발주의 범위를 더욱 확장하여 가고 있다.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보상의 주체인 철도공단은 협의에 있어서 멀거니 남의 일 보듯 하고, 왜 시공사 부장과 직원들이 더 적극적으로 찾아와 좋지만은 않은 방식으로 주민들을 대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런데도 오히려 철도공단은 자신들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으니 공사업체에서 알아서 빨리 진행되게 하라며 오히려 큰소리를 친다. 알고 보니 주민들을 압박하고 있던 그들도 이 부조리한 구조 속에서 갑질 당하는 피해자였다. 공단의 공무원 역시 주어진 최소의 금액으로 보상절차를 빠르게 끝내야 승진하니 수단방법 가리지 않게 되는 구조다. 직무에 충실할수록 인간의 마음을 포기해야 한다니 너무 슬픈 우리들의 현실이다.

그래도 꿈을 꾸자.
이처럼 부조리한 구조와 법, 그리고 그 속에서 업무성과를 내기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 담당자들(자주 바뀌어 책임소재도 없는). 이 모든 것으로 인하여 물질적, 정신적으로 가장 큰 부담과 피해는 절대약자, 주민들의 몫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파하고 힘들어하였다. 분노하고, 절망하면서도 국가는 이길 수 없다는 현실의 벽 앞에서 막막해하다가 대다수는 이미 보상을 받아버렸다. 그러나 그들도 박탈감에 시달리는 건 마찬가지다. 이렇게 허망하게도 남아있는 주민 대다수가 수용재결 단계로 넘어와 곧 있으면 철도공단에서는 공탁 걸어놓고 소유권을 가져가는 강제수용 절차로 넘어가게 되어 결과를 기다리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당장 우리도 옆 산에 터널 발파 소리도 커져가고 교회 기초까지 흔들린다. 갈 곳 없어 버틸 수밖에 없는 우리는 아이들이 두려워하고 어른들도 끔찍한 느낌에 임산부도 둘이나 있다고 고통을 호소하였지만 시공사에서는 아직 500-600m 거리가 있는데도 벌써 그러냐며 이제 100-200m 앞으로 오면 교회 건물은 무너질 것이라고 한다.

교회 옆 공사현장 노란색 화살표 방향으로 터널이 발파되어 오고 있고 교회 마당에서 선로가 노출되어 나온다. ⓒ 이희진

여전히 대안은 없다. 속수무책으로 당하다가 관련법을 공부하고, 현실을 알아가면서 점점 더 울분이 치밀어 오른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삶과 꿈을 부수어버린 실체가 무엇인가 궁금하였다. 그리고 알면 알수록 그 법과 구조적인 문제가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철도 보상 담당자와 시공사 부장은 처음에 시골에 웬 청년들이 이렇게 모여 있는가, 우리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진정성을 느끼고 도와드리고 싶어도 이 나라 법이 이러니 어쩔 수 없다, 게다가 탄핵 국면으로 국회에 민생법안이 다 계류되어 있는 상황이고, 용산 참사 시 사람 여섯이 죽었는데도 바뀌지 않았던 보상법이 바뀌겠냐는 것이다. 그러나 어차피 오갈 데 없어 버틸 수밖에 없는 우리, 그 법과 구조 속에서 인간다움을 잃어가는 사람들, 기도하며 다시 한 번 모두가 행복해지는 길을 찾고 싶다. 이 작은 몸짓으로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마는 그래도 생명 품은 작은 씨앗이니, 그 무엇도 막을 수 없는 힘으로 이 굳은 땅을 뚫고 나오리라.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이제, 시작이다.

온라인 서명운동 링크: goo.gl/2BHTLw

서명운동 명부는 법원에 행정소송 시 새로운 판례를 위하여, 그리고 차후 입법제안을 하기 위하여 활용된 후 폐기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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