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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2016년 20, 30대 청년 6명은 시력을 잃었습니다. 파견노동자로 스마트폰 부품 공장에서 일하면서 만졌던 메탄올이 실명을 불러올 줄은 몰랐습니다. '노동건강연대'와 <오마이뉴스>는 실명 청년들에게 닥친 비극과 현재의 삶을 기록하고, 누가 이들의 눈을 멀게 했는지 파헤칩니다. 동시에 연재되는 다음 스토리펀딩에서 시력을 잃은 청년들을 후원할 수 있습니다. - 기자 주

방동근씨는 지난해 상견례를 앞두고 시력을 잃었다.
 방동근씨는 지난해 상견례를 앞두고 시력을 잃었다.
ⓒ 민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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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고의 병원은 아들의 치료를 포기했다. 치료 방법이 없다고 했다. 그 병원에서 나오는 날, 엄마는 숨죽여 울었다.

엄마, 아빠는 손 놓을 수 없었다. 용하다는 한의원을 수소문했다. 아들을 데리고 집에서 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한의원을 매주 찾았다. 

일용직으로 일하는 남편의 빠듯한 벌이에도, 매달 70만 원을 한의원에 쏟아부었다. 지금 살고 있는 단칸방 월세(45만 원)보다 많은 돈이다. 아들을 치료할 수 있다면, 돈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아들은 여전히 앞을 보지 못한다.

아들이 눈으로 보는 세상은 지지직거리는 텔레비전 화면과 비슷하다. 낮과 밤만 어렴풋이 구분할 수 있다. 시력을 완전히 잃은 것이다.

엄마는 경북 김천에서 식당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아들의 실명 후, 일을 그만두고 24시간 아들 옆에 꼭 붙어 있다. 아들은 혼자 옷을 입지도, 밥을 먹지도 못한다. 엄마는 아들과 결혼을 약속한 여자 친구의 사진을 집 곳곳에 붙여놓았다. 사랑의 힘은 아들의 눈을 뜨게 할 수 있을까.

예술학교를 나와 춤과 노래를 좋아했고, 여자 친구와 여행 다니기를 좋아하던 청년이었다. 웃기기를 좋아하고, 엄마한테 살갑던 아들이기도 했다. 그런 아들이 좁은 방에 갇혀 지난 1년을 숨죽여 살았다. 아들의 나이는 이제 스물아홉. 아들은 말한다.

"하루 종일 텔레비전 소리를 듣죠. 밖에 나가도 세상이 까맣고 하니까. 틀에 갇힌 기분이에요. 답답하죠... "

그런 아들을 지켜보는 아버지의 속은 검게 탄 지 오래다.

"앞을 보지 못하니까 말수가 줄었어요. 옆에서 실망하지 말라는 얘기를 많이 해요. '앞으로 연구를 하니 좋은 약일 나올 거다', '눈이 낫게끔 엄마 아빠가 노력하고 있다'고요."

엄마와 아들의 열차 놀이

방동근씨 가족은 금요일마다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한의원에 향한다.
 방동근씨 가족은 금요일마다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한의원에 향한다.
ⓒ 선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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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아산에서 일용직으로 일하는 아버지 방철호(49)씨는 금요일에만 집에 온다. 지난달 31일도 그랬다. 그는 오전 9시 아내 채정순(51)씨와 아들 방동근씨를 차에 태우고 고속도로를 탔다. 1시간을 달려 '눈!! 치료가 됩니다!'라는 홍보문구를 내건 한의원에 닿았다. 

동근씨 눈을 치료하는 유일한 시간이다. 한의사는 침대에 누운 동근씨의 눈 주변에 많은 침을 꽂았다. 채정순씨는 안타까운 듯 아들을 지켜봤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눈 주변에 멍 자국이 가득했어요. 누구한테 얼굴을 얻어맞은 것처럼... 그 모습을 보면 속상하죠."

1시간 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동근씨가 선글라스를 썼다. 동근씨는 열차 놀이를 하듯 문을 여는 채정순씨의 어깨를 붙잡고 따라나섰다. 한 노인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이 모습을 지켜봤다. 타인의 시선을 느꼈는지, 동근씨가 말했다.

"사람 많은 데 가기 싫어요. 아직 용기가 나지 않아요. 어떤 분들은 '눈이 안 보이나' 이러면서 얘기해요. 그런 얘기를 들을 때 기분이 좀 그래요. 밖에 나올 때 일부러 선글라스를 써요. 눈에 초점이 없다 보니 이상하게 보이는데, 눈을 남들한테 보이기 싫어요."

방동근씨는 열차놀이를 하듯 채정순씨의 어깨를 붙잡고 세상에 나선다.
 방동근씨는 열차놀이를 하듯 채정순씨의 어깨를 붙잡고 세상에 나선다.
ⓒ 민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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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도착하니, 점심때였다. 채정순씨는 아들과 기자를 위해 밥상을 차렸다. 채정순씨는 동근씨를 상 앞에 앉히고 밥을 만 갈비탕을 그 앞에 뒀다. 동근씨의 손에 숟가락을 쥐여줬다. 그는 조심스럽게 밥을 먹기 시작했다. 채정순씨는 아들의 입에 반찬도 넣어줬다.

"조금이라도 보이기만 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냥 혼자서 밥만 먹을 수 있었으면... 반찬은 뭐 있는지 보고, 지 먹고 싶은 거 먹고 이런 정도만 돼도 좋겠어요."

밥상에서 동근씨에게 닥친 비극의 무게를 어렴풋이 실감할 수 있었다. 그는 지난 1년 동안 암흑 속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그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왜 하필 나일까. 차라리 다른 사람이었으면…, 하는 나쁜 생각도 많이 했죠."

흑백의 세계

"머리가 아프고, 몸이 이상해."

2016년 1월 16일 오전 9시 경기도 부천에 있는 YN테크 공장. 메틸알코올(메탄올)을 내뿜으며 스마트폰 부품을 가공하는 공작기계 수십 대가 일제히 멈췄다. 12시간의 밤샘근무는 끝이 보였다. 파견 노동을 하는 청년들은 퇴근을 준비했다. 그때 동근씨와 동갑내기인 이현순씨가 몸이 아프다고 호소했다.   

동근씨는 현순씨에게 얼른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현순씨는 그날 이후 출근하지 못했다. 현순씨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하지만 회사 쪽은 현순씨가 시력을 잃고 뇌를 다친 채, 중환자실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동료 파견노동자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공장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계속 돌아갔다.  

그로부터 5일 뒤 동근씨에게도 현순씨가 겪었던 증세가 똑같이 나타났다.

2016년 1월 21일 오전 밤샘 근무를 끝내고 퇴근하는 길, 그날따라 머리가 아팠다. 집에 오자마자 잠을 잤다. 출근을 두 시간 앞둔 오후 7시에 눈을 떴다.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색깔은 사라졌고, 흑백만 남았다. 사물의 윤곽은 흐릿했다.

'피곤해서 그런 거겠지.' 다시 잠을 잤다. 밤 9시 출근시각을 훌쩍 넘긴 자정에 눈을 떴다. 흑백 세상은 그대로였다. 그는 심상치 않은 상황임을 직감했다.

색깔은 사라졌고, 흑백만 남았다. 사물의 윤곽이 흐릿하게 보였다.
 색깔은 사라졌고, 흑백만 남았다. 사물의 윤곽이 흐릿하게 보였다.
ⓒ 민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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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압이 너무 높아서 안구가 터질 것처럼 아팠어요. 시력이 점점 가면(나빠지면) 마음의 준비를 했겠는데, 시력이 갑자기 가니까…. 그야말로 날벼락이죠. 빨리 병원에 가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같이 살고 있던 여자 친구가 그를 택시에 태워 인근 대학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새벽부터 하루 종일 각종 검사가 이어졌다. 시력은 점점 나빠졌다. 날이 밝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 

"두렵지는 않았어요. 안 보이는 게 이렇구나, 치료받으면 좋아지겠지 하고 생각했죠. 병원에서도 시신경염이라고만 했고, 앞을 못 볼 수 있다는 얘기는 안 했어요. 경과를 지켜봐야 한다고 했어요. 시신경은 몇 달 뒤 돌아올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병원은 동근씨가 앞을 보지 못하는 이유를 찾아내지 못했다. 채정순씨는 아들을 치료하는 의사에게 실명이 공장 환경과 관련된 게 아닌지 물었다. 현순씨가 병원에 입원한 사실이 마음에 걸린 것이다.

"그거는 아닙니다!"

그 의사는 버럭 신경질을 냈다. 채정순씨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채정순씨는 아들의 눈을 낫게만 해달라고 마음속으로 빌었다. 지금 그때를 돌이켜보면, 의사들이 원망스럽다. 

"어떤 의사는 메탄올을 마셨냐고 물어봤어요. 그걸 일부러 마실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사고가 아닌 인재

그날 밤 파견업체 누리잡의 윤아무개 이사가 연락해왔다. 메탄올 얘기를 꺼냈다. 병원에서는 그날 자정께 부랴부랴 동근씨의 체내에서 메탄올을 빼내기 위한 투석에 나섰다.

서른 시간 넘게 투석이 진행됐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동근씨가 병원에 실려 간 이튿날인 22일 산업안전보건공단 부천지사에서 측정한 YN테크 공장의 공기 중 메탄올 농도는 2220ppm으로 노출 기준의 10배를 웃돌았다. 고용노동부가 작업중지 명령을 내렸지만, 인체에 치명적인 고농도의 메탄올이 이미 동근씨의 시신경을 망가뜨린 뒤였다.

채정순씨는 그날을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 

"의사는 환자 가족의 말을 무시했고, 파견업체는 메탄올 때문인 거 알고 있으면서도 너무 늦게 말했어요. 치료 시기가 늦어졌잖아요. 그렇지 않았으면 이런 상황까지 오지 않았을 텐데... 사람 여럿 잡아먹을 사람, 진짜 나쁜 사람이에요. 자식을 키울 텐데 그렇게 양심이 없을 수 있을까요."

윤 이사는 방동근씨 가족에게 큰 상처를 줬다. 며칠 뒤, 윤 이사가 채정순씨에게 전화를 해왔다. 치료하는 데 도움을 주겠다고 했다. 채정순씨는 노무사를 만나 상의해보겠다고 답했다. 윤 이사는 버럭 역정을 냈다.

"우리가 해준다고 하는데, 왜 노무사를 사요!"

윤 이사는 그 뒤로는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채정순씨의 말이다.

"전화를 한 번이라도 할만도 한데, 전화도 없고. 못돼 처먹었어요. 진짜 나쁜 사람이에요. 남의 자식이라고. 싸대기 후려 갈겼으면 좋겠어요."

윤 이사가 몸담은 누리잡의 대표 이아무개씨는 지난해 6월 법정에 섰다. 법원은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불법 파견이었지만, 판사는 피고인이 잘못을 깊이 반성하고 있고 경미한 벌금형의 전과만 1회 있다면서 선처했다.

동근씨와 현순씨의 시력을 잇달아 앗아간 YN테크 실소유주 석아무개씨는 지난 2월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과 80시간의 사회봉사가 적힌 판결문을 받았다.

판사는 판결문에서 '석씨가 동근씨와 현순씨에게 치료비 명목으로 5500만 원가량 지급했고, 피해회복을 위해 최대한 노력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는 양형 사유를 밝혔다. 몇 달에 한 번 동근씨의 안부를 묻던 석씨의 아내는 판결 선고 이후 연락을 끊었다.

동근씨는 지난해 4월 민주 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도움을 받아 누리잡, YN테크, 대한민국을 상대로 8억9385만 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내달 첫 공판이 열린다. 앞서 누리잡은 YN테크에 책임을 떠넘겼고, YN테크 쪽은 손해배상 청구액을 인정할 수 없다면서 재판부에 청구 기각을 호소했다.

삼성은 정말 책임이 없을까

스마트폰을 분해한 모습.
 스마트폰을 분해한 모습.
ⓒ 민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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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스마트폰은 삼성전자 '갤럭시A7 2016'이다. 이 모델이 출시된 지 얼마 안 된 지난해 2월 바꾼 것이다. 동근씨가 이 모델의 부품을 만들다 병원에 실려 간 것은 기자가 스마트폰을 바꾸기 20여 일 전이다. 동근씨 손을 거친 부품이 기자의 스마트폰에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당시 이 모델을 대량으로 만들기 위해, YN테크 같은 삼성전자 하청업체들은 공장을 24시간 돌려야 했다. 파견노동자들은 주말도 없이 밤샘근무를 했다.

하청업체들은 생산비용을 낮추기 위해 파견노동자에게 최저임금 수준의 임금을 지급했다. 에탄올과 비교해 독성이 강하지만 가격이 싼 메탄올을 사용했고, 환기시설이나 메탄올을 보관할 장소를 마련하지 않았다. 파견노동자들에게 보호 장비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다.

이후 범죄 피해자인 청년 파견노동자들은 시력을 잃은 채 소모품처럼 버려졌다. 범죄를 저지른 파견·사용사업주들은 솜방망이 처벌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누군가는 떼돈을 벌었다.

원청 삼성전자는 2016년 스마트폰 판매 부문(IM부문)에서만 10조8075억 원의 영업이익을 올렸다. 실명 파견노동자들을 돕는 노동건강연대가 지난해 3, 4월 삼성전자의 책임을 묻는 질의서를 보내자, 삼성전자는 답변했다.

"문제가 발생한 업체들은 3차 협력사로, 직접 안전관리 및 모니터링 대상이 아님. (중략) 1차 협력사를 통해 안전관리 기준 준수를 계도하도록 하고 있음."

삼성전자는 글로벌 정보통신(IT)업체들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만든 전자산업시민연대(EICC)의 회원사다. 이곳 행동강령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자사 제품·부품을 만드는 모든 하청기업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에 책임을 져야 한다. 박혜영 노동건강연대 활동가(노무사)의 말이다.

"EICC 행동강령이나 다른 국제규범은 몇 차 하청인지 구분을 떠나 실질적인 원청의 책임을 못 박고 있어요."

넘어져도 보고, 부딪혀 보고

동근씨는 시력을 잃은 사실을 중국에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아직 알리지 못했다. 일찍 한국으로 떠난 엄마 아빠를 대신해 동근씨를 키웠던 분들이다. 채정순씨는 마음이 아프다.

"중국에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얘기를 못 했어요. 얘기하면 돌아가실 것 같아서. 전화를 하면 동근이를 계속 물어봐요. 할머니 할아버지는 동근이 얘기하면서 전화도 없다면서 울고 그래요. 저는  잘 있다고 자꾸 거짓말을 해야 하니까, 전화를 못 하겠더라고요... "

동근씨는 여자 친구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애초 동근씨 가족과 여자친구 가족은 지난해 봄 상견례를 할 생각이었다. 사고로 모든 게 바뀌었다.

"상견례는 미뤄진 게 아니죠. 이렇게 됐으니까... 여자 친구한테도 미안하고. 여자 친구가 참 안 됐죠."

그래도 여자 친구는 가족과 함께 그의 인생을 지탱해주고 있다. 

"저를 믿어줘요. 언젠가는 보인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에요. 눈이 보일 수 있다는 1%의 희망을 평생 안고 살아가야죠. 혹시라도 시력이 돌아온다면, 다시 여자 친구랑 놀러 다니고 싶어요."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그는 담담하게 답했다.

동근씨 : "장애를 가졌다 해도 살아야죠. 아직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뭐, 그래도 받아들여야겠죠."

기자 : "그럼 세상에 나갈 생각도 하고 있나요?"

동근씨 : "어떻게 이렇게만 있을 수 있겠어요. 슬슬 준비해야죠. 돈은 못 벌어도 밖에 나가고 싶죠. 이제 혼자 나가야죠. 넘어져도 보고 부딪혀보고. 물론, 모르죠. 하다 보면 더 걸릴 수도 있고, 하기 싫을 수도 있고. 그렇지만 '할 수 있구나' 할 수도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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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누가 청년의 눈을 멀게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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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법조팀 기자입니다. 제가 쓰는 한 문장 한 문장이 우리 사회를 행복하게 만드는 데에 필요한 소중한 밑거름이 되기를 바랍니다. 댓글이나 페이스북 등으로 소통하고자 합니다. 언제든지 연락주세요.

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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