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프라이드>에서 필립 역의 배우 배수빈이 12일 오후 서울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연기의 목표 "'저 배우가 하는 작품은 그래도 볼만 해' 정도면 됐죠. 이것만큼 어려운 게 없어요! 저 배우의 취향이나, 작품의 열정을 보았을 때 '돈 내고 볼만해'라는 것, 어떤 이유에서든 '저 배우가 나오면 괜찮아'라는 말을 듣는 것. 이 정도면 연기의 목표라고 할 만하지 않나요?" ⓒ 이정민


 연극 <프라이드>에서 필립 역의 배우 배수빈이 12일 오후 서울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연극 연기를 하는 이유 "제가 공연을 하는 가장 궁극적인 목적은, 열정을 불태울 수 있다는 거거든요. 작품을 통해 한 인물을 디테일하게 볼 수 있잖아요. 연극은 제가 말 너무도 사랑하는 작업이에요. 또 공연은 실험의 장이라고 생각되어요. 인물과 공간에 대한 문화 충격도 있었고요." ⓒ 이정민


잘생겼다. 그리고 섹시하다.

연극 <프라이드>의 '필립'으로 다시 대학로에 돌아온 배수빈을 따라다니는 평가다. 단순히 마스크에서 나오는 평가가 아니다. 그는 순간적으로 무대를 휘어잡을 줄 아는 배우이고, 자신이 지배할 수 있는 공간을 두는 배우이다. 그런 아우라를 풍기는 배우에게 어찌 반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저 잘생겼죠?! 으하하. 그건 자주 듣던 얘기고요. 아, 섹시하다는 얘기는 처음 듣는데…. (웃음) 저에게 무대는 떨리고 두려운 공간이거든요. 항상 내가 자가당착에 빠지지 않게 돌려놓는 힘이 있는 곳이고요. 그런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있어서 무대를 하는 거고, 제가 어떤 마음으로 무대를 하는지 관객분들께서도 보셨기 때문에 그렇게 봐주시는 게 아닐까요? 뭐, 잘생겼다는 말은 무대가 아니라 매체에서 일할 때도 매번 듣던 얘기라…. (웃음)"

다른 장르에서 활약하던 배우 중 무대로까지 영역을 넓히는 이는 여럿 있다. 하지만 그중에서 이렇게 단기간에 안착하여 팬들의 검증을 통과한 이는 손에 꼽는다. 인지도만 가지고 섣불리 나섰다가 무대를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에 실망과 상처를 준 배우가 어디 한둘인가. 그런데 그 어려운 걸, 배수빈은 해냈다. 여전히 그를 '배필립'으로 불러주는 팬들이 제법 많다.

"관객분들의 검증 단계가 있었겠죠. 제가 무대에서 연기하는 게 단순히 매체 일이 없어서, 매체가 싫증이 나서가 아니라는 게 느껴지지 않았을까요? 무대 작업에 대한 제 사랑을 관객도 다행히 알아주신 것 같아요. 그래서 더 감사하고요."

다른 작품 경험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연극' 배우 배수빈을 대중에게 각인케 한 건 2015년 <프라이드>였다. 배수빈의 필립으로 무대를 사랑하는 팬들에게 존재감을 알린 그는, 이후 <킬 미 나우>의 제이크, <카포네 트릴로지>의 올드맨 모두 자기만의 매력으로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그리고 배수빈의 두 번째 <프라이드>가, 두 번째 '필립'이 왔다. 그리고 어쩌면 마지막일 '배필립'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지난 12일,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나눈 이야기를 기록했다.

배수빈 그리고 필립의 마지막 재회

 연극 <프라이드>에서 필립 역의 배우 배수빈이 12일 오후 서울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번 <프라이드>에 중점을 둔 부분? "각자 다른 올리버에게 맞는 리액션을 신경 쓰고자 했어요. 그 사람의 정서를 고스란히 받는 걸 연습했죠. 다양한 페어가 있어서 순간순간의 가능성에 대해 열어 놓고 연기하는 편입니다. 이번 삼연은 <프라이드>의 본질이 깨지지 않는 선에서 나름대로 많은 실험을 하고 있어요." ⓒ 이정민


연극 <프라이드>는 1958년 런던과 2017년 런던을 교차로 보여주면서, 동명이인 필립, 올리버, 실비아가 겪는 상황을 펼쳐 보인다. 1958년의 필립과 올리버, 2017년의 필립과 올리버 모두 서로를 사랑하는 게이이지만, 억압의 시대였던 과거와 해방의 시대인 현재가 극명하게 대비되면서 이들의 이야기도 톤이 완전히 바뀐다. 3시간이라는 다소 부담스러울 수 있는 러닝타임이 정신없이 흘러갈 정도로 관객의 혼을 그리고 눈물을 빼놓는다. 2014년 초연, 2015년 재연을 거쳐 이번 2017년 공연이 벌써 국내 삼연이다. 세 번이나 올라왔다는 건, 그만큼 팬들 사이에서는 정평이 익히 나 있는,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붙잡은 극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마니아가 있는 공연을 한 게 <프라이드>가 처음이었고, 사랑을 받아서 참 좋았어요. 관객분들이 '돌아와 줘서 고맙다'는 말을 해주시는데 정말…. 저는 오히려 관객분들께 칭찬을 드리고 싶어요. 허리는 안 아프신지, 어떻게 그렇게 여러 번 봐주시는지…. 정말 대단한 관객분들 아닌가요? 이런 마니아 분들에게 보답하고 싶다는 생각에 돌아왔죠. '마지막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꼭 좋은 기억을 남겨드리고 싶습니다.

(마지막?) 이번이 아니면 언제 또 할지 모르죠. <프라이드>라는 작품 자체가 주는 그 뉘앙스 때문에 다시 한 것도 있거든요. 정서 자체가 워낙 강한 작품이라, 두고두고 생각이 났죠. '이런 느낌들이었지'라면서 문득문득 그리워지는 그 느낌과 정서 때문에….

('배필립'은 진짜 안 돌아오는 건가) 다시 하면 나치? (웃음) 필립으로는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사실 재공연을 한 것 자체가 <프라이드>가 처음이거든요. <프라이드>는 워낙 감사한 작품이고, 저에게도 여러 가지로 의미 있는 작품이라 다시 하게 된 거고…. 어떤 작품이든 재연은 앞으로도 거리를 둘 생각입니다. (그럼 <카포네 트릴로지>도 안 하나? 닉 니티를 참 좋아했는데) 저보다는 (이)석준 형이 훨씬 멋있지 않았나요? (웃음) 했던 작품을 다른 캐스트로 들어가는 건 생각해보겠지만, 같은 작품의 같은 캐릭터는 생각 없어요."

그렇다. 마지막이다. 배수빈의 <프라이드>가 언젠가 돌아올지 모르겠지만, 배수빈의 필립은 이번이 끝이다. 재연은 안 하는 주의라는 것은, 배수빈의 '제이크'도 배수빈의 '올드맨'도 앞으로 영영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얘기이다. 갑자기 '내가 왜 그때 더 예매하지 않았는가'하는 후회와 안타까움이 몰려온다. <프라이드>는 그가 처음으로 대학로 마니아에게 인정받은 작품이고, 배수빈은 그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특별히' 두 번째 필립을 맡기로 결심했다.

필립이라는 인물이 지닌 아픔

  연극 <프라이드>에서 필립 역의 배우 배수빈이 12일 오후 서울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1958년과 2017년의 온도차 "한 작품에서 분위기를 오가는 연기가 쉽진 않지만, 1958년 필립과 2017년의 필립이 동일한 인물이 아니라 그저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 정도로 봤어요. 재연 때도 했던 생각이지만, 요즘 더 과거와 현재 필립의 다른 점을 두면서 연기하려고 노력해요." ⓒ 이정민


"사실 <프라이드>는 어려워요. 필립이라는 역할 자체가 쉽진 않거든요. 특히 1958년 필립이. 항상 제도 속에서 알게 모르게 자신을 가두고 있던 인물이라서 표현할 때마다 힘들어요. 필립은 자기 자신을 부정했던 인물이라고 생각해요. 1958년 필립은 계속 치료를 받았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시대 안에서 그렇게 계속 살았을 테죠. 정체성을 거부하면서…. 어쩌면 극단적 선택을 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시대가 주는 억눌림과 아픔을 대변하는 인물이에요.

관객이 보기에도 시대가 주는 아픔이 너무 크기 때문에, 그 연민 때문에 필립을 미워할 수만은 없는 게 아닐까요. 그런 시대에도 불구하고 올리버는 본인의 진심에 대해 최선을 다했고, 그걸 부정당하면서 결국 무너진 인물이죠. 2017년에 와서는 자신이 인간적이고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올리버를 보면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이런 길이다'라는 것을 작품이 말한다고 생각해요. 성 정체성은 그저 각자 개인의 취향이고 정체성인 거죠. 사람을 대할 때 어떤 마음으로 대하고,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프라이드>는 분명 재미있는 작품이다. 마냥 진중하게 시대의 아픔만을 고발하는 작품이 아니다. 1958년과 2017년이 병치 되는 과정에서, 관객을 위한 숨구멍을 여기저기에 마련해 두었다. 순간순간 터지는 웃음 포인트들 덕분에 관객은 지치지 않고 작품의 종막 종장까지 함께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쉬운 작품도 아니다. 한 마디 한 마디 곱씹을수록 진하게 배어 나오는 대사들이 그렇고, 관객의 가슴까지 와 닿는 인물들의 아픔이 그렇다.

특히 1958년 필립은 시대의 피해자이자 동시에 이 관계의 가해자이기도 하다. 그는 물리적, 육체적 폭력을 통해 자신을 사랑과 진심으로 다 했던 올리버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다. 그 옆에 머물며 필립이 치유되기를 바랐던 실비아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마냥 미워할 수도, 마냥 사랑할 수도 없는 이 애잔한 인물. 과연 배우 배수빈이 아닌 자연인 윤태욱(배수빈의 본명)이었다면, 1958년 런던에서 어떻게 살아갔을까.

"어려운 질문이지만…. 시대에 순응하면서 살았을 것 같아요. 다만, 굳이 실비아와 결혼하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올리버와의 관계를 인정하진 않겠지만, 상처를 줄 수도 없으니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친구처럼 지내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제도에서 많이 벗어나지 않게, 틀 안에서 지내지 않았을까…. 그때 당시는 사회의 멸시를 받으며, 병으로 취급됐으니까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의 범주 안에서 지냈겠죠.

필립은 결국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게 되는 역할이에요. 투쟁하고 싸우는 게 역사가 되지만, 제가 1958년 필립이었다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래서 전 지금이 좋아요. (웃음) 사회가 지금처럼 얘기할 수 있을 때까지 많은 변화를 겪어 왔으니까요. 동성애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자체가 그렇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많은 이야기와 생각을 얘기할 수 있기까지는 수많은 역사 덕분이니까요."

시대 그리고 소수자

배수빈, 명품의 향기 연극 <프라이드>에서 필립 역의 배우 배수빈이 12일 오후 서울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배수빈의 연기론 "연기론을 말할만큼 제가 대배우는 아니지만…. (웃음) 항상 어떻게 하면 그 인물에 가까이, 친하게 다가갈 수 있을지 고민해요. 그에 대한 노력을 게을리하면 '붕' 떠 보여요. 그 작업을 치열하게 한 작품에 대해서는 만족감이 커요. 장르가 무엇이든." ⓒ 이정민


시대라는 단어가 배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1958년은 그런 시대였고, 2017년은 또 이런 시대이다. <프라이드>가 고발하는 건 필립과 올리버라는 이 게이 커플의 개인적 아픔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를 병으로 규정하고, 낙인찍고, 차별하던 시대에 대한 이야기이다. 시대의 억압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마음껏 드러내지 못하고, 혼자 인정도 못 하고 이성애자인 척 살아야 하는 시대. 그래서 배우자에게도, 연인에게도 나쁜 사람일 수밖에 없는 시대.

"필립이 정말 불쌍하지 않나요? 시대가 주는 아픔들이 사람을 짓누르잖아요. 한 사람이 아픈 건 그저 한 사람이 아픈 것이지만, 많은 사람이 아픈 것은 시대가 아픈 거예요. 분명히 무슨 문제가 있다는 얘기죠, 제도적이든 사회적이든.

아픔의 경중을 따질 수는 없지만, 그 아픈 사람들이 물결을 이루고, 그로 인해 사회가 변화한다고 믿어요. 그래서 <오마이뉴스>를 좋아합니다! (웃음) 시대의 소수자나 아픔을 대변하는 것이 그 시대 예술가들의 몫이라 생각해요. 그 아픔을 나누고 공유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저의 과업이라고도 생각하고요.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게 좋고, <킬 미 나우>나 <프라이드> 같은 작품에 참여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어요. 특히나 <프라이드>는 소수자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교차적으로 잘 엮여있는 작품이기에 더 사랑받는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수탉들의 싸움> 같은 작품도 생기면서, 그 사회적 시선이 또 조금씩 변화하는 중이라고 봐요. 어떤 관점에서는 <프라이드>가 '조금 올드하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라이드>의 가장 큰 의미는 작품이 담고 있는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나보다 그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 등이 고갈되고 있는 사회잖아요. 비록 시대가 변화하더라도 그 가치를 추구하는 작품이에요. 단순히 동성애에 대한 이슈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에 대한 이슈들을 깊이 다루고 있어서 2017년 지금도 사랑받는다고 봐요."

소수자의 아픔을 대변하고 이에 공감하는 것, 그것이 예술인의 '과업'이라고 무대를 서는 사람이 말했다. 그의 선언이 참 다행스럽기도 하고, 동시에 아리기도 하다. 퀴어들의 아픔이 주요한 소재로 채택되는 작품이 대학로엔 참 많다. 무대를 사랑하는 관객의 젠더 감수성도 무척 높은 편이다. 연극 <프라이드>를 관람하는 사람 중에서 성 소수자를 향한 차별에 찬성하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정작 이러한 목소리를 잠재우는 이들은 무대밖에 따로 있다.

성 평등이 시대의 화두가 되고, 페미니즘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어느 면에서, 우리는 분명 더 나은 내일을 만들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주요 대선 후보 5명 중 4명이 동성혼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다. 십자가를 내세우며 퀴어 퍼레이드를 반대하고, 차별금지법의 의회 통과를 무력화한 세력이 있다. 그들은 여전히 이 사회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성 소수자들의 '프라이드 퍼레이드'를 즐겁게 관람하는 극 중 2017년 런던과, 지금 우리가 발붙이고 있는 2017년 서울의 간극이 크게만 느껴진다. 그런 세상에 이 연극 한 편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배수빈, 명품의 향기 연극 <프라이드>에서 필립 역의 배우 배수빈이 12일 오후 서울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드라마 <주몽>을 했을 땐... "<주몽>의 경우에는 접근 방법 자체가 조금 달랐죠. 당시엔 그 인물을 작품 전체의 오브제로써 너무 희화화하지 않았나해요. 그 당시만 해도 성 소수자에 대한 사람들의 막연한 거부감이 있었으니까요. 그런 사람들이 최대한 부담없이 바라보게 하자는 생각으로 접근했어요. 일단은 부담이 없어야 시청자도 인물에 대해 이해할 여지가 생기기 때문에, 친근감을 먼저 주고자 했어요. 그래도 지금 돌아보면 아쉬움이 많죠." ⓒ 이정민


"저는 동성혼 허용해도 된다고 생각해요. 우리나라 자체가 유교적 사상과 도제식 교육을 꾸준히 받아온 사회이지만, 그렇게만 보지 말았으면 해요. 두 사람이 원한다면 결혼도 할 수 있고, 그에 따른 사회보장제도도 맞춰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허한다고 해서 사회가 문란해지지 않아요. 사회는 본래 자체적인 정화 능력이 있고, 자정작용이 있기 때문에 특정한 측면에서 너무 나갔다 싶더라도 다시 돌아와요. 지금의 역사도 그 반복이고요. 동성혼을 허용한 뒤의 흐름에 대해 현재의 우리가 미리 재단할 필요는 전혀 없죠. 오히려 지금은 사람에 대한 다양성을 존중하고, 인간으로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보장이 필요한 시점이에요. 성 소수자, 장애인 등을 모두 포함해서요.

저는 <프라이드> 재연 때나, 지금 삼연 때나 크게 상황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때도, 바로 지난번에도 퀴어 퍼레이드에 똑같이 참여했거든요. 종교적인 부분으로 따지면 물론 쉽지 않죠. 하지만 그 와중에 굳이 제가 어떤 쪽을 선택해야 한다면, 저는 자유로운 게 좋아요. 개개인의 자유로운 생각들이 더 타당하다고 믿어요. 관객분들도 <프라이드>를 보시고 타인에 대한 관용을 품고 가시면 더 좋지 않을까 해요. 인생에서 그 어떤 식으로든 의미 있는 것, 예컨대 사랑 같은 것을 찾으려고 노력하시면 더 좋겠고요. 이런 가치들을 잊고 지내다가 <프라이드>를 보고, 내가 무엇 때문에 왜 살고 있는가를 한 번쯤 생각해보고, 또 찾아가면서 내 안의 '프라이드'가 생기잖아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물론 거기까지는 제 영역이 아닙니다. 그들의 삶을 제가 바꿀 수 없고, 연극 한 편이 모든 관객의 생각을 바꿀 수 없죠. 다만 저는 제가 느끼고 생각한 대로 할 뿐이에요. 그들이 변하는 건, 그들의 몫이고요. '변화시켜야 한다'라는 마음만 있다면 도덕 선생님 같은 작품만 하지 않을까요. (웃음) 그러한 생각과 인식을 강요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어요. 하지만 저를 통해, 작품을 통해 한 번은 생각해 볼 수 있지 않나요? 그런 화두를 던지는 작품이 좋아요. 질문을 던지고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작품."

잠 못 이루는 돌고래의 속삭임

   연극 <프라이드>에서 필립 역의 배우 배수빈이 12일 오후 서울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연기를 계속 하다 보면 "뭐든 되어있겠죠? 대배우라는 말 자체가 좀 이상한 것 같아요. 처음부터 대배우는 아니잖아요? 하다 보니 되어있는 것이니까. (웃음) 저는 지금이 좋고, 꾸준히 연기한다는 게 좋은 것뿐이에요. 목표에 대한 강박을 가지지는 않아요. 열정적으로 하는 배우라는 평이면 충분합니다." ⓒ 이정민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 걸 좋아하는 이 배우. 스스로의 연기에 대한 질문도 많이 던지는 그이다. 몇 년 전 타사 인터뷰에서 밝혔던 것처럼, 그는 여전히 자신의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혼자 술을 마신단다. 후배들의 조언에 기꺼이 먼저 귀를 기울여가며 연습하고 공부하고, 결코 '꼰대'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그런 질문의 일환이다. 언젠가 셰익스피어의 <햄릿> 같은 정극 무대에도 서고 싶고, <카포네 트릴로지>처럼 실험적인 다른 작품도 만나고 싶단다.

불혹을 넘어서 흔들림 없어 보이는 그에게, 문득 궁금해졌다. '잠 못 이루는 밤'들을 겪으며 고민하는 작 중 인물들처럼, 그에게도 '잠 못 이루는 밤'이 있는지.

"물론 저에게도 잠 못 이루는 밤이 있죠. 음….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는 시기마다 달랐어요. 삶의 궤적이라는 게 또 그렇기도 하지만, 젊을 때는 나의 삶의 방향, 위치, 연기에 대한 부분, 사람들의 인정, 작품의 선택 등이었죠. 나이가 들어서는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부담들?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해요. 잠 못 이루는 밤들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하고, 또 나를 깨어있게 합니다."

그를 깨어있게 하는 흔들림을 부여잡고, 그는 여전히 배우로서 살고 있다. 아마도 그의 연기 인생에서 다시는 없을 '두 번'의 필모그래피 <프라이드>. 그리고 '두 번' 만난 인물, 필립. 모든 배우는 작품과 인물을 만날 때마다 하나씩 얻으며 성장한다. 배수빈은 필립을 통해 무엇을 배웠을까.

   연극 <프라이드>에서 필립 역의 배우 배수빈이 12일 오후 서울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체력 관리? "못 하고 있어서 큰일 났어요. 해야 하는데…. 아, 바나나 우유를 많이 마셔요. 단 거! 단 것 환영합니다!" ⓒ 이정민


"방황하는 아픔을 살면서 많이 경험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지만, 필립 덕분에 그렇게 큰 방황을 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어떤 게 더 '좋은 것'인지 생각이 명확해진 듯하거든요. 이전에는 이리저리 생각했다면, 지금은 '이렇게 하면 좋았겠구나!'라는 생각이 쌓이는 기분이랄까요.

캐릭터 분석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니에요. 이를 확장해 보면 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까지 닿거든요. 이런 과정은 지금에 와서도 필요하고,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다 사람을 알아가기 위한 과정…. 작품을 하면서, 필립 덕분에 생각이 넓어지고 소통할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저는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했어요. 주고받는 것 자체는 중요하지 않아요. 줬다면 다시는 주지 않으려고 노력해야죠. 또 받았다면, 잘 극복해서 그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으려는 반성의 계기로 삼아야 하고요. 이를 통해 더 성숙한 인간이 되지 않을까요."

인간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만, 돌고래는 위기에 처한 동료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작품 속에서 돌고래에 대한 잠깐의 설명이 와 닿는 건, 우리 모두가 그 인간과 돌고래 어딘가쯤에서 흔들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상처를 준 인간 배수빈이 있듯이, 누군가에게 상처 주지 않으려는 돌고래 배수빈도 그 안에 있다.

극 중 실비아는 필립을 향해 말한다. "내가 멀리서 속삭일 게요. 내 목소리가 당신에게 닿을 때까지. 당신이 당신에게 닿을 때까지"라고. 그리고 다독인다. "괜찮아요. 괜찮을 거예요. 모두 괜찮아질 거예요"라며. 그렇게 우리는 관계를 통해 상처를 안고, 관계를 통해 회복하며 살아간다. 성숙해진다. 지금의 아픔이 모두 '괜찮은' 이유이다. 필립과 재회 없는 이별을 해야 하는 배수빈. 지난 3월 21일 서울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2관에서 개막한 <프라이드>는 오는 7월 2일까지 계속된다. 오는 7월 이후 다시는 만날 수 없는 필립에게, 배수빈은 어떤 목소리를 속삭이고 싶을까.

"헤어질 때 인물에 대한 미안함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필립 당신을 대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으로서, 그에게 누가 되지 않았으면…. 물론 모두 다 대변할 수는 없지만, '나는 최선을 다했다'라는 마음으로 필립과 이별하고 싶어요. 전회차를 모두 그렇게 하지는 못하겠지만, 그중에 한순간, 한 공연, 한 지점이라도 당신과 닿았다면, 당신에게 닿을 수 있다면…. 그렇다면 '나는 당신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았나'하고 이별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입니다."

 연극 <프라이드>에서 필립 역의 배우 배수빈이 12일 오후 서울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배수빈의 '프라이드' "'너 괜찮아. 잘 하고 있어. 열정을 쏟아 부을 수 있는 한 분야에서 잘 하고 있구나'라는 데서 자부심을 느껴요. 어디가서도 '난 열심히 하고 있어'라는, 부끄러움이 없는 말. 배우로서의 땀에 자부심을 느끼죠. 내가 노력한다는 것에서 프라이드를 갖습니다." ⓒ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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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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