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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골목전 수원시 팔달구 행궁동 소재 전통찻집 다전에서 열린 '나혜석 작은 골목전'
▲ 작은골목전 수원시 팔달구 행궁동 소재 전통찻집 다전에서 열린 '나혜석 작은 골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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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나혜석, 우리는 그녀를 흔히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여인'이라고 표현한다. 나혜석의 생전 당시 그 어느 누구도 나혜석과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혜석은 여류화가요, 시인이다. 또한 여성의 권리신장을 주창한 신여성이기도 하다. 나혜석은 1896년 4월 28일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다.

1948년 12월 10일 당시 나이 52세로 세상을 떠난 나혜석을 기리는 골목축제가 팔달구 행궁동에서 그녀의 태어난 날인 4월 28일과 29일 열린다. 21일 오후 3시 행궁동에 소재한 전통찻집 다전에서는 행궁동 주민센터 이장호 동장을 비롯해 행궁동 주민 30여 명과 행사 관계자들이 모인 가운데 '나혜석 생가터 골목전'이 열렸다. 

여성의 선구자라고 하는 정월 나혜석. 나혜석에 대한 평가는 상반된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나혜석은 이 시대에 올바른 평가를 받지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혜석의 출생 121년을 맞이하여 나혜석에 대한 평가를 다시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나혜석 신여성으로 독립운동을 했으며 시인이자 화가인 정월 나혜석
▲ 나혜석 신여성으로 독립운동을 했으며 시인이자 화가인 정월 나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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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로 보면 정월 나혜석은 정말 파격적인 여인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역사가 그녀를 재평가 해야만 합니다. 나혜석은 일생을 파란만장하게 살았습니다. 삶 자체가 사건이었죠. 나혜석과 관계된 남자들이 모두 친일파로 명단에 올랐는데 나혜석은 독립운동을 했잖습니까? 기미독립만세 사건 때 5개월 동안 구금이 되었습니다. 국가유공자로 지정을 해야 마땅하다는 생각입니다."

벌써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현 수원화성 한동민 박물관장은 나혜석에 대한 평가를 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혜석은 살아 온 자체가 사건입니다. 일제강점기 치정사건을 비롯해, 나혜석과 황옥사건 등 역사 속의 인물인 나혜석을 올바른 시각으로 재평가하자는 것이죠. 나혜석의 그림도 정확히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인쇄된 그림을 보면 잘 그리지 못했다는 평이지만, 원본을 보면 그림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생가터 수원시 팔달구 행궁동 정월 나혜석의 생가터임을 알리는 포지석 주변을 곷으로 장식했다
▲ 생가터 수원시 팔달구 행궁동 정월 나혜석의 생가터임을 알리는 포지석 주변을 곷으로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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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이어지는 나혜석 생가터 골목전

21일 오후에 찾아간 행궁동. 나혜석 생가터 임을 알리는 표지석 주변을 아름답게 꽃으로 장식했다. 좁은 골목 안에 자리한 찻집에 모인 사람들은 나혜석을 기리기 위한 행사를 추진하면서 정월 나혜석에 대한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나혜석은 그 당시로서는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을 해낸 여인이다. 그런 나혜석을 우리의 습속인 유교적 관념으로만 평가한다는 것은 무리일 수밖에 없다.

골목에는 나혜석의 일대기를 비롯해 나혜석의 그림들을 그려놓았다. 벌써 3년 째 행궁동 나혜석 골목은 벽화그림을 이어나가고 있다. 행궁동은 나혜석과는 뗄 수 없는 곳이다. 어찌보면 나혜석이 우리나라를 떠나 해외에서 활동을 한 것도 당시 한국사회가 그녀의 타오르는 불꽃과 같은 삶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래는 1922년 3월경 신문에 난 기사의 일부이다.

'우리 조선여자를 위하여 일심전력하는 나혜석 여사는 금번 당지 팔번통 태성의원 내에 여자 야학을 설립하고 매주 3일간 오후 7시부터 10시까지 열성으로 지도하여 입학지원자가 날로 많다더라.'

벽화 나혜석 생가터 골목전에 그려진 나혜석 벽화
▲ 벽화 나혜석 생가터 골목전에 그려진 나혜석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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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한 나혜석 기리는 작업 시작해야

1922년 남편 김우영이 만주 안동현 부영사로 전보되자 나혜석은 그를 따라갔다. 안동현으로 남편 김우영을 따라간 나혜석은 1922년 3월부터 안동현 태성의원(泰誠醫院) 내에 '안동현 여자야학'을 설립해 교육사업에 나서는 한편, 부영사 부인의 직위를 이용해 독립운동가들을 도왔다. 또한 의열단의 김원봉 등에게 거사 자금을 비밀리에 송금하기도 했다.

나혜석은 약 6년간 안동에 정착하면서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한인사회를 보듬으면서 화가로서의 창작활동도 활발하게 이어나갔다. 나혜석은 안동의 생활을 한 마디로 이렇게 말했다.

"사회상으로 사업을 해본 데도 여기요. 개인적으로 남을 도와본 데도 여기요. 인심에 대한 짠맛 단맛을 본 데도 여기요"라고. 나혜석은 6년여 동안 안동에 거주하면서 여성의 몸으로 신교육사업과 나라의 독립을 위해 많은 일을 감당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나혜석을 불륜녀, 혹은 '이혼녀' 등으로 치부한다. 나혜석이 한 말 중 "정조는 취미다"나 "자식은 악마다" 혹은 "결혼은 지옥이다"라는 등의 발언은 사회적으로 충격을 주었다. 그러한 사회적 금기를 깨는 말로 인해 나혜석은 사회로부터 완전히 소외된다. 그렇게 신여성으로 살아가던 나혜석은 말년에 들어 인간들에게서 버림을 받는다.

벽화 나혜석 생가터 골목전은 3년 째 이어지며 골목을 그림으로 장식하고 있디
▲ 벽화 나혜석 생가터 골목전은 3년 째 이어지며 골목을 그림으로 장식하고 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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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질병을 앓고 있던 나혜석은 1946년 지나던 행인에 의해 발견되어 서울시립남부병원에 입원되었다. 그 뒤 병원에서 나와 1948년 공주의 마곡사에 갔으나 병세가 악화되자 스스로 마곡사를 나왔다.

1928년 11월 용산에 소재한 서울 시립 자제원에 스스로 들어간 나혜석은 1948년 12월 10일 오후 8시 30분 서울시립 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사망하였다. 당시 나혜석은 소지품 하나 없이 병사한 것으로 기록되었고, 죽기 전 각종 질병으로 대화가 어렵던 나혜석은 결국 행려병자, 무연고자로 처리되고 말았다.

한국 국내에서는 그녀는 '바람 피우다 이혼당한 여자'로 치부하였다. 불꽃같은 여인이었던 나혜석을 그 당시 사회가 미처 알아보지 못한 것일까? 말년에 아무도 지키지 않는 무연고자 병동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한 정월 나혜석. 그런 나혜석을 기리는 '나혜석 생가터 작은골목전'.

그런 나혜석의 일생을 그저 편향된 우리들의 사고 안에 가둬놓고 평가를 한 것은 아닐까? 나혜석 출생일을 맞이하여 그동안 잘못 알려진 나혜석의 일생이 재조명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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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수원복지신문과 티스토리 블로그 '바람이 머무는 곳'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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