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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의 대통령선거에서 대구·경북 유권자들은 제1보수 후보를 압도적으로 지지했다. 정통 보수당의 제1후보는 항상 이 지역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다. 그런데 이번 대선에서는 색다른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후보들이 이 지역에서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일례로, JTBC와 한국리서치가 지난 19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대구·경북에서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는 44.8%의 지지를 받았고,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는 21.3%의 지지를 받았다. 두 후보의 지지율 합계는 66.1%다. 이 여론조사의 결과는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www.nesdc.g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일의 KBS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자신을 공격하는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를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보며 '문재인·안철수가 우리의 주적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라'란 메시지를 던진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는 이 여론조사에서 14.5%의 지지를 받았다. 유승민 후보는 5.6%였다.

대한민국 보수의 본거지인 대구·경북에서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후보들이 60%가 넘는 지지를 받는 데 반해, 기존 보수와 신생 보수의 두 후보가 모두 20% 정도의 지지밖에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주 이례적인 일이다.

직선제 대선에서 제1보수 후보의 득표율.
 직선제 대선에서 제1보수 후보의 득표율.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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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는 중앙선관리위원회 선거통계시스템의 자료들을 토대로 작성한 것이다. <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역대 직선제 대선에서 제1보수 후보들은 대구·경북에서 60%대 혹은 70%대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1956년 제3대 대선을 제외하면, 제1보수 후보에 대한 이 지역 지지율은 그 후보에 대한 전국 지지율을 항상 상회했다.

이 지역에서 제1보수 후보가 50% 이하를 기록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곳에서 보수 후보는 거의 항상 압도적(60% 이상)인 우세를 보였다. 지난 18대 대선에서는 박근혜 후보가 역대 최고 기록인 80.5%를 기록했다. 아버지의 이 지역 최고 득표율(75.6%)을 뛰어넘은 것이다.

<표>에서, 직선제로 치러진 1960년 3월 15일의 4대 대선 결과를 표기하지 않은 것은 이 선거가 무효로 처리됐을 뿐 아니라, 부정선거가 워낙 심해서 공식 득표율과 실제 득표율의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지역색 퇴색? 역사적 변화의 징후?

이처럼 대구·경북에서 제1보수 후보가 압승을 거두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 같은 그간의 패턴을 고려하면, 보수 진영의 홍준표·유승민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그들의 '주적'인 문재인·안철수가 60% 이상을 기록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이것은 패턴을 파괴하는 새로운 현상이다. 

"대구·경북 유권자들이 안철수를 보수 후보로 간주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다. 물론 안철수 후보가 가끔씩 '이상한 발언'을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홍준표·유승민에 비해서 분명히 진보적이다. 또 안철수의 소속 정당은 홍준표·유승민의 소속당에 비하면 분명히 진보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구·경북 유권자들이 안철수를 보수 후보로 간주하고 있다고 확실하게 단정할 수는 없다.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후보들이 대구·경북에서 높은 지지를 받는 현상은 우리나라 대선에서 지역 색깔이 퇴색하는 징후로도 해석될 수 있지만, 또 하나의 역사적인 변화의 징후로도 해석될 여지가 있다.

이런 현상은 대한민국 초반에 형성된 정치성향으로부터 대구·경북이 탈피할 가능성을 보여주는 징후다. 또 그와 동시에, 400년 전에 형성되어 대한민국 초반까지 존재했던 전통적 정치성향 쪽으로 대구·경북이 좀 더 가깝게 다가갈 가능성을 보여주는 징후일 수도 있다.  

그동안은 대구·경북이 제1보수당의 아성이었지만, 지난 4백 년간의 역사 속에서 보면 이것은 상당히 낯선 현상이었다. 왜냐하면, 조선 후기인 17세기 전반부터 경상도는 강력한 야당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 경상도는 '야당 지역'

경상도가 야당 지역이었다는 점은, 경상도를 기반으로 하는 정치지도자이자 철학자인 퇴계 이황이 조선 후기에 별다른 존경을 받지 못한 사실에서 상징적으로 표출된다. 조선 후기에 보다 큰 추앙을 받은 인물은 경기도를 기반으로 하는 정치 지도자이자 철학자인 율곡 이이였다. 이황이 국가적 주목을 받으며 이이의 위상을 능가한 것은 박정희 정권 때인 1960년대 후반부터다.

오늘날 이황은 천원권 모델이고 이이는 오천원권 모델이다. 이이의 경우에는, 어머니까지 오만원권 모델로 합세했다. 이황은 동인당의 지도자였고, 이이는 서인당의 지도자였다. 그래서 만약에 조선 시대 사람이 환생해서 대한민국 지폐를 본다면, 동인당이 1천 원이고 서인당이 5만5000원인 구조가 자기들 시대의 정치 상황을 잘 대변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광해군이 인조 쿠데타(이른바 인조반정)로 실각한 1623년 이래, 근 300년간 조선 정치를 장악한 것은 서인당과 그 후예인 노론당이었다. 광해군을 지지한 쪽은 동인당 중에서도 북인당이었다. 북인당의 기반은 경상도 서부였다. 또 다른 동인당 분파인 남인당은 경상도 동부를 기반으로 했다. 1975년~2007년에 천원권에 그려져 있었던 도산서원도 경상도 동부인 안동에 있다.

북인당은 광해군과 함께 17세기 전반에 제도권 정치에서 밀려나고, 남인당은 숙종시대 때인 17세기 후반에 밀려났다. 경상도에 기반을 둔 당파들이 17세기 전반과 후반에 각각 밀려난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조선 후기에는 경상도 출신들이 차별을 받았다. 중앙정부 인사에서 특히 그랬다.

경상도 구미 출신으로 35세 때 무과에 급제한 노상추(1746~1829년)의 일기에도 그런 정황이 나타난다. 시험에 급제하고도 4년간이나 보직을 받지 못한 그는 관직에 진출한 뒤에도 오랫동안 만족스러운 자리를 받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경상도 출신이라서 차별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노상추는 정부에서 인사 조치를 발표할 때마다 '이번에는 영남 사람이 몇 명이나 들어갔나?' 하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럴 때마다 거의 항상 '역시나!' 하며 그는 허탈해졌다. 이렇게 경상도가 차별을 받았기 때문에, 조선 후기 경상도의 정치성향은 반(反)여당 혹은 반보수 아니면 반정부나 반체제에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성향은 1873년 흥선대원군 퇴진을 계기로 고종 임금이 실권을 잡은 뒤로 한층 더 심해졌다.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달리 고종은 '시장을 개방하고 외세를 끌어들인 뒤 외세 간의 상호경쟁을 유도해서 조선의 독립을 유지한다'는 전략을 택했다.

이런 전략에 따라 고종은 일본·청나라·러시아·미국·영국 등을 상대로 시장개방을 단행하거나 아니면 기존의 시장개방을 확대했다. 이 때문에 가장 큰 피해를 본 지역 중 하나가 부산을 끼고 있는 경상도였다. 부산항을 통한 일본 상인들의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경상도 상권이 크게 위축됐던 것이다.

이 때문에 고종 집권기에는 경상도에서 시장 개방 반대운동이 격심했다. 1881년 경상도 선비 1만여 명이 이만손·강진규 등의 주도 하에 '영남 만인소'란 상소문을 올려 시장개방을 반대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대구 10월 사건과 2.28 민주화 운동

대구·경북의 그런 성향은 1945년 해방 직후에는 이승만 정권 및 미 군정에 대한 반대투쟁으로 이어졌다. 1946년의 대구 10월 사건(이른바 대구 폭동)이 이를 잘 상징한다. 박정희가 한때 공산당에 가입한 것도 이런 지역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또 1960년에 이승만 정권이 무너질 때는, 대구 지역 고교생들의 2·28민주화운동이 이승만 반대운동의 확산에 중요한 밑거름이 됐다.

대구시 중구 공평동에 있는 2·28기념중앙공원.
 대구시 중구 공평동에 있는 2·28기념중앙공원.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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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1952년 2대 대선에서 이승만에 대한 대구·경북 지지율이 전국 평균인 74.6%와 비슷한 75.0%로 나타났다. 이런 높은 지지율이 나온 것은 이때가 전쟁 중이었기 때문이다. 전쟁 중에는 최고사령관에 대한 지지도가 높아지기 마련이다.

전쟁 후인 1956년 3대 대선에서 대구·경북 지지율이 전국 평균(70.0%)보다 많이 낮은 55.3%로 나온 것은, 이승만 보수 정권에 대한 이 지역의 진짜 표심을 반영하는 것이다. 물론 55.3%도 높은 득표율이다.

이 시기에 이승만이 높은 득표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해방 직후 몇 년 동안에 유력한 야당 후보 혹은 진보 후보들이 암살 등의 방법으로 정계에서 많이 사라진 데에다가 미국이 이승만을 군사적으로 지원한 탓에 그의 권력기반이 경상도뿐 아니라 전국적 차원에서 공고해졌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대구·경북에서 이승만 지지율이 상대적으로 낮게 나왔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17세기 전반 이래의 대구·경북 정치성향이 1950년대까지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대구·경북의 그 같은 반(反)보수 성향이 박정희 쿠데타 이후로 급변했다. 앞의 <표>를 토대로 작성한 <차트>에서 알 수 있듯이, 5대·6대·7대 대선에서 박정희 후보에 대한 대구·경북의 지지율은 그에 대한 전국 평균 지지율을 훨씬 상회했다.

박정희에 대한 전국 평균 지지율과 대구·경북 지지율의 차이는 최하 9% 포인트(5대 선거)에서 최고 22.4% 포인트(7대)였다. 평균은 14.7% 포인트였다. 대구·경북 지지율이 전국 평균 지지율을 14.7이나 웃돌았던 것이다. 

박정희 쿠데타 이후 TK 정치 성향 급격히 변해

직선제 대선에서 제1보수 후보의 득표율.
 직선제 대선에서 제1보수 후보의 득표율.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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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에서 5대~7대 선거 결과를 보면, 빨간 그래프가 파란 그래프보다 훨씬 높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이승만 시절인 2대·3대 때에 두 그래프가 비슷했거나 아니면 빨간 그래프가 낮았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박정희 쿠데타를 계기로 17세기 전반 이래의 대구·경북 정치성향이 급격히 변했던 것이다.

1960년대에 등장한 대구·경북의 친보수 성향은, 직선제가 부활한 1987년 대선 이후에 한층 더 강해졌다. 박정희 때 다져진 친보수 성향이 박정희 사후에 훨씬 단단해졌던 것이다. 차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1987년 13대 대선 이후에는 파란 그래프와 빨간 그래프의 차이가 훨씬 더 벌어졌다. 13대~18대의 여섯 선거에서 제1보수 후보의 대구·경북 득표율은 전국 득표율보다 평균적으로 26.8% 포인트나 높았다. 박정희 시절의 14.7% 포인트보다 12.1이나 높았던 것이다. 

제5대 대선 이후로 나타난 이 같은 패턴은, 1960년대 이후의 대한민국 정치체제를 떠받치는 원동력이 대구·경북에서 나왔음을 의미한다. 지난 50년간 이 지역에서 제1보수 후보에게 표를 몰아주고, 제1보수당은 그것을 기반으로 대한민국 체제를 운영해왔던 것이다.

TK표심 변화, 정치체제 변화의 징표될까?

그런데 2016년 연말 이래의 촛불 혁명을 계기로 지난 50년간의 정치성향이 급격히 무너지고 있다. 박정희를 계기로 등장한 대구·경북의 정치성향이 박근혜를 계기로 급속히 붕괴하고 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나타나고 있듯이, 유력한 보수 후보가 둘이나 되는데도 대구·경북 유권자들은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후보들을 더 많이 지지하고 있다. 문재인·안철수 후보가 받는 지지율의 합계는 1960년대 이래 제1보수 후보가 받은 지지율과 거의 비슷하거나 조금 낮다.

물론 5월 9일 대선을 겪어봐야 좀 더 구체적인 윤곽을 알 수 있다. 또 몇 차례의 선거를 더 겪어봐야, 대구·경북의 향후 정치성향을 구체적으로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상황만 보더라도, 제1보수 후보에 대한 대구·경북의 태도가 달라졌다는 점만큼은 확실하다. 1960년대 이후로 대한민국 체제를 떠받치던 대구·경북에서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이 나라 정치체제의 변화가 조만간 한층 더 광폭으로 전개될 것임을 예고하는 징표로도 해석될 수 있다. 


태그:#대구.경북, #대통령선거, #보수당, #표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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