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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춧가루가 적은 김치
▲ 오스트리아 사람 데이빗이 만든 김치 고춧가루가 적은 김치
ⓒ 조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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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김치 먹어 볼래?"

볼리비아 산골 마을 사마이파타에 사는 오스트리아 사람 데이빗이 난데없이 김치를 권했다. 데이빗 가족의 식사에는 언제나 김치를 비롯한 발효 음식, 채소, 과일이 있었다. 몸에 해로운 튀김이나 가공 음식은 한 개도 없었다. 대부분 손수 키워 요리한 음식이었다.

데이빗은 사마이파타 시장에서 차로 20분을 떨어진 산속에서 아내 멜라니, 갓 돌 지난 아들 일리안, 13년 지기 친구 리사와 산다. 10년 전, 나무만 빽빽한 볼리비아 산을 50만 원 주고 샀다. 지금은 맥주 양조로 돈을 벌고 작은 텃밭을 일군다. 농장 건물은 진흙과 볏짚을 이용해 손수 지었다.

데이빗의 집에 있는 동안 요리와 식사에 많은 시간을 썼다. 아침 7시 40분부터 아침 식사를 만들고 8시 30분부터 9시 30분까지 먹는다. 10시 전까지 설거지와 뒷정리를 마친다. 점심 식사 역시 오후 1시에 시작해 4시에 끝난다. 저녁은 각자 알아서 대충 먹는다. 태양열 전기를 써 일몰 후 전기를 많이 쓰기 어렵고, 8시면 다들 자러 가니 저녁이 간소하다.

1시간이나 넘는 긴 식사 시간 동안 데이빗의 가족은 비건 음식을 풍성하게 즐긴다. 비건은 유제품, 계란, 해산물, 고기를 먹지 않으며 동물 원료를 사용한 의복이나 생활용품을 쓰지 않는 철저한 채식주의자다. 비건 식단을 유지하려면 야채, 곡물, 과일에서 다양한 영양소를 먹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 가지 더, 데이빗의 가족은 요리용 기름을 안 썼다. 데이빗은 기름이 장 속 유산균의 활동을 막아 몸에 해롭고 근육 형성에 방해가 된다고 했다.

동물 원료 '제로' 이 가족이 비건으로 사는 이유

데이빗 가족의 아침
▲ 풍성한 아침식사 데이빗 가족의 아침
ⓒ 조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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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가족의 아침 식단은 매일 똑같다. 말린 귀리, 양귀비 씨, 건포도, 말린 산수유 열매, 호두 등을 물에 섞어 끓여 죽처럼 먹는다. 파파야, 파인애플, 사과, 포도, 바나나를 조각내 과일 샐러드를 만든다. 유산균 보호를 위해 굽지 않고 찐 시큼한 발효 통곡물 빵에는 허브 페스토, 양파 절임, 미소 된장(된장을 잼처럼 먹다니!) 등을 발라 먹는다. 밭에서 딴 파, 상추, 루꼴라, 토마토 등의 생 야채도 필수다. 식물성 기름이 가득한 성인 남성 주먹 크기의 아보카도 3개도 식탁에 올라온다.

점심 주메뉴는 대개 카레, 영양이 풍부해 슈퍼 곡물이라 불리는 아마린스를 올린 호박찜, 찰기 없는 서양식 쌀밥, 삶은 감자, 양상추 샐러드, 콩 요리다. 양조장이 있는 농장이니 직접 만든 맥주도 일주일에 3번 이상, 점심 저녁으로 마신다. 데이빗 가족은 끼니마다 발효 음식을 먹는다. 그들에게 김치는 필수 음식이다. 데이빗 가족이 만든 김치는 고춧가루만 써서 매운맛과 단맛이 덜하고, 오래 숙성시킨 신 김치였다.

김치 관리도 아주 철저하다. 한 번은 내가 실수로 여러 가지 김치 통 뚜껑을 원래 통에 끼우지 않고, 섞어 끼웠다. 그걸 어떻게 눈치를 챈 건지, 김치 통 뚜껑에도 유산균이 잔뜩 묻어 있으니 원래 짝에 맞게 놓으라며 야단이었다. 볼리비아의 산골에 사는 유럽 가족은 어쩌다 매일 김치를 먹고, 요리 기름을 먹지 않고, 돌 지난 아기가 있는데도 유제품을 먹지 않게 된 걸까.   

사람들은 대부분 윤리적 이유로 비건이 되지만, 이 가족은 건강해지려고 비건이 됐다. 데이빗이 볼리비아에 이민 온 지 3년 때쯤, 우연히 만난 스위스 출신 의사가 비건 식단을 권했다. 그 의사는 유제품, 요리용 기름, 고기를 먹으면 몸에 독이 쌓이고 유산균 활동이 느려진다고 했다. 채소와 콩 섭취로 충분한 단백질을 얻을 수 있다고도 했다. 그 의사가 '세계 발효 음식 안내서'라는 책을 줬는데, 그 책에 김치가 나왔다. 비건 식단만 고집한 후, 데이빗은 매년 2번 정도 앓던 심한 감기몸살을 더는 앓지 않았고, 손목 관절염이 나았다.

이 가족은 자신들의 식단에 굉장한 자부심을 가졌다. 김치통을 매일 살피고, 청결하게 유지하며 새로 오는 자원봉사자에게 김치를 권했다. 밥상머리에서 매일 "유산균이 몸에 좋다", "유산균을 살리는 요리법이 따로 있다"는 식의 대화가 오갔다. 매일 같은 얘기를 들으니 진절머리가 날 정도였다.

주부습진에 허리통증까지, 그 집을 뛰쳐나왔다

맥주와 김치가 가득하다
▲ 발효음식 저장 창고 맥주와 김치가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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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가족의 철저한 건강 식단, 자급자족 삶은 분명 대단하다. 자기가 뭘 먹는지 정확히 아는 건 요즘 세상에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각종 과자의 필수 재료인 야자 기름이 원시림과 그곳에 살던 소수부족의 삶을 파괴하는 줄 까맣게 모르고 습관적으로 먹는다. 나 역시 고기는 먹지 않지만, 맥도날드가 저임금 노동착취를 하는 비윤리적인 기업임을 알면서도 맛과 가격에 굴복해 500원짜리 아이스크림을 일주일에 한 번은 먹었다.

데이빗 가족과 3주를 머물며 일본 영화 '리틀 포레스트'가 떠올랐다. 리틀 포레스트의 주인공은 혼자 시골에 살며 일과를 온종일 농사, 요리, 식사에 쏟는다. 예능 프로그램 '삼시 세끼'도 즐겨봤다. 작은 마을에서 살며 사랑하는 사람들과 정성스레 식사를 준비하는 삶에 마음이 끌렸다. 소음과 빛 공해가 24시간 멈추지 않는 서울에서 불면증에 시달리고 사람들의 모진 말에 상처받을 때, 스크린 속 펼쳐진 시골의 단순한 삶을 동경했다. 스크린 속 삶은 동경일 뿐, 막상 살아보니 풍성하게 먹기 위해 사는 삶은 만만치 않았다.

데이빗 가족과 있는 동안 내가 원하는 라이프 스타일은 무엇일까 고민했다. 이 가족처럼 내가 먹는 게 뭔지 알고 먹기, 대기업 식품 피하기를 가능한 실천하고 싶었다. 대기업 가공식품에는 각종 화학 첨가물이 들어가고, 수송과정에서 이산화 탄소가 많이 나오는 수입 원료가 많다. 다만 그들처럼 요리용 기름 없는 비건 식단을 100% 실천할 마음은 없다. 3주 동안 감자튀김의 고소한 기름 맛, 계란말이(집에서는 동물복지 계란만 먹는다)의 달콤함이 그리웠다. 대신 탄산음료는 끊기로 했다.

데이빗 가족의 식단은 존경스러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 가족과 있기 힘들었다. 풍성한 식탁을 즐기는 데이빗의 가족 때문에 1시간씩 설거지를 했다. 숙박 2주차에는 주부습진에 걸렸다. 일손이 부족해 5시간 동안 요리만 한 날은 허리 통증을 심하게 겪었다. 그날 속으로 데이빗 가족 흉을 봤다. 샐러드와 토마토 파스타 같은 간단한 요리 두 가지만 해도 건강하고 윤리적인 점심식사인데, 왜 4~5가지 요리를 해서 하루의 대부분을 먹고 요리하는 데 쓰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가족은 분명 먹기 위해 살았다.

아몬드를 이용한 비건크림치즈 호박찜
▲ 비건크림치즈 호박찜 아몬드를 이용한 비건크림치즈 호박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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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의 가족과 달리 산속이 아니라 작은 읍내 혹은 소도시에서 살거나, 산에 살아도 공동체를 이루고 싶다. 데이빗은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도 없었다. 식사 시간 동안 사회 문제, 정치 이야기를 나눈 적이 거의 없었다. 서양인들이 한국인에게 단골로 묻는 말 "북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도 데이빗은 묻지 않았다. 인터넷은 커녕 라디오도 없이 사는 사람들이니 어쩌면 당연해 보였다. 한국에서 거의 매주 촛불시위 가고, 정당 활동을 하던 내게 오로지 자신들의 건강을 지키느라 바쁜 데이빗 가족의 삶은 답답해 보였다.

개인마다 기준은 다르지만, 내가 사는 삶의 의미를 타인과 나눌 수 없다면 대안적으로 사는 게 별 의미 없어 보인다. 대안적인 삶을 꿈꾸는 이유는 사회에 다른 삶의 방식으로 살아도 죽지않고, 더 의미 있게 살 수 있음을 알리고 싶어서다. 건강하게 먹고 할 수 있는 한 윤리적으로 사는 것 못지 않게 투표와 시위 등을 통해 정치와 사회 진보에 참여해 삶의 의미를 찾고 싶다.

이틀 더 있으면 데이빗 가족과 헤어져 도시로 돌아간다. 한동안 요리는 하지 않을 거다. 주부습진에 걸린 손에게 휴식을 주고 싶다. 도시로 돌아가 한동안 먹지 못했던 감자튀김을 먹고 싶다. 건강한 음식만 먹었던 내 위장이 다소 놀랄지도 모르겠다. 물론, 내 혀는 "오! 기름이다"라며 축제를 벌일 준비가 됐다. 


태그:#지속가능성, #볼리비아, #세계일주, #비건, #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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