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터널 선샤인> 포스터

영화 <이터널 선샤인> 포스터 ⓒ 코리아픽처스 , (주)노바미디어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남녀가 만나 사랑하고 지지고 볶는, 사소한 일상이야기다.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상의 평범함, 권태로움과 이별은 스토리 면에서 큰 흥미를 끌어 내지 못한다. 그러나 이런 평면적인 내용 위에 두 사람과 관계되는 기억을 삭제하는 과정이 들어옴으로써 영화는 매우 특별해진다. 기억 삭제라는 소재도 기발하지만 그 과정을 풀어내는 방법은 더욱 흥미롭고 유쾌하다.

독특한 영상미를 연출하는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인정받는 미셸 공드리는 상상의 영역 안에 있던 기억 삭제를 선명하고 신비롭게 보여준다. 10년이 훨씬 지났으나 지금 봐도 전혀 진부하지 않은 이유다. 물론 이건 상상이다. 하지만 영화는 누구나 한 번쯤 그랬으면 하는 바람을 표현해 모두의 공감을 얻었다.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적인 사건을 겪은 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사건을 의식 밖으로 몰아내는 것을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서는 '억압'이라고 한다. 억압은 억제와는 다르다. 억제가 의식적으로 억누르는 것이라면 억압은 자신이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다. 의식 밖, 즉 무의식의 세계로 기억을 몰아낸다. 큰 고통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어수단인 셈이다.

그런데 기억을 선별적으로 없앨 수 있다고 한다. 당신은 그것을 선택하겠는가? 심지어 그 후유증도 술을 먹고 난 후 정도라는데 할 수 있겠는가?

사랑의 아픈 상처를 지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크게 두 가지로 흐름으로 진행된다. 기본적인 이야기는 현재적 시점으로, 이제 막 사랑하기 시작한 남녀 주인공이 서로 알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몬탁 해변에서 처음 만난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행복했던 모습.

몬탁 해변에서 처음 만난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행복했던 모습. ⓒ 코리아픽처스 , (주)노바미디어


밸런타인데이에 몬탁 해변에서 만난 조엘(짐 캐리)과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은 서로에게 호감을 갖는다. 밤새 함께 한 두 사람은 다시 조엘의 집으로 가기로 한다. 클레멘타인은 짐을 챙기고 나오며 가져온 우편물 안의 카세트테이프를 별 생각 없이 조엘의 차안에서 튼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테이프에서 조엘에 대한 클레멘타인의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전 클레멘타인인데, 조엘의 기억을 지울게요. 너무 따분한 것도 지우는 이유가 되나요? 그 사람하고 같이 있으면 제 자신이 싫어져요. 보는 것조차 가소롭고 비굴한 미소라니! 완전 시들해 졌어요..."

충격에 휩싸인 두 사람, 갑작스런 상황이 당혹스럽다. 처음 만난 줄 알았던 두 사람은 불과 며칠 전까지 연인이었고 권태로운 갈등을 견디지 못해 헤어졌으며 기억을 삭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부분에서 영화 진행에 중요한 힘을 실어주는 조력자가 나온다. 조엘의 기억을 삭제하는 자리에 함께 했던 라쿠나사 직원 메리다. 그녀는 조엘의 기억이 삭제되던 날, 자신도 기억을 삭제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고 그로인한 충격에 휩싸인다. 아무리 애써도 지워진 기억은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망연자실한 메리는 자신처럼 기억을 없앤 사람들에게 사실을 알리고자 그들의 이야기가 담긴 테이프를 우편으로 보낸다. 아무리 알고 싶어도 기억해 낼 수 없는 과거,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불편했다.

"하워드 박사의 모든 환자분께,
…… '너무 끔찍한 일'이라 여러분의 파일을 돌려 드립니다."

또 다른 이야기는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과거가 어떻게 삭제됐는지 보여준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기억을 삭제당하지 않으려는 조엘의 저항은 점점 커진다. 심지어 그의 저항은 삭제작업을 하고 있는 라쿠나사 직원들의 대화에 반응을 할 정도다.

 기억이 삭제된 사실을 알고 되돌아가던 클레멘타인에게 다시 시작하자고 하는 조엘.

기억이 삭제된 사실을 알고 되돌아가던 클레멘타인에게 다시 시작하자고 하는 조엘. ⓒ 코리아픽처스 , (주)노바미디어


기억을 삭제하는 이야기에는 놀랍도록 재미있는 상상력이 동원됐다. 기억이 사라지는 과정은 주변의 사물들이 없어지는 것으로, 건물이 해체되거나 사람들의 얼굴 윤곽이 없어지는 것 등으로 표현된다.

재미있는 것은 영화의 전체 내용이 되는 두 이야기가 하나의 신으로 연결되도록 배치했다는 점이다. 2004년 밸런타인데이에 처음 만난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이야기와 과거 시간 축에 해당하는 삭제 과정은 오프닝 첫 장면에 나오는 '자동차 시동 거는 소리'를 기점으로 연결된다. 하나는 시간의 진행방향으로 흐르고 다른 하나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이러한 자잘한 재미가 영화 곳곳에 나온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나 통성명할 때 클레멘타인 노래를 모르는 조엘을 보며 '세계인들이 다 아는 노래인데' 라는 생각을 했었다. 뒤에 가서 알게 되지만 클레멘타인에 관한 기억을 삭제할 때 이 노래의 기억도 삭제되었던 것이다. 이들이 처음 만났던 2년 전에는 노래를 불렀다. 이러한 깨알장면들은 영화를 몇 번 봐야 연결할 수 있도록 편집됐다.

잊고 싶은 기억과 잊고 싶지 않은 간절한 기억들

아픈 기억을 없애버린다는 것, 과연 옳은 선택이었을까? 영화는 묻는다.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설사 지운다 해도 모든 게 지워질까?

영화는 전반적으로 조엘의 입장에서 진행되며 이 질문에 대한 답 또한 조엘의 행동의 변화로 보여준다. 조엘은 클레멘타인이 기억을 삭제했기에 그 반발로 삭제를 선택했었다. 그러나 클레멘타인과 행복했던 기억을 삭제하려하자 무의식중에도 완강히 저항한다. 행복했던 기억이었고 그를 성장하게 했던 기억들이다. 그는 왜 행복했던 기억을 지우지 않으려 버텼던 것일까?

 기억을 삭제당하지 않으려 조엘의 어린시절로 도망간 조엘과 클레멘타인. 이 신을 촬영하려고 실제 큰 식탁과 냉장고를 제작했다고 한다.

기억을 삭제당하지 않으려 조엘의 어린시절로 도망간 조엘과 클레멘타인. 이 신을 촬영하려고 실제 큰 식탁과 냉장고를 제작했다고 한다. ⓒ 코리아픽처스 , (주)노바미디어


삭제장면에서 특이한 것은 조엘의 어린 시절로 클레멘타인을 데리고 들어간 설정이다. 물론 삭제 당하지 않으려 무의식의 숨을 공간을 찾아 들어간 것이지만, 어쩌면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이 많은 조엘에게 클레멘타인의 진취적이고 씩씩한 모습이 큰 도움이 되었는지 모른다. 클레멘타인을 현재의 모습으로, 조엘을 어린 시절 모습으로 작게 묘사한 것은 클레멘타인을 만나기 전 조엘의 소심함이 어린 시절 그대로 내면화된 채 성장했음을 보여준 듯하다. 클레멘타인의 존재가 자신에게 큰 힘이 되었음을 조엘은 무의식 상태에서도 자각하고 있었다.

영화로써 중요한 지점은 기억삭제 과정에서 보여준 조엘의 완강한 저항이다. 그는 영원히 간직하고 싶었던 일, 고마웠던 기억들을 버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기억삭제라는 허상의 개념을 끌어와 판타스틱하게 만든 영화는 사람들의 교류에서 일어나는 어려움을 결국 현실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긴다.

우리 몸은 뇌뿐만 아니라 통합적으로 기억학다. 몸으로 기억되는 것, 행동으로 무의식중에 튀어나오는 것, 역시 기억의 범주에 속하지만 그것까지 없앨 수 없었다. 그렇다면,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다시 같은 과정을 밟아가며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영화'이터널선샤인' 미쉘공드리 감독 짐 캐리 케이트 윈슬렛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