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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오전 서울 마포구 상암동 SBS 프리즘 타워에서 SBS와 한국기자협회 공동주최 대선후보 합동토론회가 열릴 예정인 가운데, 언론노조 조합원들이 해직 언론인 복직과 언론정상화를 요구하며 피켓시위를 벌이고 있다.
▲ "해직언론인 복직! 언론정상화!" 대선후보 토론장앞 구호 13일 오전 서울 마포구 상암동 SBS 프리즘 타워에서 SBS와 한국기자협회 공동주최 대선후보 합동토론회가 열릴 예정인 가운데, 언론노조 조합원들이 해직 언론인 복직과 언론정상화를 요구하며 피켓시위를 벌이고 있다.
ⓒ 국회사진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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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제21조 제1항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

서슬퍼런 유신시절 각 언론사에는 중앙정보부 기관원들이 상주했다. 이들은 기사를 검열했고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기사는 보도하지 못했다. 시민들의 유신 반대 시위는 끊이지 않았지만 이를 보도하는 언론은 없었다.

국가의 감시 하에 진실을 담지 못하는 언론의 모습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던 동아일보 기자 180여 명은 1974년 10월 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했다. 그리고 '신문 방송 잡지에 대한 어떠한 외부간섭도 우리의 일치된 단결로 강력히 배제한다', '기관원의 출입을 엄격히 거부한다', '언론인의 불법연행을 일체 거부한다'는 3개 항의 결의를 채택했다. 동아일보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선언'에 이어 10월 24일 밤 조선일보 기자들이 '언론자유회복을 위한 선언문'을 채택했다. 더 나이가 이틀 사이 전국의 31개 신문·방송·통신사 기자들이 자유언론수호를 위한 결의문과 지침을 채택했다.

정부의 대응은 즉각적이었다. 중앙정보부는 동아일보사의 광고주들을 남산으로 불러 동아일보, 동아방송, 여성동아 등 계열사 광고 취소 강요했다. 모든 광고가 끊겼지만 동아일보는 이에 굴하지 않고 광고 없는 흰 지면을 그대로 내보내 저항했다. 그러자 수많은 시민들은 주머니를 털어 동아일보의 광고지면을 채워주었다.

하지만 시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자유언론의 상징이 되어가던 동아일보사는 정부의 압력에 굴복해 돌연 기구 축소를 이유로 기자 및 사원들을 해고했다. 기자들은 제작거부와 농성으로 저항했다. 그러나 동아일보사는 부당해고에 저항하는 기자들까지 추가로 해고했고 당시 해직된 직원은 총 150여 명에 달했다. 동아일보 해직기자들은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를 결성하여 오늘까지 활동하고 있다.

안종필은 당시 해직된 기자 중 한 명이었다. 동아일보 자유언론실천선언에 간부 기자(편집부 차장)으로는 드물게 참여했던 그는 해직 뒤 동아투위 위원장을 역임하고 언론에 보도되지 않는 소식들을 모은 민주인권일지를 발행했다. 민주인권일지의 발행으로 구속된 그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암살되고 그해 12월 4일 구속집행정지로 석방될 수 있었다. 그러나 옥중에서 얻은 간암으로 출소 후 3개월 만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는 성동구치소 수감시절 찾아온 지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새 시대가 와서 우리가 언론계에서 다시 일할 수 있게 될 때, 신문은 어떻게 만들고, 경영은 어떻게 해야 할까? 가로쓰기에 한글전용을 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 신문은 너무 식자층 중심으로 제작되고 있는데, 민주를 위한 진정한 신문이 되기 위해서는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한글전용을 해야 돼. 편집도 지금처럼 정치·경제·사회·문화 이런 식으로 나눌 것이 아니라 종합편집을 해야 해. 새 시대가 오면, 국민들이 골고루 출자해서 그들이 주인이 되는 신문사를 세우는 것이 가장 바람직해. 그렇게 되면 편집권은 독립될 수 있어."

동아투위를 그의 업적을 기려 '안종필 자유언론상'을 제정하여 운영하고 있다. 박정희의 죽음으로 잠시 찾아왔던 서울의 봄은 전두환 군부에 의해 다시 짓밟혔다. 하지만 전두환 군사정권 또한 시민들의 저항에 오래 버티지는 못했다. 1987년 6월 항쟁에 전두환 정권은 백기를 들었다. 그리고 국민이 주인 되는 신문을 만들어야 한다는 안종필의 외침은 15년 만에 동아투위가 주축이 된 민주언론세력에 의해 되살아났다.

참언론을 만들고자 국민주 방식의 모금이 진행됐다. 자유언론에 대한 국민들의 성원은 대단했다. 2만7223명의 시민들은 100일만에 50억 원의 자금을 모아주었다. 1988년 5월 15일 안종필의 외침대로 한글전용, 가로쓰기를 채택한 국민이 주인인 새로운 신문이 시민들의 염원을 담아 창간되었다. 한겨레신문이다.

한겨레신문의 창간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웠던 점은 자금이었다. 시민들에 의해 모인 50억 원은 1988년 서울의 평균 아파트값은 3.3㎡당 300만 원이었음을 고려해 보면 엄청난 금액이었다. 그런데 신문사 창간에 이정도로 큰 금액이 필요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신문사는 기자와 직원들만으로 운영되지 않는다. 신문을 인쇄하려면 고가의 장비인 윤전기가 있어야 한다. 인쇄된 신문을 독자들에게 배달하기 위해서는 전국 각지에 지국도 갖춰야 했다. 때문에 50억 원이라는 큰 돈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만큼 언론사의 진입장벽은 높았다.

지금은 1988년과 언론환경이 많이 바뀌었다. 인터넷의 발전으로 윤전기와 지국은 더 이상 신문사의 필수조건이 아니다. 지면보다 웹페이지를 통해 기사를 읽는 독자가 훨씬 많아졌다. 인터넷에서는 간단한 편집만으로 기사를 송고할 수 있고 전국 어디서나 읽을 수 있다. 윤전기와 지국 없이도 언론사를 운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진입장벽이 낮아졌다.

인터넷의 발달로 언론사의 진입장벽이 낮아지자 다양한 언론사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특히 소규모 인터넷 언론사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지역이나 소수자들에 대한 이야기와 같이 기성 언론의 관심에 들지 못했던 사건들이 보도되는 등 언론의 다양성 측면에서 큰 발전이 이루어졌다. 근래에는 1인 미디어까지 만들어지면서 언론사의 진입장벽이 거의 없어졌다. 특히 인터넷 방송의 일종인 팟캐스트의 등장은 신문뿐만 아닌 방송에서까지 진입장벽을 허물어 버렸다.

헌법 제21조 제1항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규정하고 있다. 이를 통틀어 표현의 자유라 한다. 헌법이 표현의 자유를 규정하고 있는 것은 민주주의는 국민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가정책은 국민들의 다양한 의견이 경쟁을 통해 수렴되는 과정에서 세워진다. 언론과 출판은 국민들의 자유로운 표현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표현의 자유가 담보된다 하더라도 그것을 담을 그릇이 없다면 의미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 그릇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다양한 국민들의 목소리를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언론의 다양성이 보장되어야 하는 이유다.

그런데 2015년 박근혜 정부는 언론의 다양성을 심각하게 훼손시킬 우려가 깊은 정책을 도입하려 했다. '신문 등의 진흥에 관한 법률(신문법)' 시행령을 개정하여 상시 고용인원이 5인 미만인 언론사에 대한 인가를 취소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고용보험 등 5인 이상 고용을 증빙할 수 있는 서류의 제출을 각 언론사에 요구했다. 소규모 인터넷신문들이 생겨나면서 언론의 질이 저하되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상시고용인원 5인은 인터넷신문사에게는 상당히 큰 장벽이었다. 취재 전담기자 1인을 확보하지 못한 언론사가 흔했다. 많은 경우 편집장이 취재기자를 겸임했다. 자리가 잡힌 언론사도 편집장 겸 취재 1인을 포함한 기자 2명에 행정 1인, 3인체제로 운영되는 곳이 많았다. 기성언론이 담아내지 못하는 소수의 이야기를 주로 다루는 인터넷신문은 많은 독자를 확보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몇몇 성공한 인터넷신문을 제외하고는 광고수입만으로 신문사를 운영하기 버거운 수준이었다. 그렇기에 상시 고용인원을 5명으로 늘리는 것은 인터넷신문에게는 충족하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인터넷 언론사들은 신문법이 언론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다. 2016년 헌법재판소는 "신문법 시행령의 고용조항은 소규모 인터넷신문이 언론으로서 활동할 수 있는 기회 자체를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있음에 비하여, 인터넷신문의 신뢰도 제고라는 입법목적의 효과는 불확실하다는 점에서 법익의 균형성을 잃었다"고 판단했다(헌재 2016. 10. 27. 2015헌마1206 등).

언론의 신뢰는 독자가 판단하는 것이다. 독자에게 신뢰를 잃은 언론은 자연스럽게 도태될 것이다. 그리고 허위·왜곡 보도가 주로 소규모 인터넷신문을 통해 양산된다는 보장도 없었다. 이에 더해 허위·왜곡 보도는 정정보도요청이나 언론중재위와 같은 해결책을 강구해야지 언론사를 없애는 방식으로 해결될 것은 아니다.

1988년 한겨레신문의 창간에 수많은 국민들은 직접 주식을 사면서 응원을 보냈다. 이는 기성 언론들이 외면한 자신들의 이야기를 담아 줄 언론이 간절히 필요했기 때문이다. 보수 색체가 강한 언론들만 존재했던 당시 한겨레신문의 등장은 한국 언론지형에 일대 균열을 일으켰다.

언론의 다양성 확보라는 측면만으로도 한겨레신문의 존재이유는 충분했다. 하지만 한겨레신문의 등장에도 보수 언론이 언론시장에서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지형은 계속되었다. 언론의 다양성이 다시 확보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초반 인터넷신문이 등장하면서 부터였다. 신문법 시행령의 개정은 이러한 언론의 다양성이 확보되는 환경을 차단하겠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신문법 시행령에 대한 위헌판결로 수많은 인터넷신문이 문을 닫는 상황은 모면했다. 하지만 언론의 다양성 측면에서 나아가야 할 길은 아직 멀다. 몇몇 대형 포털사이트가 지배하고 있는 인터넷 기사의 유통구조, 그에 따른 인터넷신문사들의 포털에의 종속, 재정적 어려움 등 인터넷신문사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은 다양하다. 앞서 살펴본바와 같이 민주주의 체제는 언론이 다양해야 건강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인터넷신문사의 존속을 넘어 발전과 확대를 모색해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광민 변호사는 부천시 청소년법률지원센터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태그:#표현의 자유, #한겨레신문, #언론,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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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사무소 사람사이 대표 변호사다. 민변 부천지회장을 역임했고 현재는 경기도 의회 의원(부천5, 교육행정위원회)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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