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민에게서는 더는 김성룡이 보이지 않았다. 배우의 전형이 있다면 저런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을까. 그는 어느새 다시 남궁민 본인으로 돌아와 있었다. 한껏 올린 노란 앞머리도 다시 내렸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말투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김성룡으로 지내는 3개월 동안 하루도 쉬지 못했다고 한다. 언론 인터뷰가 예정돼 있던 지난 11일, 남궁민은 지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기자들을 맞았다.

남궁민이 "지금껏 연기한 캐릭터 중 나와 가장 다르다"고 한 김성룡으로 분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과 그의 연기론, 그리고 "다음 작품은 더 잘해낼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는 그 자신감의 이유를 묻고 들었다. 현장에서는 질문과 답변이 오갔지만, 그의 대답을 최대한 녹이고자 기사는 질답 없이 독백 형식으로 처리했음을 미리 밝힌다.

남궁민의 연기론

"<김과장> 끝나고 건강이 안 좋아졌다. 작년 12월 21일부터 드라마 촬영을 했고 끝날 때까지 하루도 쉬지 못했다. 쓰러질 줄 알았는데 왜 쓰러지지 않았냐고 하는 분도 계시더라. 정말 정신력으로 버텼다. 지금은 그동안 못 잔 잠을 자고 있다. 계속 졸리다. 자고 또 자도 너무 졸리다. 드라마 끝나면 술도 마셔야지 했는데 술 생각도 안 난다. <김과장>은 그만큼 에너지 소모가 심한 작품이었다. 15회까지 내가 안 나오는 신이 없을 정도였으니.

 KBS <김과장> 속 배우 남궁민(김성룡 역) 스틸 사진.

<김과장>의 주인공인 김과장, 안 나오는 신이 없을 정도로 많이 얼굴을 비쳐야 했기에, 그가 져야 할 책임과 부담도 적지 않았다. ⓒ 935엔터테인먼트


일어나서 밥 먹을 때까지 대본을 보고 연기를 연습했다. 특히 여러 사람이 함께 나오는 신은 촬영하는 데도 오래 걸리기 때문에 많이 힘들었다. 잠잘 시간이 없으니 중간에 졸기도 했다. 물론 팀 분위기야 항상 '너무' 좋았다. 힘들어서 처져 있을 때 김원해 선배가 늘 분위기 메이커를 해주셨다. 연기하면서 불편한 사람들이 전혀 없는 드라마였다.

<김과장>을 끝낸 지금은 너무 좋다. '마음 통장'에 저축을 많이 해둔 것 같은 기분? 어느 날 새벽에 SBS <리멤버> 작가님이랑 감독님이 오셨더라. "(남궁)민이 형, 날아다니시던데요?"라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나는 내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꼈다. '이 정도면 잘한다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아니구나!' 그리고 '더 열심히 노력해야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처음 연기를 시작하는 후배들은 20대 초반에 주로 연기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 안 하기 시작하는데 다시 20대로 돌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열정이 생기고 또 나 자신에 대해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사실 김성룡을 연기하기 전에 나는 우쭐할 법할 시기에 와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과장>을 하면서 깨달은 건 내가 연기적으로 너무 많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옛날에는 내가 꺼낼 수 있는 (연기적인) 카드가 되게 많이 있었다. 이 감정을 표현할 때는 이 카드를 내고 다른 감정에서는 다른 카드를. 하지만 이번에는 다양한 카드가 없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작품을 하면서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지' 이렇게 생각했고 이를 계기로 좀 더 연기를 열정적으로 할 수 있게 된 것 같아 오히려 고맙다. '나 잘하는데?'가 아니라 '나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지?'로. 나도 한 19년 정도 연기를 했다. 사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쉽지 않다.

만약 <김과장>을 하지 않았다면 정체기를 가졌을 수도 있는데 연기자로서 방향과 목표가 생긴 것 같다. 칼을 계속 갈고 있어야지, 누군가 잘한다고 말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것에 만족해 고인 물이 되면 안 되겠구나, 계속 흘러가는 사람이 돼야겠구나 싶었다. 그러려면 더 열심히 해야 한다. 관련 자료도 좀 찾아보고 시대의 흐름에 벗어나지 않게 후배들 연기도 살펴보고, 다른 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연기하는지도 좀 보고. <김과장>에서도 열심히 연기했지만, 다음 작품은 더 좋은 연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배우 남궁민 프로필 사진

<김과장>을 통해 얻은 자신감. 남궁민은 다음 작품에서 더 좋은 연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밝혔다. ⓒ 935엔터테인먼트


물론 상이야 받으면 좋지만, 욕심은 전혀 없다. 굳이 <김과장>으로 타지 않아도 다음 작품이 더 좋을 것이라 확신하기 때문에. 상을 받으면 너무 좋겠지만 그래서 욕심이 전혀 없다. 물론 주면 좋겠지만. (웃음)

내 목표는 좋은 감독과 좋은 작가가 있는 드라마나 영화를 만나 어떤 역할이든지 그 캐릭터에 대한 호불호 없이 100% 잘 소화해내는 것이다. 연기할 때도 머물러 있지 않고 칼날이 계속 잘 다듬어져 있는 것처럼 하고 싶다. 하다 보니까 여기까지 왔다. 나는 정말 단역, 엑스트라도 많이 해봤고 아침드라마나 주말·일일 드라마 안 거친 것 없이 왔다. 남들이 하는 건 다 했던 것 같다. 연기적인 부분에서 스스로를 인정해버리면 끝인 것 같다. 어색하더라도 계속 도전하려고 노력할 거다."

남궁민이 준비한 것들

"<김과장>은 처음 대본을 4권 정도 봤고 이 정도 대본이면 인정도 받고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나는 작품이 '이 정도 되는' 대본이니까 이게 흥행하지 못하면 감독님과 내 탓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자신 있어 했다. 일단 재미있지 않나? 잠깐을 봐도 웃을 수 있지 않나? 그래서 좋았던 것 같다. 왜 '사이다 드라마'라고 하지 않나. 그게 인기 요인이 아니었을까. '사이다 엔딩'을 매번 맡아서 해왔기 때문에 매 회마다 다음 엔딩은 좀 더 잘해봐야지 하는 욕심이 생기더라. 그래서 엔딩에 대한 부담감이 조금씩 생겼다.

특히 코미디 장르를 할 때는 사람들이 보고 웃어야 한다. 그래서 <리멤버>에서 악역을 맡았을 때보다 <김과장>이 더 힘들더라. '신 바이 신(scene by scene)'으로 웃겨야 하고 집중력이 저하되면 코미디 연기를 할 수 없는 상황이 생기기 때문에 힘들었다. <리멤버>에 누구였더라? 아 남규만, 벌써 생각이 안 나네. 남규만은 어느 정도 집중이 되니 나중에는 대사만 외워도 될 정도로 편했는데 김성룡은 나랑 다른 부분이 너무 많았다. 지금까지 내가 맡았던 캐릭터 중에 가장 나 같지 않은 캐릭터였다. 다른 사람을 연기한다는 게 참 힘들다. 잠깐 방심하면 남궁민의 리액션이 나오니까. 그런 건 지양해야 하지 않나.

 KBS <김과장> 속 배우 남궁민(김성룡 역) 스틸 사진.

KBS <김과장> 속 김성룡으로 분한 남궁민. "지금껏 연기한 캐릭터 중 나와 가장 다르다" ⓒ 935엔터테인먼트


일단 김성룡은 생각하는 방식 자체가 나랑 너무 다르다. '또라이'고 적극적인 사람이고, 나는 소심하고 소극적이고 신중하다. 두 번째로 나는 말을 그렇게 빨리하지 못한다. 목소리는 '하이톤'을 이용하면서 성대를 쪼았다. 원래 내 말투가 좀 느린 편인데 내가 봐도 너무 빨리 이야기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빨리빨리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뻔뻔함? 아직 김성룡의 표정을 지을 수 있는데 (순식간에 그의 얼굴에 김성룡이 나타났다) 사실 아직 김성룡이 다 빠져나가지 않은 것 같은데 이제는 조금 비슷해진 것도 같다. 드라마를 처음 했을 때는 매 신마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계산했는데 지금은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의 제스처가 나오는 것을 봐서 비슷해지는 것 같다.

외적으로 캐릭터를 잡아갈 때는 목소리를 포함해 헤어 스타일이나 의상도 내가 콘셉트를 잡았다. 얼굴 표정을 많이 써야 하는 캐릭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마가 보이는 짧은 머리가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머리색은 군산에서만 노랗게 하려 했는데 스케줄이 바빠 염색을 할 수가 없더라. 사실 머리색이나 외모는 연기적으로 열심히 하려고 시도한 건데 마음에 들진 않더라.

그리고 옷! 그런 곳이 있다. 강남역 같은 곳에 가면 만 원에 두 개 정도 파는 옷집이 있다. 거기 가면 모피 코트 하나에 4~5만 원씩 한다. 그거 다섯 개 정도 샀는데 '덕포 선생님'(김응수 분)이 모피를 입어 모피를 사지 못했다. 나중에는 곰팡이가 너무 슬어 세탁비가 옷값보다 훨씬 많이 들게 생겼고 집에 갖고 있기도 그래서 스타일리스트에게 줬다. 또 김과장 하면 노란색 재킷이 떠오르는데 그거 다 내가 산 것이다. 하나에 만 원도 안 한다. 그런 식으로 외면을 만들었다.

한국 사람들은 보통 서서 이야기할 때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말하거나 손발을 많이 움직이지는 않는다. 다이나믹한 연기를 위해 어떤 행동이 있을까 고민했고 움직임을 많이 줘보자 싶었다. 얼굴도 많이 쓰고. 본인을 외국 사람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면 어떨까? 그 전까지 안면 근육을 많이 사용하는 연기 스타일을 지양하는 편이었다. 눈빛 연기를 할 때도 눈빛만 갖고 연기한다든지. 이런 것들을 많이 연구했다. 왜 연구를 할 수밖에 없었냐면 내 사고방식 그대로 사고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거다. 내가 평소에 하지 않는 움직임이나 옷을 많이 고민했던 것 같다.

 배우 남궁민 프로필 사진

많은 사람과 어울리며 '케미'를 만들어냈다. 그 화학작용의 중심에 그가 있었다. ⓒ 935엔터테인먼트


나는 연기를 할 때 상대 배우의 말을 진짜로 들으려고 많이 노력한다. 가끔은 이 사람 말을 듣다가 내 대사를 못 할 때도 있다. 이 사람 말을 들어보니 이 대사가 안 나오는 순간이 있다. 분명히 대본을 봤을 때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는데, 막상 말을 들으면 그 대사가 아닌 거다. 그 정도로 상대방 이야기를 많이 들으려고 한다.

가끔 '벽' 같은 분들이 있다. 외워온 것대로만 하시는 분들. 내가 다른 감정을 갖고 다르게 이야기를 해도 대본에 있는 그대로 이야기를 한다. 이번에 연기한 분들은 모두 유동적이고 열려 있는 사람들이라 정말 편했다. '케미'(케미스트리)라고 하는 그런 것들이 조금씩 생기는 것 같고. 나는 연기적인 칭찬 중에 '케미가 있다'는 칭찬이 가장 좋다. 많은 사람과 어울릴 수 있다는 건 그 사람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을 수 있다는 소리니까."

남궁민 김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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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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