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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동서추리문고'와 그 복간본인 '동서미스테리북스(DMB)' 시리즈는 국내 미스터리 팬들에게 유명한 문고 시리즈입니다. 미스터리 장르에 관심있는 독자라면 누구나 이 시리즈 한 권쯤은 읽어 봤을 것입니다.

일본의 문고 시리즈를 거의 그대로 가져와 중역한 것이라 번역 수준이 작품마다 들쭉날쭉해서 읽기는 불편하지만, 미스터리 역사의 명작들을 여러 편 소개했다는 점은 평가받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이 시리즈를 통해서가 아니면 우리말로 읽을 수 없는 작품들이 여럿 있으니까요.

스웨덴 부부 작가 페르 발뢰와 마이 셰발 - 동서판 표기로는 펠 바르와 마이 슈발 - 이 쓴 <웃는 경관>도 그런 작품 중 하나였습니다. 읽으면서 원본이 어땠을지 여러모로 추측해야 할 정도로 번역이 아쉬웠지만, 끔찍한 대량 살인 사건의 전모를 차근차근 밝혀 나가는 마르틴 베크라는 형사와 그의 개성 강한 팀원들의 이야기는 남다른 재미가 있었습니다.

나중에야 이 책이 같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10권짜리 시리즈 중 네 번째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나 이 시리즈가 한국어로 번역돼서 정식으로 출간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죠. 작품의 시대 배경도 60, 70년대이고, 출판 시장에서 잘 팔리는 영미권이나 일본 작품도 아니니까요.

 <로재나>의 표지.
 <로재나>의 표지.
ⓒ 엘릭시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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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문학동네의 미스터리 전문 브랜드 엘릭시르에서 이 시리즈의 1, 2권 <로재나>와 <연기처럼 사라진 남자>를 출간했을 때 좀 놀랐습니다. 기대하지 않았던 반가운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죠. 향후 순차적으로 10권 모두를 완간할 계획이 있다고 합니다.

첫 권인 <로재나>는 국제적인 관광지로 유명한 스웨덴 운하에서 신원 불명의 여성이 살해된 채로 발견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마르틴 베크는 사체가 발견된 지역으로 파견되어 사건 수사를 돕지만, 여성의 신원이 미국인 관광객 '로재나 맥그로'라는 것을 알아낸 것 외에는 별다른 단서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이에 마르틴 베크와 그의 팀원들은 사고 당시 로재나가 탔던 유람선의 승객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는 지난한 작업에 착수합니다. 이 과정에서 찾아낸 실마리들은 사건 발생 반년 후 용의자의 신원을 특정하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둘째 권 <연기처럼 사라진 남자>에서 마르틴 베크는 헝가리로 파견됩니다. 갑자기 사라진 동유럽 담당 신문기자의 행방을 찾아 달라는 외무부의 요청이 왔기 때문입니다.

뭔가 정부 차원의 큰 일과 관련 있는 듯하여 부담을 느끼긴 하지만, 마르틴 베크는 수사의 정석대로 행방불명된 남자의 행적을 차근차근 되짚어 나갑니다. 그 과정에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과 무심코 지나쳤던 사항들을 다시 검토한 마르틴 베크는, 본국에 있는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결국 사건의 진상을 알아내는 데 성공합니다.

부부 작가인 마이 셰발과 페르 발뢰는 부르주아 복지 국가로 자리잡은 60, 70년대 스웨덴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는 추리소설을 쓰고자 했습니다. 미국 작가 에드 맥베인의 유명한 경찰 소설 시리즈인 '87분서 시리즈'에서 영감을 얻어, 마르틴 베크와 그의 동료 형사들을 주인공 삼아 1년에 한 권씩, 모두 열 권을 내기로 한 것이죠. 각 권은 30장으로 구성하여 분량을 똑같이 맞추었고, 전체 시리즈가 300장으로 된 대하소설처럼 읽히기를 바랐다고 합니다.

이들의 작업 방식은 30장에 대한 개요를 미리 짠 다음, 한 장씩 번갈아 가면서 집필하는 식이었습니다. 불행히도 남편 페르 발뢰는 열 번째 소설을 쓰는 중에 암으로 사망하게 되었고, 남은 분량은 아내 마이 셰발이 혼자서 완성하여 처음 기획했던 10권 모두를 완간하게 됩니다. 지금도 생존해 있는 마이 셰발은 꾸준히 집필 활동을 해왔으며, 직접 쓴 한국어판 서문이 1권 <로재나>에 실려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시리즈의 특징은 지난한 현실 세계의 수사 방식을 그대로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뛰어난 명탐정이 멋들어지게 트릭을 풀어내는 장면도 없고, 호쾌한 액션과 스릴 넘치는 추격전도 없습니다. 다만, 사건에 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관련 인물들을 계속해서 만나고, 확보된 증거를 재검토하는 시간만이 있을 뿐입니다.

사건에 관한 한 좀처럼 포기하지 않는 성격의 주인공 마르틴 베크는 동료 형사들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문제 해결에 이릅니다. 만만찮은 통찰력으로 수사에 가장 큰 도움을 주는 콜베리, 한 번 본 것은 절대 잊지 않는 멜란데르, 미행과 감시에 있어서 따라올 자가 없는 젊은 형사 스텐스트룀 등 개성 강한 캐릭터들의 존재는 이야기의 재미를 더합니다.

 <연기처럼 사라진 남자>의 표지.
 <연기처럼 사라진 남자>의 표지.
ⓒ 엘릭시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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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베크 시리즈는 '87분서 시리즈'와 달리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8'7분서 시리즈'는 배경이 되는 가상의 도시 아이솔라를 일종의 평행 우주처럼 사용하기 때문에, 등장 인물들이 좀처럼 늙지 않습니다. 게다가 책마다 주요 등장 인물이 곧잘 바뀌기까지 하지요.

반면, 이 시리즈는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새로운 팀원이 들어오기도 하고, 누군가는 이혼을 하게 되며, 또 다른 누군가는 살해당하기도 하는 등의 변화를 겪습니다. 주인공 마르틴 베크의 신상 역시 중대한 변화를 맞이합니다.

직업적 성과와 결혼 생활의 행복을 양립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그의 모습은, 북유럽 미스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외로운 중년 형사 캐릭터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웨덴 작가 헨닝 만켈의 쿠르트 발란데르, 노르웨이의 요 네스뵈가 창조한 해리 홀레, 그리고 아이슬란드 작가 아날두르 인드리다손의 에를렌두르 같은 형사들은 모두 이혼했거나 실연당한 과거를 갖고 있습니다.

이들의 우울한 내면은,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행복한 복지 사회에도 그 이면에는 악랄한 범죄가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다는 서글픈 현실 인식이 반영된 것입니다. 범죄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피곤을 무릅쓰고 동분서주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북유럽 사회가 지닌 내적 모순과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국가적 노력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번역을 맡은 김명남의 정갈한 문체는 지난한 수사 과정을 차근차근 따라가는 데 큰 도움을 줍니다. 훌륭한 과학책 번역가로 이름을 알린 그녀는 진작부터 이 시리즈에 깊은 애정을 갖고 출간을 모색해 왔습니다. 개인 블로그에 올린 소개글을 본 출판사의 제안으로 그간의 바람을 이렇게 현실화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기대하던 팬들이 적지 않았던 시리즈인 만큼, 출판사에서도 여러모로 신경 써서 만든 태가 납니다. 표지 디자인도 멋지고, 판형도 들고 다니면서 읽기에 딱 좋은 크기입니다. 각 권마다 붙어 있는 작가들의 서문과 해설도 시리즈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기왕 시작했으니, 애초의 계획대로 전체 10권 모두를 무사히 출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덧붙이는 글 | 권오윤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 http://cinekwon.wordpress.com/에도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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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에 관심 많은 영화인. 두 아이의 아빠. 주말 핫케익 담당.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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