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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지미 마을에 대한 1989년 3월 2일자 <경향신문> 기사.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공존하고 있는 고층 아파트 단지와 허름한 주택들"이란 표현이 인상적이다. 이제는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노후 아파트와 젊은 아파트'가 공존하는 시대가 됐다.
 엄지미 마을에 대한 1989년 3월 2일자 <경향신문> 기사.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공존하고 있는 고층 아파트 단지와 허름한 주택들"이란 표현이 인상적이다. 이제는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노후 아파트와 젊은 아파트'가 공존하는 시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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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지미 마을이라고 했다. 엄지산, 지금의 용왕산 품에서 "농사를 짓고 배 타고 한강을 오가며" 사는 사람들 마을을 그렇게 불렀다고 했다. 오래 전 한 신문은 그 마을을 접한 소감을 이렇게 표현했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공존하고 있는 고층 아파트 단지와 허름한 주택들. 한 동네에 살고 있으면서도 빈부로 갈라진 마음의 거리는 멀게만 느껴진다"고 전했다.

지금 봐서는 매우 생경하게 들릴 이야기다. 1992년 4월 아파트가 들어섰고, 그 자리는 금싸라기 땅이 됐다. 서울 목동 우성 1차 아파트 이야기다. 그때나 지금이나 햇볕이 잘 들어 따뜻하긴 여전하고, 게다가 "전국에서 학원 밀집도가 가장 높을 만큼, 학군이 좋아 젊은 세대들도 선호하는 곳"이 됐다. 여러모로 살기 좋은 아파트 주민들에게는 다만, 큰 고민 덩어리가 있었다.

그 무게가 2013년 1월 관리비 명세서를 보니 실감이 났다. '납부하실 금액'이 61만3080원이나 됐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116㎡형(35평) 아파트에 거주함으로써 생기는 부담치고는 만만찮은 금액임이 분명하다. 지은 지 오래 된 아파트일수록 난방비, 수리비, 장기수선충당금 등 때문에 관리비가 비싸다는 말도 함께 실감이 났다. 그런데 이 명세서가 4년 후에는 이렇게 바뀌어 있었다. 납부하실 금액, 41만1120원. 목동 우성 1차 아파트에는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전국적 이야기, '엄지미 마을' 이야기

목동 우성 1차 아파트 입주자 대표 이윤표씨가 인터뷰 과정에서 공개한 아파트 관리비 명세서들. 아파트에 통합 배관 방식을 적용한 후 관리비를 20만원 가량 절약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목동 우성 1차 아파트 입주자 대표 이윤표씨가 인터뷰 과정에서 공개한 아파트 관리비 명세서들. 아파트에 통합 배관 방식을 적용한 후 관리비를 20만원 가량 절약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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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명세서를 공개한 이윤표(63·남) 입주자 대표로부터 지난 7일 그 이야기를 직접 들어봤다. 처음에는 단순한 이야기로 들렸다. 배관을 싹 뜯어고친 결과였다. 하지만 어떻게 싹 뜯어고쳤는지, 그 이야기가 자못 흥미로웠다.

우리나라 아파트는 4배관 방식을 택하고 있다. 방을 따뜻하게 만드는 난방용 배관, 따뜻한 물이 나오도록 하는 온수용 배관을 분리하고 있다. 그래서 필요한 배관 숫자는 4개다. 하지만 우성아파트는 이 숫자를 2개로 줄였다. 난방용 배관, 온수용 배관 구분 없이 하나의 배관으로 통일했다. 각 가정에 공급되는 열원을 이용해 온수를 만드는 방식을 택했으니 따로 따로 배관이 필요 없다.

이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장치가 '퓨어화(Pure-HWA)'라 불리는 가정용 열교환기다. 이 장치가 배관을 타고 흐르는 열원을 이용해 각 가정에 온수가 나오도록 한다. 그러니까 기존 방식이 "기전실에 있는 열교환기가 물을 끓여 각 가정으로 쏴 주는 것"이라면, 그 기능을 각 가정에서 알아서, 개별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합 배관 방식이라고 한다. 4배관을 2배관으로 줄여 그런 이름이 붙여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소비자 측면에서 명명한다면 '개별 이용 배관 방식'이다. 국내에서는, 상업적으로는 최초로 우성 1차 아파트가 2014년 선택한 방식이다. 그러니 그 선택이 쉬웠을 리 없다. 주민들 사이에 진통 또한 없었을 수 없다.

이 대표도 인정했다. "주민들 사이에 이견이 있었지만, 동 대표들과 함께 앞서 시공된 현장을 방문해 견학하고, 설명회를 갖고, 설문조사를 거쳤다"고 했다. 그리고 주민들이 합의에 이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이 대표는 "적어도 이 문제를 빨리 해결해야 한다는 데 주민들이 공감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배관이 썩어 시뻘건 물이 나오는" 상황이었다고 했다. 당장 고쳐 써야 하니 장기수선충당금을 계속 "까먹을 수밖에" 없었고, 또 그대로 놔둬서는 아파트 값 떨어지는 것도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 절박한 문제의 당사자도, 해결의 당사자도 결국 주민 스스로가 돼야 했다.

가장 큰 장점 "공평하고 정의로운 계산 방식"

목동 우성 1차 아파트 관리 사무소에서 이충선 관리소장이 계량기 정보 시스템을 통해 각 가정의 사용량을 확인하고 있다.
 목동 우성 1차 아파트 관리 사무소에서 이충선 관리소장이 계량기 정보 시스템을 통해 각 가정의 사용량을 확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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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동 우성 1차 아파트에 적용된 '통합 배관 시스템'은 각 가정마다 '퓨어화'라 불리는 열교환기를 각각 갖추고 있다. 각 가정마다 언제든, 얼마나 썼는지를, 스마트폰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목동 우성 1차 아파트에 적용된 '통합 배관 시스템'은 각 가정마다 '퓨어화'라 불리는 열교환기를 각각 갖추고 있다. 각 가정마다 언제든, 얼마나 썼는지를, 스마트폰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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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너무 깨끗해서 좋고요. 조금만 틀어도 난방이 잘 되고 관리비에 급탕비 안 나오는 것에 대해서 너무 좋고 이 물이 틀면 먼저 수돗물 냄새와 조금 틀려요. 수압도 세고 손을 닦아보면 확실히 피부가 좋은 것 같아. 물이 좋아요." (한 인터넷방송에서, 목동 우성 1차 아파트 주민, 황 아무개씨)

당장 수질이 좋아진 것을 통합 배관 방식 때문만이라 볼 수는 없다. 목동 우성 1차 아파트는 정부가 녹이 슬지 않는 구리 동관을 쓰도록 한 1994년 4월 이전에 준공된 곳이다. 그런 배관을 싹 바꿨으니 예전보다 훨씬 깨끗한 물을 쓸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2배관을 선택한 덕분에 기존 4배관 방식에 비해 남과 함께 쓰는 '물의 통로(배관)'가 줄어들었으니 깨끗한 물의 '지속 가능성'은 높아질 수 있다. 일종의 '덤'이다.

주민들에게 또한 크게 다가올 장점은 일단 '돈이 된다'는 것이다. 앞서 소개했던 이 대표의 관리비 명세서를 보면, 2014년 1월에 비해 난방비 부담이 11만원 가량 줄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몫을 차지했던 온수비(59,720원)와 급탕용수비(8,250원) 항목은 아예 없어졌다. 큰 고민 덩어리가 해결된 덕분에 5만원이었던 장기수선충당금이 1만원으로 줄었으니 이 또한 좋은 일이다.

이 대표에게만 적용되는 이야기는 물론 아니다. 관리사무소 측에서 공개한 자료를 보면 2013년 목동 우성 1차 아파트 주민 332세대가 지출한 난방비 총액은 3억3287만원, 2016년 경우는 2억5775만원으로 7천5백만원 가량 감소했다. 2억6천만원에 이르렀던 전기료 총액 역시 2016년 1억9787만원으로 줄어들었다. 둘을 더하면 그 절감 효과는 1억3731만원에 이른다.

하지만 이 대표가 '통합 배관 시스템'의 더 큰 장점으로 꼽은 것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공평하고 정의로운 계산 방식"이었다. 이 아파트에 시공된 시스템은 '통합 배관용 텔리메터링 방식'을 갖추고 있다. 가정마다 따로따로 열교환기를 갖추고 있다. 그러니 각자 이를 통해 언제든, 얼마나 썼는지를, 스마트폰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사용량이 정확히 나오니 공동 난방비 산정 과정에서 이전보다는 훨씬 더 주민들 사이에 합리적인 합의가 가능하다. '숫자'에 대한 신뢰가 높아진 결과다. '난방열사' 김부선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국가가 방치하고 있어요, 눈감고 있는 거죠"

목동 우성 1차 아파트 주민들의 통합 배관 방식 선택이 물론 쉬웠던 것은 아니다. 이윤표 입주자 대표는 "주민들 사이에 이견이 있었지만, 동 대표들과 함께 앞서 시공된 현장을 방문해 견학하고, 설명회를 갖고, 설문조사를 거쳤다"고 말했다.
 목동 우성 1차 아파트 주민들의 통합 배관 방식 선택이 물론 쉬웠던 것은 아니다. 이윤표 입주자 대표는 "주민들 사이에 이견이 있었지만, 동 대표들과 함께 앞서 시공된 현장을 방문해 견학하고, 설명회를 갖고, 설문조사를 거쳤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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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약점도 있다. 이 대표는 우선 시공이 다소 까다롭다는 점을 들었다. 가정마다 열교환기를 장착해야 하다보니 상황에 따라 공간 확보에 어려움이 생기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이 대표는 "새 아파트를 시공하는 경우 적용하면 더 좋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공평하고 정의로운 계산 방식' 또한 이용자에 따라 불편하게 다가올 수 있다. 스마트폰 사용에 익숙하지 않은 가정의 경우는 '귀차니즘'이 발동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사용법 숙지 여부에 따라 이 시스템을 잘 사용하는 데 제한이 따를 수 있다.

혹시 기기가 망가졌을 경우도 신경 쓰인다. 물론 배관과 '퓨어화(가정용 열교환기)'에 대해 각각 A/S 계약이 체결돼 있지만, 이 시스템을 개발하고 시공한 업체가 그 규모가 작다. '혹시 망하면 어쩌나?' 하는 염려를 완전히 떨치긴 어렵다. 그 때문에 이 대표는 "부품 일정량을 미리 확보해 놓은 상태"라고 말했다. 어쨌든 시중에서는 매우 귀한 시스템이니 말이다.

이런 궁금증이 뒤따랐다. 이 대표는 도대체 어떻게 이런 '귀한' 정보를 알게 됐을까. 그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주민 중 지역난방공사에 근무하는 이가 있었고, 그를 통해 시스템의 유효성이 실증 단계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이었다. 구성이엔드씨란 업체가 특허 개발한 이 통합 배관 방식은 강서구 가양동 소재 한강타운 아파트 60가구를 대상으로 한 설비 실증 실험에서 그 에너지 절감 효과를 입증했다고 한다. 이 대표로서는 '운'이 좋았던 셈이다. 일반적으로야 어디 바쁜 생업 와중에 이런 정보를 취득하고 대안 중 하나로 검토할 수 있을까. 그래서 이 대표의 결론은 이랬다.

"이런 식으로 수리해서 쓰면 돈도 덜 들고, 친환경적이고, 주민들 만족도도 높아지고 하는데, 왜 자꾸 때려부수기만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오래된 아파트들, 다 이런 식의 문제들이 있을 거 아닙니까. 입주민들의 요금 부담이나 건강과도 분명히 관련 있는 문제인데, 국가가 방치하고 있어요. 국가가 가만히 눈감고 있는 거죠. '난방열사' 이야기가 그냥 나온 게 아니잖아요. 대한민국이 아파트에 관심이 너무 없어요. 얼마나 많은 국민이 아파트에 삽니까."

물론 이 대표와 주민들이 선택한 '통합 배관 방식'은 도시가스를 이용하는 아파트와는 무관하다. 그럼에도 이 대표의 결론이 귀하게 들리는 이유는 노후 아파트 문제가 향후 사회적 의제로 지금보다 더 심각하게 떠오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2015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준공된 지 30년이 지난 아파트가 50만 가구 정도로 알려져 있는데, 2025년에는 그 숫자가 320만 가구 이상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제 몇 년 남지 않았다. 그래서 '엄지미 마을' 이야기는 전국적 이야기다.

서울 목동 우성 1차 아파트에 '통합 배관 시스템'을 시공한 구성이엔드씨 윤석구 대표 인터뷰가 이어집니다. 특허 기술을 갖고 있는 소기업의 어려움 등이 소개될 예정입니다.


태그:#관리비, #아파트 관리비, #김부선, #난방, #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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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냉탕과 온탕을 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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