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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즈카 오사무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숨을 거두는 마지막날까지 펜을 손에서 안 놓았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나서 몸을 내려놓은 뒤에라야 비로소 '새로운 만화 그리기'를 멈추었다지요. 테즈카 오사무 님은 '할아버지 나이'에도 어엿하면서 씩씩하게 늘 새롭게 만화를 그려서 아이들한테 웃음하고 눈물을 베푼 분 가운데 하나입니다.

'호빵맨'이라는 만화를 그린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테즈카 오사무 님보다 나이가 더 위이면서 더 오래 살았다고 해요. 만화가 길을 걷고 싶었으나 막상 만화가로는 도무지 길이 트이지 않아 괴로울 적에 '무명인 이분'을 테즈카 오사무 님이 몸소 말을 여쭈며 만화영화 일에서 미술감독을 맡긴 적이 있대요. 그러나 이런 일을 맡으면서도 정작 이녁 스스로 만화가로서는 설 길을 찾지 못했다는데, 바야흐로 일흔이 넘은 나이에 '만화가'라는 이름을 얻었답니다.

뒤늦게나마 예순을 넘긴 즈음부터 욕심이 사라졌다. "만화는 예술이야" 하고 거들먹거리지 않게 되었다. 인생에서 가장 큰 기쁨은 무엇일까? 그것은 요컨대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6쪽)

난해한 시에는 도무지 마음이 가지 않는다. 몇몇 사람만이 이해하는 시는 시가 아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두루 이해하며, 많은 사람에게 폭넓게 사랑받는 서정성 넘치는 시, 될 수 있는 한 그런 시를 써 왔다. (39쪽)

겉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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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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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세 다카시 님이 아흔 넘은 나이에 글을 쓴 <네, 호빵맨입니다>(지식여행 펴냄)라는 책을 읽는 내내 곰곰이 생각합니다. 저도 아흔 넘은 나이에도 씩씩하고 튼튼하게 살아서 제 나름대로 걸어온 길을 젊은 뒷사람한테 즐겁게 들려줄 수 있으면 좋겠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아흔 살뿐 아니라 백 살이 넘은 뒤에도, 또는 백열 살이나 백스무 살에도, 어쩌면 이백 살까지 기운차게 살아서 젊은 뒷사람이 새롭게 기운을 북돋우도록 이끄는 말을 남길 만하면 신나겠구나 하고 생각해 봅니다.

야나세 다카시 님은 자그마치 일흔이 넘고서야 비로소 이녁 어릴 적 꿈인 '만화가'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흔넷 나이에 조용히 숨을 거두기까지 '만화 새롭게 그리기'를 멈추지 않았다고 해요. <네, 호빵맨입니다>라는 책도 아흔을 훌쩍 넘은 나이에 썼으니 대단하지요.

이분한테는 '나이'가 조금도 걸림돌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분한테 나이는 '남들보다 더 오래 살면서 더 오래 삶을 지켜본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기쁨이라 할 만합니다. 더군다나 '남들보다 더 오래 꿈을 못 이룬 쓰라린 맛'을 삭히고 달랜 이야기까지 들려줄 수 있지요.

"호빵맨을 그린 게 저예요"라고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깜짝 놀란다. 아무래도 아흔 넘은 할아버지가 호빵맨을 그리고 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것이다 … 드디어 인기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때가 일흔 살 고희를 맞이한 후였다. 적어도 1년은 채우자는 마음으로 시작했건만 벌써 20년이 넘었다. (49, 65쪽)

운이 그렇게 '나 몰라라' 하는 식의 수동적인 개념이라면, 노력할 의미 따위 없어지고 만다. 운이란 스스로 불러들이고, 스스로 붙잡는 것. 자신의 힘으로 개척하고, 자신의 힘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67쪽)

한국에서 예순 넘은 나이에 비로소 수채화라는 그림을 홀가분하게 그리고서,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즐겁게 이 수채화를 그리다가, 마지막 숨 한 번 들이쉴 때까지 붓을 놓지 않던 박정희 할머님을 떠올려 봅니다.

이 수채화 할머님이나 야나세 다카시라는 만화 할아버님은 이녁 스스로 이루려는 꿈을 늘 가슴에 품으셨어요. 비록 이 꿈을 예순 해나 일흔 해를 사는 동안 한 번조차 못 이루더라도 이 꿈을 고이 품으셨습니다. 품고 품으며 또 품어요. 다시 품고 새로 품으며 거듭 품어요. 언제인가 꼭 이루겠노라 하는 마음으로 참말 씩씩하게 삶을 일굽니다.

우리 둘레에는 일흔뿐 아니라 여든이나 아흔이 되어도 꿈을 못 이루는 이웃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고 죽기를 되풀이해도 도무지 꿈하고 맞닿지 못하는 이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꿈은 어떻게 이룰까요? 꿈은 왜 못 이룰까요? 가난하기 때문에 꿈을 못 이루지는 않는다고 느낍니다. 힘이 들거나 나이가 많아서 꿈을 못 이루지는 않는다고 느낍니다. 우리 스스로 꿈을 제대로 그리지 못한 탓에 꿈에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는구나 싶어요. 우리 스스로 꼭 하루라도 꿈을 놓거나 잊는 사이에 꿈하고 멀어지는구나 싶어요.

아흔넷이라는 나이까지 호빵맨 만화를 그린 만화 할아버지는 우리 젊은이한테 이 대목을 차분하게 짚어서 일깨우려고 합니다. 다만 가르침을 베풀지는 않아요. 이녁 스스로 아흔이라는 나이를 훌쩍 넘도록 살며 늦깎이 만화가 길을 이루어 살다 보니 '꿈은 젊은 날 이루든 늙은 날 이루든 모두 똑같다'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네 하고 밝힙니다.

'안팡맨(호빵맨을 가리키는 일본말)' 박물관 누리집 화면. 한국말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안팡맨(호빵맨을 가리키는 일본말)' 박물관 누리집 화면. 한국말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 안팡맨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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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입을 모아 '한 치 앞은 어둠'이라고 말하지만, '한 치 앞은 빛'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구십 년 이상 살다 보니, 확실히 이 말의 의미가 온몸으로 전해진다. (87쪽)

한 걸음 한 걸음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기 힘들다. 하지만 그 평범한 일상을 수십 년이나 이어나가면, 언젠가 원대한 목표에 이를 수 있다. (105쪽)

한 치 앞을 보아도 어둠일 수 있습니다만, 아흔 넘은 만화 할아버지는 이를 다르게 들려줍니다. 우리가 한 치 앞조차 제대로 못 보기 마련이라면서, 그 한 치 너머는 온통 눈부신 빛일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한 치를 넘어서기까지 일흔 해가 걸릴 수 있고 아흔 해가 들 수 있습니다만, 꿈을 바라보려는 마음을 즐거이 붙잡을 적에 꿈을 이룬다고 이야기해요.

만화 할아버지는 아흔이 가까운 나이에 이녁 고향마을에 '만화 박물관'을 지었다고 해요. 다른 사람 돈을 빌리지 않고 '만화 할아버지가 만화를 그려서 번 돈'만으로 한갓진 이녁 고향마을 한켠 아주 고요한 곳에 만화 박물관을 지었다고 합니다. 이 만화 박물관은 도쿄 같은 도시하고 매우 먼 터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찾아올는지 알 수 없었대요. 아니 이 외딴 시골마을에 지은 만화 박물관까지 애써 찾아올 사람이 있을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지요.

만화 할아버지는 이녁 꿈이던 만화가 길을 일흔 해 남짓 고이 품으면서 이루었듯이 '즐겁게 만화를 그려서 기쁘게 벌어들인 목돈'을 고스란히 만화한테 바치고 싶다는 뜻으로, 또 고향마을에 선물을 돌려주고 싶다는 뜻으로 만화 박물관을 지었답니다.

그리고 이 만화 박물관은 아주 외진 시골에 있으나 늘 엄청난 손님 물결로 북새통을 이룬다고 해요. 호빵맨 만화 박물관은 박물관이면서 놀이터라는데, 만화 할아버님 뜻을 받들어 일본 곳곳에 새로운 '호빵맨 만화 박물관(+ 놀이터)'이 문을 열었다고 합니다.

호빵맨은 2000이 넘는 수많은 주인공(캐릭터)이 있는 대단한 만화입니다. 이 책을 보면 겉에 깨알처럼 온갖 주인공이 함께 보이지요.
 호빵맨은 2000이 넘는 수많은 주인공(캐릭터)이 있는 대단한 만화입니다. 이 책을 보면 겉에 깨알처럼 온갖 주인공이 함께 보이지요.
ⓒ 아마존재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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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을 때려눕힐 때도 마을이나 숲을 파괴하고 만다. 그걸로 정의가 이긴 것이 된다. 어딘가 영 석연치 않다. 아무리 결전을 벌여도 정의의 영웅은 옷이 찢어지거나 더러워지지 않는다. 이 역시 이상하다. 온갖 무기를 연달아 선보이면서 펑펑 요란하게 불길을 일으키는 영웅을 보고 박수 치며 흥분하다니. 일종의 '전쟁 찬미'처럼 여겨진다. 어린아이의 잠재의식에 나쁜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까 걱정스럽다. (119쪽)

일흔을 훌쩍 넘기고 만화가 길을 걸을 수 있던 할아버지는 호빵맨 만화에 '주인공'을 수없이 많이 그려 넣었다고 합니다. 호빵맨 하나만 주인공이 아니라 자그마치 2000명이 넘는 주인공(등장인물·캐릭터)이 있다고 해요.

이녁은 '영웅'을 바라지 않기 때문에 수많은 이웃이나 동무를 그렸다고 해요. 어느 한 사람 영웅이 번쩍 나타나서 모든 '나쁜 놈'을 때려눕히거나 죽여 없애는 이야기가 아니라, 아이들이 서로 아끼고 어깨동무를 할 수 있는 평화로운 나라를 꿈꾸면서 '죽는 마지막날까지 힘이 닿는 대로 새로운 주인공을 그리려'고 했답니다.

<네, 호빵맨입니다>를 읽으면 만화 할아버님 어릴 적 이야기도 살며시 흐릅니다. 1919년에 태어난 할아버님한테는 매우 똑똑하고 잘생기고 의젓한 동생이 있었다는데, 이 훌륭하고 멋진 동생은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켰을 적에 군인으로 끌려가서 바다에서 하루아침에 죽었다고 합니다.

할아버님도 군인으로 끌려갔으나 용케 할아버님은 살아남았다고 해요. 끔찍한 전쟁을 겪으면서, 게다가 그 전쟁에서 '일본이 전범 나라'였던 대목을 치러내면서, 만화 할아버님은 이 전쟁이 얼마나 그악스럽고 끔찍한가를 뼛속 깊이 배웠다고 해요.

이리하여 만화를 그리려는 꿈을 일흔 해 동안 품는 나날에도 '영웅은 그리지 않겠다'고 생각했답니다. '영웅 주인공'이 온갖 첨단무기를 내세워서 '나쁜 적'보다 훨씬 더 '파괴를 일삼는 짓'을 벌이는 그런 만화가 아니라, '작고 착하며 여린 이웃'이 주인공이 되어 서로 아끼고 보듬을 줄 아는 사랑스러운 이야기가 흐르는 만화를 그리려고 했답니다.

호빵맨이 아톰 못지않게 아이들한테서 사랑받는 어여쁜 동무가 되는 까닭을 넉넉히 읽을 만합니다. 얼굴(호빵)을 가난하고 배고프며 고단한 이웃한테 떼어 주면 그만 힘을 잃는 호빵맨이요 다른 아무 재주가 없는 호빵맨입니다. 이 가녀린 호빵맨은 바로 아흔 고개 할아버지가 아이들한테 젊은이한테 우리 모두한테, 이녁 온몸과 온마음을 나누어 주고 싶은 사랑을 그린 빛줄기로구나 하고 느낍니다.

덧붙이는 글 | <네, 호빵맨입니다>(야나세 다카시 글 / PHP연구소 엮음 / 오화영 옮김 / 지식여행 펴냄 / 2017.3.17. / 12000원)



태그:#네 호빵맨입니다, #야나세 다카시, #만화, #호빵맨, #삶짓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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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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