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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서점가에 페미니즘 열풍이 불고 있다고 한다. 대선주자들도 페미니스트를 자처하고 나섰다. 하지만 페미니즘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메갈리아' 논쟁은 페미니스트에 대한 우리 사회의 편견을 보여준 예이다.

케이트 밀레트와 시몬느 드 보봐르는 가부장제가 어떻게 여성의 성을 통제하고 종속시켰는지를 정치적, 사회적 측면으로 고찰했다. 케이트 밀레트는 <性의 정치학>에서 남성이 여성의 성을 통제함으로 어떻게 정치적으로 가부장제가 견고하게 자리 잡게 했는지를 보여준다. 시몬느 드 보봐르도 <제 2의 性>에서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말로 가부장제가 사회적 규범으로 견고히 자리하는 과정에서 여성을 어떻게 종속시켰는지를 알려준다.

여행하는 페미니스트, 길에서 희망을 쓰다 <길 위의 인생>
 여행하는 페미니스트, 길에서 희망을 쓰다 <길 위의 인생>
ⓒ 학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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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인생> 저자인 글로리아 스타이넘(Gloria Steinum)은 여성운동의 대모다. 그는 세 번 한국에 왔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은 어디든 달려가 '이야기와 경청하기'로 인간이 잃어버렸던 기억을 되찾아 삶을 일궈내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자서전 <길 위의 인생>(My Life on the Road, 학고재)은 글로리아가 페미니스트로 달려온 삶의 여정을 보여준다. 글로리아의 만트라는 "위계질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연결하는 것(Not Ranking But Linking)"이라고 한다. 그이가 소통과 평등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잘 드러난다.

서문에서부터 가슴이 울컥 한다. 글로리아가 왜 수많은 욕설과 지탄,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낙태 합법화 운동을 벌였는지, 왜 여성 스스로 임신 여부를 결정할 권리나 삶을 결정할 권리가 중요한지를 저절로 알 수 있게 한다.

'런던의 의사인 존 샤프(John Sharpe) 박사는 1957년 인도로 가는 길에 낙태를 의뢰하러 온 스물두 살의 미국 여성이 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엄청난 위험을 무릅쓰고 도와주었다. 영국에서, 임신한 여성이 건강상의 문제 외에 다른 이유로 낙태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로부터 10년이 더 지나서였다. 의사인 그는 이 미국 여성이 고향에서 약혼을 파기하고 미지의 운명을 향한 여정에 올랐다는 사실만 듣고 이렇게 말했다. "두 가지를 약속해줘야 합니다. 첫째 누구한테도 내 이름을 말하지 마십시오. 둘째 살면서 당신이 원하는 일을 하십시오." 샤프 선생님, 선생님은 당시의 법이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한참 지나 이렇게 말하는 것을 이해해 주시겠지요. 저는 살면서 제가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 책을 선생님께 바칩니다.' - <길 위의 인생> 서문

여성운동 1기가 프랑스 혁명에서 영감을 받은 여성 선거권을 얻기 위한 투쟁이었다면 여성운동 2기는 베티 프리단(Betty Friedan)의 <여성의 신화>, 케이트 밀레트((Kate Millet)의 <性의 정치학>, 시몬느 드 보봐르(Simone de Beauvoir)의 <제 2의 性>을 근간으로 한 정치 사회적 여성의 권리와 평등을 위한 투쟁으로 발전한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급진적 페미니즘 시대라 불리는 여성운동 2기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온 여성운동의 대모다.

여성해방운동은 두 번째 물결이 주를 이룬다. 백인 중산층 여성을 중심으로 영국과 미국서 주도적인 흐름을 만들었다. '정치적인 것이 개인적인 것이다'라는 말은 2기 여성운동의 핵심을 드러내 주는 말이다.

'대공황 시절의 고통, 그리고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과 영부인 엘리너 루스벨트가 어떻게 우리를 그 고통에서 빠져나오도록 도왔는지에 대해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들은 정치가 일상 생활의 일부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어머니는 감자 껍질 찌꺼기로 수프를 만들고서, 루스벨트의 연설을 들으며 영혼을 살찌웠다고 얘기했다. 담요를 잘라 언니의 따뜻한 외투를 만들어주고는, 사람들이 새로운 스타일의 영부인을 좋아한다면서 새로운 스타일의 외투도 좋아할 거라고 , 언니가 놀림 받지 않도록 보호한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 203쪽

글로리아가 어머니를 통해 경험한 일은, 정치적인 것이 개인적인 것이 된 예이다. 정치와 삶을 분리할 수 없다. 그래서 정치적인 것이 개인적인 것이 될 때 인간은 더 나은 삶을 함께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정치, 사회적 자유나 권리는 거저 주어지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모계 사회의 전통은 여성 우위의 삶, 위계질서를 세우는 삶이 아니라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역할 분담적인 평등의 삶이었다.

남성 중심 가부장제가 견고해지면서 사회, 정치적 사회적 구조에서 여성은 상생하는 존재가 아니라 열등한 성인 제 2의 성으로 만들어졌다. 성소수자, 장애인은 삶의 주체로서 함께 할 수 없다. 여성에게 투표권이 주어진 것은 불과 1세기도 되지 않았다. 미국은 인디언 이로쿼이 연맹의 평등한 법을 참고해 헌법을 제정하면서도 여성은 배제해 버렸다.

2기 여성운동은 이러한 가부장 사회가 만든 구조적 모순을 바로잡으려는 몸부림에서 시작된 셈이다. 가장 급진적인 여성운동이라고 불리는 정치적 투쟁에서조차 여성의 투쟁 방식은 평화롭다는 점이 여성운동의 본질을 잘 드러내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대선을 앞두고 여성 활동가들이 '페미당'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페미니스트에게 투표하겠다고 하는 것은 왜일까. 정치적, 사회적 평등이 가부장제 남성 중심 사회에서 막혀있기 때문이다.

글로리아가 사람들과 연결의 고리를 이어가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방법은 단순하다. 어디든 마음을 열고 달려가는 것, '이야기를 하고 잘 듣는 것' 안에 답이 들어 있다. 어디든 달려가 안아 주고 상대방의 말을 잘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당신도 성공적인 조직 활동가가 될 수 있다.

글로리아는 자신의 경험을 지구적으로 확장해 연대의 삶을 일궈냈다. 낙태 합법화 운동, 성폭행과 폭력으로부터 여성의 몸과 마음을 지키는 운동부터 성소수자 권리, 인종편견 등 정치적, 사회적 모든 차별에 저항하는 운동을 이어왔다.

여전히 지구촌 곳곳은 여성들에게 위험 사회다. 어떠한 이유로든 여성의 성이 가부장적 남성 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종속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페미니즘의 존속 이유라면 편협한 사고일까.

'몇몇 여성들은 바깥세상보다 감옥에서 더 안전함을 느꼈다고 말했는데 이는 그 자체로 비극이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자기 아이들이 없고, 사생활이 없고, 햇빛이 없고, 신뢰가 없고, 화장실 휴지가 없고, 자기만의 시간이 없는 현실을 얘기했다. 어떤 여성들은 자기방어 진술을 거부당했고, 또는 남성 교도관에게 성적으로 괴롭힘을 당한 일도 있었고, 아이의 양육권을 잃어버리는 영구적 처벌을 받기도 했다. 몇몇 여성들은 심지어 출산할 때에도 족쇄에 채워져 있었다.' - 352쪽

'여성의 지적 자부심이 교육을 많이 받을수록 떨어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고 한다. 글로리아는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부재를 공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대한민국 여성들은 우리 자신의 부재를 얼마나 인식하고 있을까. 페미니스트가 외로운 이유는 어쩌면 여성 스스로 자신들의 부재에 대해 알려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어쨌거나 대한민국에서도 몇몇 여성학자들이 비주류인 외로운 길을 줄기차게 걷고 있는 중이다. 언젠가는 그 길이 여성만이 아니라 지구촌의 차별받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걷는 길이 되리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생/ 글로리아 스타이넘 지음.고정아 옮김/ 학고재/20,000



길 위의 인생

글로리아 스타이넘 지음, 고정아 옮김, 학고재(2017)


태그:#글로리아 스타이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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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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