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veDivasAChance

해시태그 '#GiveDivasAChance' 운동이 미국 누리꾼 사이에서 화제다. ⓒ GiveDivasAChance


한국에서 레슬링이 가장 인기 있었던 때를 생각해보자. 아마 대부분은 2000년대 초반이 WWE의 황금기였다고 기억할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의 여성 레슬러(디바)들을 떠올려보자. 모두를 언급할 수는 없어도 트리쉬와 리타, 스테이시 정도는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당시에는 여러모로 핫한 존재들이었으니까.

하지만 당시 그들을 여자 레슬러라고 부르기는 했다만 "진짜 선수였을까"라고 물어본다면 "글쎄"라는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당시 디바들의 경기는 캣 파이트 투성의 이벤트성 경기가 많았기 때문이다. 실력파라 불리는 트리쉬와 리타 등을 제외하면 경기력으로 주목을 받는 선수도 많이 없었다. 대부분의 디바들은 정식 레슬러보다는 '아이 캔디'용, 그리고 킬링타임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로부터 10년이 넘게 지났다. 트리쉬와 리타는 은퇴했고, 섹시의 아이콘이었던 셰이블이나 스테이시 키블러도 방송에서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10년이 넘은 지금, WWE 내에서의 여성 레슬링의 위상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GiveDivasAChance

지난 2015년 2월 23일 열린 RAW(러)에서는 더 벨라 트윈스(니키 벨라&브리 벨라)와 페이지&엠마 팀 간의 디바 태그팀 경기가 열렸다. 당시 디바스 챔피언 니키 벨라가 속해 있는 더 벨라 트윈스와 NXT에서부터 잔뼈가 굵은 두 선수가 붙은 경기였다. 하지만 경기 시간은 고작 29초.

이런 짧은 경기는 대부분 자버(Jobber, 패전 전문 선수 혹은 초보 선수)들이 포함된 경기, 중요도가 떨어지는 경기에 이런 시간을 배분한다. 특히 디바들의 경기 대부분이 평균 3~5분 정도의 경기 시간을 배정받으면서 자버급 경기와 비슷한 취급을 받고 있었다. 디바들이 그 짧은 시간 동안 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 매우 어려웠던 환경이었다.

결국, 디바들과 팬들의 쌓여 있던 불만이 본격적으로 터졌다. 분 단위도 아닌 초 단위로 끝난 경기에 디바 팬들의 불만이 터진 것. 팬들은 SNS를 통해 WWE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GiveDivasAChance(디바들에게 기회를 달라)'라는 해시태그를 붙여 디바들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당시 디바계의 한 축을 담당하던 AJ 리가 WWE CEO인 스테파니 맥맨에 반기를 들면서 갈등이 더욱 심해졌다. 2015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은 패트리샤 아퀘트가 수상 소감으로 여성에게 동등한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고 말한 것에 대해 스테파니가 공감한다는 SNS를 올리자, AJ 리가 "WWE 여성 레슬러들부터 챙겨라"라는 식의 공격적인 SNS를 올린 것이다. (공교롭게도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렸던 날에 RAW에서 30초의 졸전이 펼쳐졌다)

 부부는 서로 닮는다고 남편인 CM펑크를 따라 WWE를 상대로 '파이프 밤'을 터뜨린 AJ 리

부부는 서로 닮는다고 남편인 CM펑크를 따라 WWE를 상대로 '파이프 밤'을 터뜨린 AJ 리 ⓒ AJ리 트위터


AJ 리는 SNS를 통해 "당신의 여성 레슬러들은 당신을 위해 상품을 팔고 당신의 회사에 최고 순간 시청률을 안겼지만, 여전히 남성 로스터 대부분보다 일부분의 임금과 출연시간을 받고 있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당시 AJ 리는 WWE 탈단을 거의 결심한 때라, 총대를 메고 공공연하게 퍼져있던 디바들의 불만을 공론화시킨 것이다.

이후 AJ 리가 본격적으로 WWE를 탈단하면서 메인 로스터의 여성 디비전은 색깔이 완전히 희미해졌다. 정상급 선수 AJ 리의 대체 선수를 마땅히 찾지 못한 WWE 여성 디비전에 사람들이 흥미를 잃기 시작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그들의 출연 시간과 기회는 점점 줄어들고, 그에 비례해 디바들의 경기력과 마이크 웍(Mic work, 입담) 또한 질이 급격히 떨어졌다.

포 호스 위민(Four Horse Women)

메인 로스터의 디바들이 불만을 터뜨리고 있을 무렵, WWE의 마이너리그 격인 NXT의 디바들은 잘 나가고 있었다. NXT는 디바들의 다양한 시도를 권장하고, 그들에게 충분한 경기 시간을 보장하며 그 비중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2015년에 열린 다섯 번의 PPV(paper-view)에서 디바 경기가 세 번이나 메인 이벤트로 배정됐고, 그중 한번은 단독 메인이벤트에 30분간 펼쳐지는 '아이언 우먼(Iron Woman) 매치'가 열렸다. NXT에서의 디바들의 높은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그 중심에는 '포 호스 위민(Four Horse Women)'이라 불리는 4명의 여성 레슬러들이 있었다. 샬럿, 샤샤 뱅크스, 베키 린치 그리고 베일리 이 네 명은 WWE 위민스 디비전의 미래라는 평가를 받으며 2015년의 NXT를 주름잡았다. 이들이 붙으면 항상 명경기가 만들어졌고, 이들 덕분에 소외당했던 위민스 디비전에 대한 관심을 크게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앞서 언급한 베일리와 사샤 뱅크스가 펼친 30분 아이언 우먼 타이틀 매치는 2015년 최고의 매치로 손꼽힐 만큼 명경기로 평가받고 있다.

디바스 레볼루션(Divas Revolution)

그러던 2015년 7월, WWE가 'Divas Revolution(디바스 레볼루션)'을 야심 차게 내놓으며 메인 로스터의 여성 디비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당시 미국 여자 축구팀이 월드컵에서 우승하면서, 시기적으로 '우먼 파워(Woman Power)'를 강조하기에 알맞겠다고 판단한 스테파니 맥맨이 NXT의 여성 레슬러들을 대거 메인 로스터로 승격시켰다. 당일 러에서는 총 9명의 디바들이 한꺼번에 링 위에 오르게 됐는데, 포 호스 위민 중 세 명인 샬럿과 베키 린치, 사샤 뱅크스가 포함돼 사람들의 큰 환호를 받았다.

디바스 레볼루션은 시작부터 큰 호평을 받았다. 너무 많은 선수가 링 위로 올라와 복잡하긴 했지만, 수가 많아지면서 시간도 길어졌고 양질의 경기가 메인 TV쇼에서 펼쳐지면서 서서히 팬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샬럿과 베키 린치, 사샤 뱅크스는 여타 밋밋했던 디바들과는 차원이 다른 카리스마와 캐릭터로 사람들의 호응을 많이 끌어냈다. 결국, 얼마 되지 않아 샬럿이 니키 벨라의 챔피언 장기 집권을 무너뜨렸고, 베키 린치와 사샤 뱅크스가 챔피언 전선에 뛰어들면서 여성 디비전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WWE도 새 시대에 맞게 여성 디비전의 벨트를 새롭게 개편했다. 레슬매니아 32에서의 3자 간 경기를 앞두고 WWE는 새로운 여성 디비전 벨트를 발표했는데, 명칭은 'WWE Women's Champion'. 한동안 'Diva's Champion'이라 불렸던 여성 디비전 타이틀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동시에 여성 레슬러들을 '디바'라는 단어 대신 '슈퍼스타'라 부르며 여성 레슬러들을 남성 레슬러와 동등하게 여기겠다는 의도를 내비친 것이다.

그후 2년, 달라진 여성 레슬러들의 위상

디바스 레볼루션이 가져온 새 시대는 여성 디비전에 많은 변화를 가지고 왔다. 로스터 분리로 인한 선수 기근 문제는 NXT 여성 레슬러를 대거 합류시키면서 해결했고, 여성 타이틀도 로스터 별로 두 개로 나눠 대립 전선을 구성하면서 시청자들의 흥미도 배가시켰다. 여기에 NXT에서 큰 인기를 누렸던 베일리와 예전 디바스 챔피언 출신인 미키 제임스가 메인로스터에 합류하면서 그 방점을 찍었다.

여성 레슬러들의 경기도 프로그램별로 두 개 이상 꾸준히 편성하고 있다. 챔피언 전선 이외에 여성 레슬러 간의 다양한 스토리라인을 구축할 수 있게 됐다. 그뿐만 아니라, 여성 레슬러 경기를 메인이벤트 경기로 잡기도 했고, 타이틀이 달린 경기에는 무려 20분 이상의 시간을 배정하기도 했다. 30초 경기의 굴욕을 겪은 2년 전과는 많이 발전한 모습이다.

작년 10월에 열린 PPV '헬 인 어 셀'에서는 WWE 최초로 여성 레슬러들의 철창 경기가 성사되기도 했다. 아쉽게도 사샤 뱅크스의 잔부상으로 혹평 끝에 짧은 시간 만에 경기가 마무리되긴 했지만, 여성 디비전의 위상을 봤을 때 역사적으로 굉장히 고무적인 일이라 평가받는다.

새로운 문제, 다양하지 않은 스토리 라인

하지만, 새 시대도 결국은 나중에는 구시대가 되는 법. 최근 디바스 레볼루션의 한계도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우선, 스토리라인이 너무 단조롭다. 러는 스맥다운보다 더 많은 여성 레슬러들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챔피언 경기 기회를 가진 선수는 샬럿과 베일리, 사샤 뱅크스, 나이아 잭스뿐이고, 이중 세 명에게만 벨트의 영광이 번갈아 돌아갔다. 스맥다운은 그나마 여성 레슬러들을 골고루 출연시키고는 있지만, 챔피언 전선 이외에 대립각을 세울 만한 확실한 선수들이 없다. 근 1년 동안의 스맥다운을 살펴보면 크게 '알렉사 블리스-베키 린치-미키 제임스-나오미'와 '나탈리아-카멜라-니키 벨라'의 뚜렷한 대립구도 사이에서 맴돌기만 했다. 러는 확실한 흥행 카드가 있어 이들을 과감히 버리지 못하고 있고, 스맥다운은 확실한 카드를 찾느라 여러 가지 시도는 하고 있지만,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체력 관리와 부상 문제도 잘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WWE의 레슬러들은 빡빡한 경기 일정 속에 체력 압박과 잔부상에 시달리기 일쑤고, 여성 레슬러도 예외는 아니다. 스맥다운의 나오미는 올해 초 타이틀 획득에 성공했으나, 부상으로 바로 다음 열린 스맥다운에서 벨트를 반납해야 했고, 러의 사샤 뱅크스는 잔부상으로 로스터 이탈과 복귀를 반복했다. 거기에 대립 전선이 다양하지 않은 탓에 한정된 선수들만이 모습을 드러내고, 그들의 체력 부담만 가중되고 있다.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디바 레볼루션 당시 스테파니 맥맨은 "(여성 디비전의) 모든 것이 바뀔 것이다"라고 했다. 그후 많은 것이 발전하긴 했다. 하지만, 아직 성에 차는 경기 시간과 기회가 주어진 것은 아니다. 여성 레슬러들의 역량도 발전해야 겠지만, 스토리라인이 흥행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스포츠 엔터테인먼트 특성상 WWE의 스토리 운영 능력도 발전해야 한다.

WWE가 헐크 호건이나 더 락, 오스틴 등의 슈퍼스타들을 보내고도 존 시나나 브록 레스너, 랜디 오튼 등의 또 다른 슈퍼스타들을 발굴해냈듯이, 여성 디비전에서도 꾸준한 기회 보장으로 새로운 슈퍼스타를 발굴해야 그들이 말하는 '새 시대'를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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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윤승재 시민기자는 청춘스포츠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청춘스포츠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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