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나는 대학에서 한문학을 복수 전공한다. '추모'의 물결이 거세던 참사 직후, 한문학 교수님은 수업시간에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말씀하셨다. 추모라는 말은 시간이 지난 뒤에 그들을 그리워하며 쓰는 말이기 때문에 아직은 쓸 수 없다고.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애도'지 추모가 아니라고. 추모는 이 일이 끝난 뒤 그들을 다시 생각하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그는 말했다. 주제도 모르고 슬픔 한가운데 있던 당시의 내게 그 말은 울림이 없었다.

3년이 지났다. 한 학기 내내 배운 내용보다도 애도와 추모의 차이가 기억에 더 또렷하게 남았다. 그건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내가, 한국 사회가 애도를 넘어 추모로 향할 조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일 테다. 배는 뭍으로 올랐고, 해양수산부니 선체조사위원회니 긴 이름들이 뉴스를 장식하지만 크게 보아 바뀐 건 없다. 나는 교수님이 말한 "이 일이 끝난 뒤"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거의 확신한다.

촛불 좀 들었다고 대통령이 내려오겠냐

참사 600일 무렵의 팽목항
 참사 600일 무렵의 팽목항
ⓒ 조해영

관련사진보기


세월호는 한국 사회에 수많은 의제를 던졌다. 그중 내게 가장 크게 와 닿았던 건 변화로 향하는 가능성이었다. 유가족, 미수습자 가족, 그리고 그들과 연대했던 많은 이들은 참을성의 극단을 시험하려는 듯 밀어붙이는 세력에 끝까지 굴하지 않았다. 그 모습은 비관주의자로 자부했던 내게 울림을 줬다.

촛불시위가 한창이던 때, 내가 자신보다는 정치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지, 한 친구가 물었다. "정말 탄핵이 되는 건가?"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게도 나는 그 질문에 코웃음을 쳤다. 되겠냐고. 한국이 어떤 나란데 시민들이 촛불 좀 들었다고 대통령이 내려오겠냐고. 국회에서부터 막힐 거라고. 나는 '쿨병'에 걸린 사람마냥 "그냥 구호로 외치는 거지"라고 덧붙였다.

나의 냉소는 전통이 깊었다. 참사 후 600일 무렵 취재를 위해 팽목항으로 갔다. 사람들이 세월호를 더 잘 기억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사를 기획했다. 하지만 마음 한 켠엔 '내가 쓰는 글을 읽고 태도가 변할 사람이 있을까'라는 회의가 있었다. 타이밍을 잘못 맞춰 600일을 하루 앞두고 도착한 덕분에 항구는 한산했다. 빨간 등대와 노란 리본을 기계적으로 카메라에 담았다. 슬픔보다는 기사 거리를 찾아야 한다는 강박에 집중했다. 마침 그곳을 찾은 한 무리의 교사들이 반가웠다. 사진을 촬영하고 방문한 이들의 목소리를 담았을 때 나는 안도감마저 느꼈다.

나는 완전히 틀리고 말았다

국가의 폭력 진압으로 사망한 백남기 농민의 시신을 놓고 시민과 경찰이 대치하던 때도 마찬가지였다. 국가와 국민의 대결에서 승리는 주로 국가의 것이었으므로 나는 기대를 저버린 채 결과만을 기다렸다. 세월호는 인양됐고, 시신은 탈취되지 않았으며, 세월호와 백남기의 교집합에 있던 어떤 이는 검찰 조사를 받고 있다. 나는 완전히 틀리고 말았다.

그 일이 있은 직후 나의 회의를 돌아봤다. 혼란의 와중에도 농담과 여유를 섞어 공개적으로 의견을 내던 백남기 농민의 유족이 계속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를 휘감고 있던 "세상은 원래 그런 곳이고,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오히려 당사자들에게서는 발견하기가 힘들었다.

나를 바꾼 결정적 장면은 유가족과의 만남에 있었다. 인터뷰를 위해 만난 10반 지혜 어머니는 비관의 와중에 희망을 놓지 않는 법을 은근하게 알려주었다. 그녀는 "어려운 사람끼리는 아무리 뭉쳐도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밑바닥까지 갔으니 이제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3년간 주변인의 자격으로 팽목항과 광화문 광장 언저리를 맴돌기만 했던 나는 쉽게도 희망을 놓아버렸다. 하지만 내가 놓아버린 최소한의 희망은 폭풍의 한가운데를 끈질기게 살아온 이들 덕분에 그렇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단원고 2학년 10반 故 권지혜 양의 어머니 이정숙씨
 단원고 2학년 10반 故 권지혜 양의 어머니 이정숙씨
ⓒ 조해영

관련사진보기


더 이상의 무임승차는 말라

어딘가에서 본 대화를 기억한다. 왜 화염병을 던지거나 데모를 하지 않느냐는 기성세대의 질문에 내 또래 청년은 이렇게 답했다. "우리에겐 승리한 기억이 없어서요." 변명이지만, 광장의 연대가 제도적 민주주의를 불러왔던 30년 전의 대사건은 내겐 공감되지 않는 납작한 텍스트였다. 2017년 4월 16일, 어떤 배가 침몰한 지 3년이 되는 날, 나의 변명은 유통기한이 다하고 말았다. 희망을 놓지 않아 온 이들 덕분에 나는 '승리의 기억'에 무임승차하게 됐다.

세월호가 준 울림은 여기에도 있다. 더 이상의 무임승차는 하지 말라는 가르침. 세월호는 딱딱한 교편을 잡은 호랑이 선생님이 아니라 학생들과 눈을 마주치며 차분히 설명하는 인기 좋은 선생님의 모습을 닮았다. 비관의 '세월'을 살아온 나는 이제 희망을 믿지 않을 수 없는 궁지에 몰리게 됐다. 3년. 배움이 늦은 나는 이제야 추모로 가는 길을 만들어나가는 낙관주의자가 되고 있다.


태그:#세월호, #세월호 3주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