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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현대사 연구소가 펴낸 히틀러 자서전 <나의 투쟁> 비판본
 독일 현대사 연구소가 펴낸 히틀러 자서전 <나의 투쟁> 비판본
ⓒ 이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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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서고에 있는 책 한 권을 주문했다. 지난해 독일에서 재출간된 히틀러의 자서전 <나의 투쟁>이다. 한 손으로 들기 힘들 정도로 묵직한데다 회색빛 표지를 보고 있으니 엄숙함마저 감돈다. 편하게 서서 훑어보기도 어려워 자리를 잡고 앉았다.

몇 장 넘겨보니 이걸 다 읽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았다. 원본 텍스트 옆에는 비판적 해석과 역사적 사실 관계가 주석으로 빼곡히 적혀있다. 비논리적이고 허황된 사고로 독일 순혈통주의와 반유대주의를 외친 히틀러 <나의 투쟁>에 전문가들의 빨간 펜이 쫙쫙 그어진 것이다. <나의투쟁>은 초판 발행 후 1122쇄를 찍었다. 그동안 이루어진 오탈자 수정까지도 세세하게 분석했다. 원본의 분량보다 주석의 분량이 훨씬 많다.

그리고 여기, 또 하나의 '나의 투쟁'이 있다. 과거를 미화하고 싶은 한국 독재자의 '투쟁'이다. 지난 3일 출간된 전두환 회고록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광주 사태'로 칭하고 자신을 '씻김굿의 제물'로 비유하는 등 기본적 사실 관계도 왜곡했다. 반성없는 독재자의 느닷없는 회고록 출간에 시민사회 비판도 거세다.

이 이야기를 듣고 히틀러 <나의 투쟁>이 다시 떠올랐다. 독일은 새롭게 나온 독재자의 자서전을 어떻게 대하고 있을까.

히틀러 <나의투쟁> 비판본 출간의 의미

 독일 현대사 연구소가 펴낸 히틀러 자서전 <나의 투쟁> 비판본
 독일 현대사 연구소가 펴낸 히틀러 자서전 <나의 투쟁> 비판본
ⓒ 이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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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히틀러가 죽은 지 70년이 지나면서 <나의 투쟁>의 저작권이 사라졌다. 원칙적으로는 누구나 이 독재자의 자서전을 다시 낼 수 있지만, 독일 정부는 <나의 투쟁> 원본이 아닌 학술적인 해석이 더해진 것만 출간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래서 나온 게 저 묵직한 책이다.

이 책 출간 당시 독일 사회에는 큰 논란이 일었다. 비판적 주석이 달렸다 해도 이런 '쓰레기 책'을 다시 낼 필요가 있냐는 것이다. 마침 독일에서 극우 세력의 바람이 불 때여서 우려는 더욱 컸다.

책이 출간된 지 1년, 두 권에 59유로(약 7만 원), 무게만 6킬로인 이 책은 그동안 8만 5000부가 팔려 나갔다. 책을 출간한 독일 현대사연구소는 "연구와 교육 목적으로 구입한 것이 대부분"이라고 설명했다.

'그래도 <나의투쟁> 원본 글을 보려는 극우파들의 구입도 많지 않겠어?'라고 생각했지만 이 책을 손에 들어보니 그건 그렇게 쉽지 않아 보인다. 이 책은 히틀러 자서전이라기보다 나치와 히틀러에 대한 역사 해설서에 더 가깝다. 책이 주는 실질적이고도 심리적인 무게감은 독일 사회가 그 못난 역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8만 5000부가 나간 건 히틀러의 <나의 투쟁>이 아니라 <나의 투쟁 비판본>인 셈이다.

이 비판본을 다루는 것도 조심스럽다. 서점에서는 책을 진열해놓고 팔지 않는다. 라이프치히 대학 도서관의 경우 인터넷으로 신청을 하고 안내 데스크에 가면 책을 직접 내어준다. 도서관 사서는 이렇게 말한다.

"비판본이긴 하지만 모든 사람이 지나다니면서 볼 수 있는 책장에 이게 놓여 있는 건 보기가 좋지 않으니까요."

굳이 내놓을 필요가 없는 책이다. 책의 존재를 알고 신청한 학생과 연구자들에게만 대여해준다. 이 도서관은 나치 시절 출간된 <나의 투쟁>도 소장하고 있다. 이 원본은 대여도 불가능하며 도서관 내 연구자들을 위한 열람실에서만 볼 수 있다. 연구 목적도 밝혀야 한다.

독일이 이 독재자의 자서전을 금기시하는 이유는 책 자체가 '위헌적인 출판물'이기 때문이다. 독일에는 소위 반나치법이 있다. 다른 인종이나 종족 등을 증오하는 '증오 발언'이나 '증오 행동', 이를 인정하고 조장하는 출판물은 모두 형법에 위배되어 처벌받는다.

위헌적 조직인 나치 깃발, 휘장, 인사법 등을 표시하는 것, 나치의 범죄를 부인하거나 지지하는 것도 불법이다. <나의 투쟁>은 극단적인 반유대주의를 표현한 대표적인 출판물이다. 독일이 <나의투쟁> 저작권이 사라졌음에도 원본 텍스트 재출간을 금지한 배경이다.

극우 출판사에서 나온 <나의 투쟁>... 판매 부수 '0권'

 독일 소규모 극우 출판사에서 팔고 있는 히틀러 <나의 투쟁> 재인쇄본
 독일 소규모 극우 출판사에서 팔고 있는 히틀러 <나의 투쟁> 재인쇄본
ⓒ 홈페이지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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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적인 사상을 가지고 히틀러 <나의투쟁> 원문을 보고 싶은 이들은 사실 마음만 먹으면 책을 구할 수 있다. 1925년부터 1945년까지, 나치 치하에서 인쇄되어 뿌려진 것만 해도 1245만 부에 달한다. 집집마다 있던 이 책은 지금도 독일 헌책방 구석구석에 숨어있고 인터넷에서도 찾을 수 있다.

지난해 5월에는 비판적 해설이 달리지 않은 <나의 투쟁>이 나왔다. 한 소규모 극우 출판사가 용감하게(?) 인쇄해 30유로(약 3만 6000원)에 판매중이다. 표지에 히틀러 얼굴도 크게 실어 원본 책과 거의 비슷하다. 논란을 미리 의식한 듯 '학술적 참고 문헌(Wissenschaftlicher Quellentext)'이라고 적어놨다. 이 때문에 출판사는 '국민 선동' 및 '위헌 조직 표시 사용' 혐의로 현재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지난해 5월부터 히틀러 자서전 <나의 투쟁>을 재발매한 것과 관련 출판사 'Der Schelm'를 국민 선동 및 위헌 조직 표시 사용 혐의로 수사 중입니다. 출판사 입장에서 <나의 투쟁>이 실제로 전혀 팔리지 않았기 때문에 혐의 입증에 어려움이 있는 상태입니다. 현재까지의 수사 상황으로 보면 그 책을 인터넷에서 판매하는 것은 제한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극우 출판사를 수사 중인 독일 라이프치히 검찰청 야나 프리드리히(Jana Friedrich) 검사의 말이다. 이 답변을 듣고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러니까 그 출판사가 펴낸 <나의 투쟁>은 아직까지 한 권도 팔리지 않았다는 말이다.

비공식적으로 책이 배포될 가능성도 물론 있다. 하지만 역사를 직시하고 반성하는 문화가 자리 잡은 독일에서 이 책의 공공연한 판매는 힘들어 보인다. 그 어떤 서점에서도 이 책을 판매하려고 하지 않으며, 무엇보다 판매하는 건 위법이다. 극우 출판사의 <나의 투쟁> 발간 소식을 인터넷에 알렸던 한 서점 직원은 검찰의 수사를 받아야 했다.

독재자의 자서전 <나의투쟁>은 당시 결혼한 부부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결혼 등록을 하는 동사무소에서 직접 책을 선물로 주기도 했다. 그 책은 70년이 지나 이렇게 빨간펜으로 고쳐진 묵직한 '수정본'으로 다시 나왔다.

한국 독재자의 회고록은 어떤 길을 걷게 될까. 애초에 나오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책이었음은 분명하다. 아니, 이왕 나왔으니 그 끔찍한 역사와 함께 독재자의 몰염치와 몰상식, 비도덕까지 길이길이 되새김하는 교재로 쓰면 될 것 같다. 히틀러의 <나의투쟁>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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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해외통신원입니다. 라이프치히에서 공부하고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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