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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영정조대 화가 김후신(金厚臣)이 그린 작품이다. 대낮부터 어디서 퍼마신 술인지 몰라도 남볼까 부끄럽기까지 하다. 친구로 보이는 두 사람은 취객을 끌고 가느라 술이 다 깰 지경이다. 갓을 쓴 향색을 보니 어느 양반님네 자제분인 듯한데, 낮술에 취하면 누구도 몰라 본다고 주변의 산천 초목들도 ‘헉’하는 표정을 짓는다. 금주령이 한창일 때 이렇게 만취하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국법에 따라 엄히 다스려졌다.
▲ 대쾌도(大快圖) 조선후기 영정조대 화가 김후신(金厚臣)이 그린 작품이다. 대낮부터 어디서 퍼마신 술인지 몰라도 남볼까 부끄럽기까지 하다. 친구로 보이는 두 사람은 취객을 끌고 가느라 술이 다 깰 지경이다. 갓을 쓴 향색을 보니 어느 양반님네 자제분인 듯한데, 낮술에 취하면 누구도 몰라 본다고 주변의 산천 초목들도 ‘헉’하는 표정을 짓는다. 금주령이 한창일 때 이렇게 만취하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국법에 따라 엄히 다스려졌다.
ⓒ 간송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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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요녀석으로 인해 참 말 많고 탈도 많지만, 시린 가슴팍에 시원한 소주 한잔 끼얹으면 그나마 세상살이 시름이 잠시는 사라지고, 정겨운 옛 친구를 만나 탁배기 한 사발 부딪치면 넉넉한 마음이 배가 커지게 해주는 고마운 녀석이기도 하다.

그런 고마운 술을 절대 만들지도 말고, 마시지도 말라는 금주령(禁酒令)이 국왕의 입을 통해 추상처럼 펼쳐져 조선시대 내내 함께했으니 요즘 아침마다 코끝 빨개지는 주당들이 듣는다면 간담이 서늘해지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조선시대는 그런 때였다. 가뭄과 흉년이 들면 굶어 죽는 백성들이 전국적으로 수만에서 수십만까지 발생하니 주린 배를 채우지도 못할 귀한 곡식을 술을 빚는데 사용한다는 말은 천인공노할 일이기까지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쪽에서는 국왕이 거북이 등짝처럼 쩍쩍 갈라진 땅바닥을 부여잡고, 내리쬐는 햇살을 마주하며 비 한번 내려 주십사하며 기우제(祈雨祭)를 지낼 판인데, 한쪽에서는 주구장창 곡물로 술을 만들어 "곤드레 만드레"를 불러 재낀다면 임금의 체면이 서겠느냐는 말이다. 보통은 그런 가뭄이나 흉년이 지나면 자연스레 금주령은 해제되었고, 백성들은 집집마다 술을 빚어 집안 제사에 사용하거나 대규모로 술을 빚는 술도가 근처 주막에는 대낮부터 취한 사람들이 넘쳐나기도 했다.

그러나 영조대에는 달랐다. 달라도 너무 달랐다. 선왕인 경종의 독살설에 휘말려 즉위초반부터 정치적으로 삐걱거리더니 재위 4년인 1728년에는 이인좌의 무리가 전국으로 난을 일으킨 무신난(戊申亂)까지 더해 성군을 꿈꿨던 영조에게 치명적인 내상을 입혔다. 거기에 생모인 숙빈 최씨의 경우는 신분이 천한 침방 나인출신이었던지라, 영조는 스스로 신분에 대한 콤플렉스로 가득찬 상태이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영조는 그 어떤 국왕보다 '모범'적인 왕의 삶을 살아가자 했다. 혹시나 신하들이 수군거리기라도 하면 마치 자신이 입방아에 오른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마치 초등학생들이 방학 때마다 짜놓은 일일 생활계획표처럼 하루 일정표를 만들어 단 일각의 오차도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철저해도 너무 철저했던 국왕의 삶이 영조의 하루였다.

그래서 영조는 조선의 국왕들 중 가장 집요하게 공부를 하였다. '위편삼절(韋編三絶)'이라는 말이 공자가 말년에 주역을 하도 자주 읽어 책을 맨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는 일화에서 생긴 말인데, 영조는 위편삼절이 아니라 위편십절이나 위편이십절을 넘볼 정도로 사서삼경을 줄줄줄 외우고 또 외웠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혹시 국왕이 매일 진행하는 유학공부 중 하나인 경연(經筵)에서 신하들에게 내용을 잘못 외웠을 경우 민망할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사전에 자기검열처럼 공부를 진행했던 것이다. 만약 그 상황에서 경전의 내용을 조금이라도 틀리면 곧바로 자신의 어미에 대한 몹쓸 이야기가 퍼질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우리가 흔히 자식이 잘못을 하면 그 부모를 욕한다는 말이 실은 오랜 전통을 가진 이야기이기도 하다.

조선후기 대표적인 풍속화가인 혜원 신윤복이 그린 작품이다. 예나 지금이나 술 마시고 싸움나면 딱 이 그림 한 장으로 정리된다. 한쪽에서는 싸움을 말리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기세등등하여 욕지거리를 날리는 듯한 모습. 좋은 술 먹었으면, 마무리도 즐겁게 끝내야 술술 풀리는 것이 인생사다.
▲ <유곽쟁웅(遊廓爭雄)> 조선후기 대표적인 풍속화가인 혜원 신윤복이 그린 작품이다. 예나 지금이나 술 마시고 싸움나면 딱 이 그림 한 장으로 정리된다. 한쪽에서는 싸움을 말리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기세등등하여 욕지거리를 날리는 듯한 모습. 좋은 술 먹었으면, 마무리도 즐겁게 끝내야 술술 풀리는 것이 인생사다.
ⓒ 간송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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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이러하니, 술에 대한 생각도 이전의 국왕과는 극명하게 다른 입장을 가졌던 국왕이 바로 영조였다. 보통 조선의 국왕을 생각하면 산해진미의 온갖 향기로운 음식과 술을 끼니마다 먹었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영조는 '검소' 라는 단어가 무엇인지 몸소 실천에 마지않았다. 당연히 술은 제외되었으며,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시시때때로 금주령을 선포하여 애주가들의 마음을 괴롭게 한 국왕이었다. 영조는 정확히 재위기간이 51년 7개월이라는 조선 최장수 재위기간을 자랑하는 국왕이었는데, 그중 약 50년을 금주령을 내렸으니 사태의 심각성이 조금은 이해가 될 것이다.

심지어 영조는 모든 제사에서 예주(醴酒)를 쓸 것이며, 모든 술은 금지하고 위반자는 엄벌한다는 최악의 금주령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예주(醴酒)는 일종의 감주로 알코올 성분이 거의 없는 맹숭맹숭한 맹물과 같은 무늬만 술이었다. 특히 금주령을 어긴 자는 사형으로 다스린다는 무시무시한 칼날을 함께 들이 밀었으니 전국의 술고래들은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국왕인 자신이 선대왕의 위패를 모신 종묘에서 제를 올릴 때에도 신하들이 목숨을 내놓고 술을 올리기를 청하였지만,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고 감주로 대신하게 했으니 조선 금주령의 끝판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사도세자가 술을 마셨다. 그리고 낙선당에서 술 냄새 풍기며 공부하던 모습이 영조에게 딱 걸렸다. 이 사건은 엄청난 질타와 함께 뒤주 속에 갇혀 죽는 사건의 시발점이 되었다. 조선왕조 아니 이 땅 반만년 역사 중 가장 참혹한 사건인 아비가 아들을 뒤주에 가둬 8일 동안 물 한 방울 밥 한 숟가락 주지 않고 굶겨 죽인 '임오화변(壬午禍變)'이 그것이다.

그 원인을 제공한 날 영조32년 5월 1일, 창경궁 낙선당에서 공부하고 있던 사도세자는 그 공간에 불을 질렀다. 왕세자가 공부하던 곳이 활활 불에 타올라 주변 시위하던 신하들이 조선시대 소방수였던 급수군(汲水軍)을 불러 불을 끄자고 했지만, 영조는 단 한마디만 했다. "置之!-번역:냅눠라!" 였다. 그날 영조의 속이 얼마나 뒤집어 졌는지는 그 한마디 말로 모든 사태가 정리될 정도다.

사료를 보면, 사도세자의 주량은 초기에는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날 이후 사도세자의 폭음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증가하였다. 그리고 사도제자는 술과 함께 벌어진 수많은 사건과 오해 속에서 급기야 뒤주 속에서 삶을 마무리하게 된 것이다. 사도세자에게 술과 여자 그리고 폭음 속에서 일어나는 광증들은 소위 '바른생활 국왕'이라는 아비를 둔 '세자'라는 정신적 억압을 벗어 버리기 위한 탈출구였을지도 모른다.

우스갯소리지만, 술 먹은 개구리가 만취하면 가장 먼저 하는 말이 혀 꼬부라진 소리로 "야, 뱀 나와!"라는 우화가 있다. 상황을 봐가며 적당히 즐겨야 술술 넘어가는 술이지, 사람이 술을 마시는 것인지, 술이 사람을 마시는 것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마시면 그것은 술이 아니라 독인 게다. 그렇게 자주 술독에 빠지면 그 다음은 해마다 향내음 가득한 술잔만 받을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역사>는 독자 여러분들의 댓글을 바탕으로 다음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독자 지향성’ 기사로 시험해 보려 합니다. 이 이야기를 보고 난 후 댓글로 다음 역사 이야기 주제를 선정해 주시면 차분히 사료를 더 뒤지고 공부해서 글을 풀어 보려합니다. 댓글이 없으면, 제 마음대로 갑니다. ^^



태그:#사도세자, #술, #영주, #금주령, #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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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의 역사와 몸철학을 연구하는 초보 인문학자입니다. 중앙대에서 역사학 전공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경기대 역사학과에서 Post-doctor 연구원 생활을 했습니다. 현재는 한국전통무예연구소(http://muye24ki.com)라는 작은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공연소식, 문화계 동향, 서평, 영화 이야기 등 문화 위주 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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