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과 수준이 저마다 다른 관객 입장에선 늘 다양한 영화가 고프다. 국내 대부분의 창작자 역시 빠르게 변하는 관객들 취향을 충족시키기 위해 분투하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한국영화계엔 일정한 흐름이란 게 존재한다. <추격자>(2008) 이후 한동안 스릴러 영화 붐이 일었던 것처럼 특정 작품의 흥행 이후엔 늘 해당 장르나 소재가 유행처럼 이어지곤 했다.

일견 이해 가는 현상이긴 하다. 흥행성이 증명됐으니 관련한 선택을 하는 게 투자자 입장에선 위험 부담을 줄일 수 있으니 말이다. 다만, 이로 인해 여러 창작자의 의지마저 위축되게 하진 않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여러 신인, 중견 감독들은 새로운 소재와 이야기를 준비해놓고도 투자가 여의치 않아 장기간 고생하는 사례를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런 차원에서 이미 개봉한 영화들의 소재 편중 사례를 짚어보자. 여기엔 단순히 장르적 설정이 겹치는 경우도 있지만, 주요 사건 혹은 이야기 골격이 겹쳐 꽤 첨예한 갈등까지 생기는 경우도 포함된다.

 영화 <마스터>와 <원라인> 포스터.

영화 <마스터>와 <원라인> 포스터. ⓒ CJ엔터테인먼트, NEW


<원라인>과 <마스터> 그리고 <꾼>  

현재 상영 중인 영화 <원라인>은 작업대출 사기꾼들의 이야기를 다룬 범죄영화 장르다. 금융 범죄를 소재로 했다는 점에서 <마스터>와 비견될만하다. 지난해 12월 개봉한 <마스터>는 희대의 사기꾼 조희팔 사건을 뼈대로 지능 사기범들의 암투를 다뤘다. 영화는 누적 관객 700만을 넘기며 흥행했다. 이에 비해 <원라인>은 꽤 높은 완성도에도 아직 100만의 문턱을 넘지 못해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대출 사기와 피라미드 사업으로 서민의 등골을 빼 먹은 조희팔. 소재는 분명 다르지만 몇 가지 묘사와 사건 전개에선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무기력한 검찰, 사기 친 돈을 돌려주는 설정 등이 그렇다. <원라인>이 실제로 작업대출 사기가 횡행하던 2005년, 2006년을 배경으로 했고, 조희팔 사건 역시 비슷한 시기 벌어졌다지만 막상 시차를 얼마 두지 않고 개봉한 각 영화 관계자들 입장에선 미묘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지난 3월 29일 언론시사회에서 <원라인> 양경모 감독은 <마스터>와 비교 가능성에 대해 "비교해서 얘기될 수 있는데 여러 비하인드가 있다"며 "하나 말씀드리고 싶은 건 5년간 발로 뛰며 준비했다. 다른 부분은 흉내 낼 수 있을지 몰라도 오리지널리티(독창성)를 뺏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답한 바 있다.

최근 촬영을 끝낸 영화 <꾼> 역시 조희팔을 소재로 했다는 점에서 역시 <마스터>, <원라인>과 비교될 여지가 크다. 한 영화 관계자는 "<마스터>와 달리 조희팔 이후의 이야기에 더 비중을 실은 거로 알고 있다"며 "아무래도 유사성에 걱정하는 목소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라 귀띔했다. 실제로 영화 기획과 촬영은 <원라인>이 <마스터>보다 빨랐지만 개봉 시기에서 뒤로 밀렸기에 흥행에 있어선 억울한 측면이 있다.

<광해, 왕이 된 남자> <나는 왕이로소이다>

시간을 좀 앞으로 돌려 보면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아래 <광해>)와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이야기 골격 면에서 매우 유사하다. 우선 두 작품 모두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팩션이며, 진짜 왕과 가짜 왕의 공존을 모티브로 삼았다. 개발 단계에서부터 고전 동화 '왕자와 거지' 모티브로 삼았다는 말에 이런저런 구설수가 돌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두 영화의 개봉 시기가 2012년 8월과 9월로 정해져 여러 관계자가 난감해했다.

결과는 <광해>의 승리. 비슷한 모티브의 <나는 왕이로소이다> 쪽에선 충분히 아쉬울 흐름이었다. 물론 드라마와 코미디라는 그 특징이 매우 다른 장르를 취하고는 있었지만, 관객 입장에선 비슷한 모티브를 연달아 관람하는 셈이니, 신선도 면에서 우려할 수밖에 없다.

<내부자들> <검사외전> 그리고 <더 킹> 등

 영화 <내부자들>, <검사외전>, <더 킹>의 장면들.(위에서 아래 순)

영화 <내부자들>, <검사외전>, <더 킹>의 장면들.(위에서 아래 순) ⓒ 쇼박스, NEW


근 3년간은 바야흐로 '사회고발' 영화의 홍수라고 해도 과언 아니다. 이미 개봉해서 상영이 끝난 <내부자들>, <검사외전>, <더 킹> 등은 각각 검찰, 언론, 재벌 및 정치인들의 유착관계를 저마다 문법으로 치밀하게 묘사했다. 또한 <특별시민> <V.I.P.>등 올해 개봉할 사회 고발성 영화들 역시 꽤 많아, 여러 매체에서 수차례 소개하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작품에 비해 그 유사성은 각각 떨어지지만 크게는 대한민국 권력의 민낯과 구조적 문제를 짚으려 했다는 점에선 충분히 묶어 생각할 수 있다. 동시에 이런 사회고발 일색의 영화는 40대 남성배우 중심으로 이야기가 흐르는 면이 있어, 배우 편중 현상을 일부 이끄는 부작용도 있다.

<암살>과 <밀정> 등의 시대극

2010년 전후까지만 해도 시대극의 유행을 쉽게 예측하기 어려웠다. 스릴러 혹은 액션 영화들이 주요 흐름이었고 비슷한 영화들이 꽤 쏟아져 나오던 때였다. 그러다 최동훈 감독의 <암살>(2015)을 기점으로 시대영화들이 전성기를 구가했다.

역시 단순 비교는 어렵겠지만 시대극 장르로 독립투사를 조망했다는 점에서 <암살>은 <밀정>과 함께 단골처럼 언급된다. 각각 1930년, 1920년이라는 시대적 차이가 있고, 독립운동 전반을 묘사한 것과 한 인물에 보다 집중했다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여성 독립투사의 등장, 인물의 내면 갈등이 부각된다는 점에선 유사성이 있다. 보다 이후 개봉한 <덕혜옹주> 그리고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 역시 시대적 배경만 놓고 보면 이 범주에 묶을 수 있다.

 영화 <암살>(위)과 <밀정>의 한 장면.

영화 <암살>(위)과 <밀정>의 한 장면. ⓒ 쇼박스, 워너브러더스코리아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이 반복되는 걸까. 비단 장르의 유행이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라지만 소재와 골격, 모티브 등이 겹치는 것에는 분명 문제가 있어 보인다. 여러 영화관계자들 역시 "제작자와 투자자의 바람과 요구가 얽히거나 맞아떨어지면서 생기는 현상"이라 입을 모았다. 사실 매력적인 소재일수록 관계자들이 탐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그걸 다루고 풀어내는 방식인데 많은 제작자, 투자자들이 캐스팅과 개봉 시기에만 힘을 쏟으려 한다는 점이 패착이지 않을까.

한 영화 제작 관계자는 "캐스팅이 누가 먼저 되느냐에 따라 투자가 좌우되는 경향이 있긴 하다"며 "창작자 입장에선 당연히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소재의 작품을 하고 싶진 않을 거다. 그와 동시에 일단 투자를 받았다면 쉽게 바꾸거나 포기하지 않으려는 성질 또한 있다"고 전했다.

여러 모로 어려운 일이다. 창작도 창작이지만 하나의 영화를 완성하고 개봉하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들어간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여기에 더해 신인은 신인대로 중견은 중견대로 자신만의 인장을 찍고, 조금이라도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창작 정신'을 기대하는 건 무리일까.

원라인 마스터 내부자들 충무로 암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