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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군의 SNS홍보기자로 지난 1년 활동했다. 제2기 양양군 SNS홍보기자로 선정되어 위임장과 기자증을 받으러 양양군청으로 6일 새벽 일찍 광화문광장에서 출발했다. 광화문역에서 5호선을 이용해 왕십리까지 이동한 뒤 다시 2호선으로 갈아타고 동서울터미널이 있는 강변역으로 갔다. 서둘렀지만 이미 첫 차는 출발한 뒤라 2층 고속버스터미널로 향했다.

마침 7시 출발 속초 경유 양양행 버스가 있었다. 동서울에서 양양으로 곧장 갈 경우엔 2시간 40분이면 되지만 속초를 경유할 경우엔 3시간 정도 소요된다. 그러나 이 정도라도 당일로 설악산 등반도 가능할 정도로 교통편이 좋아졌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다.

6시 30분 출발 오색행 버스를 이용하면 오색령에 8시 30분을 전후에 도착하니 대청봉을 등반하고도 서울로 다시 돌아올 수 있다. 물론 사람에 따라 오색령(한계령)에서 대청봉까지 하루가 꼬박 걸리는 경우도 있지만, 대다수의 등반객은 오색령에서 대청봉까지 4~5시간이면 충분히 걸을 수 있고, 오색으로 하산은 2시간이면 충분하다.

고속버스는 고속도로를 빠져나온 뒤 휴게소에서 15분간 휴식시간을 준다. 다시 출발해서 속초 터미널에 들려 주유를 한 뒤 양양으로 향해 바닷가를 달린다.

낙산해수욕장을 막 벗어나자 차창을 통해 남대천 제방도로에 벚꽃이 만개한 풍경이 희붐한 안개 너머로 보였다. 시간만 허락된다면 저 풍경 속에서 대청봉과 봄이 한창 피어나는 남대천을 촬영하겠지만 내년으로 미루고 군청에서 멀지않은 현산공원이라도 이번에 찾으리라 마음먹었다.

양양군청과 현산공원 4월 6일 양양군 SNS홍보기자 위촉식에 참석하려 달려간 양양군청엔 봄이 한껏 찼다. 현산공원은 벚꽃과 목련이 피어 구름처럼 부풀었고, 햇살은 아직 눈이 덮인 설악산과는 무관하다는 듯 따가웠다. 기온이 영상 20도라니 하루가 다르게 산이 부풀어가겠다.
▲ 양양군청과 현산공원 4월 6일 양양군 SNS홍보기자 위촉식에 참석하려 달려간 양양군청엔 봄이 한껏 찼다. 현산공원은 벚꽃과 목련이 피어 구름처럼 부풀었고, 햇살은 아직 눈이 덮인 설악산과는 무관하다는 듯 따가웠다. 기온이 영상 20도라니 하루가 다르게 산이 부풀어가겠다.
ⓒ 정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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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서 내려 곧장 군청으로 향했다. 군청으로 들어서며 고개를 들어 현산공원을 보니 벚꽃이 이미 만개했다. 군청입구에서 현산공원을 촬영하고 기획감사실로 올라갔다. 화장실에 들어가 간단하게 세수를 하고 나오자 곧 선정된 분들이 속속 도착했다.

10시 30분 김진하 양양군수와 한정임 기획감사실장이 자리에 앉고 양양군의 홍보를 담당하는 조은주 계장의 사회로 제2기 양양군 SNS홍보기자 위촉식이 진행됐다. 위촉장을 받고 기념촬영을 마친 뒤 간담회가 진행됐다. 여기에서 지난 1년의 경험을 통해 느꼈던 부분을 밝혔다.

SNS홍보기자는 뉴스를 낼 수도 있으나 속보성인 뉴스보다는 다양한 자료를 토대로 한 기사에 적합하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 가령 양양군의 대표적인 축제인 송이축제와 연어축제를 소개하더라도 현장에서 곧장 중계를 할 수 없는 이상 오히려 그 이전에 촬영해 두었던 사진 등을 활용해 기사를 작성했을 때 보다 좋은 홍보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물론 SNS홍보기자란 뉴스를 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페이스북이나 카카오스토리, 개인의 블로그, 오마이뉴스나 여타 메타블로그를 통해서 가능하다. 이때도 뉴스와 기사란 두 가지 방법이 적용된다.

뉴스만큼의 시급성을 요하는 경우엔 양양군청 홍보담당 공무원의 검토를 거쳐 양양군 대표블로그(http://blog.naver.com/likeyyang)에 노출되기 까지는 하루 이상 시간이 걸릴 때가 많다. 자연히 뉴스로서의 가치는 반감되기 마련이다. 이런 경우 속보성 뉴스로 소개하지 않고 보다 충실하게 자료를 보강해 기사로 냈을 때 더 좋은 효과가 곧장 나타난다.

간담회까지 마치고 일행들은 점심식사를 위해 양양시장 근처로 이동했다. 골목 안까지 봄은 화사하게 꽃을 피웠다.

현산공원 현산공원은 양양군청과 양양군의회, 양양·속초 교육지원청, 양양군등기소, 양양향교와 양양문화원 등 주요 기관들이 산을 끼고 자리한 중심이다. 벚꽃이 핀 때 많은 이들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꽃놀이를 나선다.
▲ 현산공원 현산공원은 양양군청과 양양군의회, 양양·속초 교육지원청, 양양군등기소, 양양향교와 양양문화원 등 주요 기관들이 산을 끼고 자리한 중심이다. 벚꽃이 핀 때 많은 이들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꽃놀이를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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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군청에서 양양군의회를 거쳐 오르거나, 양양지구대 옆을 통해서 접근하기 좋은 위치에 현산공원이 있다. 이 현산(峴山)이라는 지명은 강원도 양양군과 같은 한자를 사용하는 중국 양양(襄陽)에 있는 산 이름을 따서 지었다.

현산공원 벚꽃 현산공원의 4월은 벚꽃이 피면 아이들 손을 잡고 나선 이들이 많다. 걷기 좋게 정돈된 길을 따라 오래된 벚나무들이 일제히 꽃을 피우면 그리 높지 않은 산이 온통 구름에 가린 듯 싶다.
▲ 현산공원 벚꽃 현산공원의 4월은 벚꽃이 피면 아이들 손을 잡고 나선 이들이 많다. 걷기 좋게 정돈된 길을 따라 오래된 벚나무들이 일제히 꽃을 피우면 그리 높지 않은 산이 온통 구름에 가린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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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산공원은 지금이야 근린공원으로 조성되어 군민들 휴식처로서 사랑받지만 최근 군청이 있는 군행리의 뒷산을 통과하는 도로를 개설하며 조사한 바로는 오래전부터 양양을 지키려는 선인들의 호국의 얼이 깃든 읍성(邑城)이였음을 확인했다.

성을 축조한 시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서기 1217년​(고려 고종 4년)에 이 읍성에서 거란의 침입을 맞아 적을 물리친 바 있음이 고증을 통해 밝혀졌고, 1253년(고려 고종 40년)에는 몽고의 침입을 받았을 때 폐허가 됐다.

나라에 크고 작은 변란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때마다 향토를 지키려는 양양읍민의 호국의 정신이 깃든 현산공원은 중요한 사적지다. 벚꽃 만개한 언덕을 오르기 시작하면 행정수복기념탑·충효탑·필승탑·3.1운동기념비 등이 있다.

안병하 경무관 출생지 1980년 광주 5·18민주항쟁에서 신군부가 전남도경에 발포명령을 내렸을 때 “시민에게 절대로 발포를 할 수 없다”고 거부해 모진 고문을 당하고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 당시의 전라남도 경찰국장이었던 고 안병하 경무관(1928~1988)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 안병하 경무관 출생지 1980년 광주 5·18민주항쟁에서 신군부가 전남도경에 발포명령을 내렸을 때 “시민에게 절대로 발포를 할 수 없다”고 거부해 모진 고문을 당하고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 당시의 전라남도 경찰국장이었던 고 안병하 경무관(1928~1988)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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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현산공원 바로 아래 도로변 양양등기소 옆에 지금은 꽃집으로 바뀌었지만 대한민국의 현대사에서 가장 칭송받을 인물이 태어나 유년기를 보낸 곳이다. 1980년 광주 5·18민주항쟁에서 신군부가 전남도경에 발포명령을 내렸을 때 거부해 모진 고문을 당하고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 당시의 전라남도 경찰국장이었던 고 안병하 경무관(1928~1988)이 이곳의 인물이다.

안병하 경무관이 태어난 집터에서 보면 앞산이 이 현산공원이고 군청 앞을 지나 2~3분 거리에 그가 다녔던 양양초등학교가 있다.

바쁜 걸음으로 둘러보는 시간 햇살이 눈부셨다. 현산공원에 있는 기념탑비들에 대해 짧게 소개한다.

행정수복기념탑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동족상잔의 비극을 맞게 되었으나 1950년 10월 1일 아군의 북진으로 공산치하에 뺐긴지 5년 2개월 만에 수복되어 군정이 실시되었다. 이 양양군 양양읍을 수복한 날을 후에 국군의 날로 제정해 현재에 이른다.
▲ 행정수복기념탑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동족상잔의 비극을 맞게 되었으나 1950년 10월 1일 아군의 북진으로 공산치하에 뺐긴지 5년 2개월 만에 수복되어 군정이 실시되었다. 이 양양군 양양읍을 수복한 날을 후에 국군의 날로 제정해 현재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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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수복기념탑

양양군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통해 해방을 맞았으나 북위38도선을 경계로 국토가 남북으로 분단됨으로 공산치하로 군의 상당부분이 공산치하로 들어갔다. 38도선 남쪽에 위치한 현남면 전역과 현북면의 잔교리, 대치리, 명지리, 법수치리, 면옥치리, 어성전리, 원일전리, 장리와 서면 서림리, 황이리, 갈천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공산치하에 강제 수용됐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동족상잔의 비극을 맞게 되었으나 1950년 10월 1일 아군의 북진으로 공산치하에 뺐긴지 5년 2개월 만에 수복되어 군정이 실시되었다. 이 양양군 양양읍을 수복한 날을 후에 국군의 날로 제정해 현재에 이른다.

1954년 11월 17일 군정실시 3년 4개월 만에 행정권이 군으로부터 민간에 이속되었기에 이를 기념하여 1955년 3월 현산공원 정상에 탑을 세웠다. 1990년 6월 2일 현재 위치로 옮겼다.

전후복구사업기념탑(공병탑) 한동안 ‘독립문’이나 ‘공병탑’으로 많은 이들이 불렀던 이 탑의 공식 명칭은 ‘전후복구기념탑’이다. 전면에 새겨놓은 ‘독립문’이란 글씨와 총이 아닌 곡괭이로 땅을 짚고 수건으로 땀을 닦는 공병대원의 모습 때문에 독립문이나 공병탑이라 불렀다.
▲ 전후복구사업기념탑(공병탑) 한동안 ‘독립문’이나 ‘공병탑’으로 많은 이들이 불렀던 이 탑의 공식 명칭은 ‘전후복구기념탑’이다. 전면에 새겨놓은 ‘독립문’이란 글씨와 총이 아닌 곡괭이로 땅을 짚고 수건으로 땀을 닦는 공병대원의 모습 때문에 독립문이나 공병탑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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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복구사업기념탑(공병탑)

6.25동란 때 제1101야전 공병단이 1951년 6월부터 1954년 11월 까지 양양지역에 주둔하여 전쟁임무를 수행한다. 양양군청, 양양국민학교, 양양교 등 전후복구사업과 지역의 재건을 위한 대민지원사업을 수행했다.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실의에 빠져있던 양양군민에게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주었던 것을 기념해 1101 야전 공병단이 1953년 10월에 양양군청 앞 4거리에 건립했다.

이후 1972년 7월에 지금의 양양교 서쪽 제방으로 이전했다. 그리고 2008년 7월 양양남대천 둔치의 도로확장을 할 때 콘크리트로 되어 있던 하단의 '독립문' 양식을 딴 부분을 석재로 바꿔 현산공원으로 옮겨 세웠다.

충혼탑 현산공원에 설치된 기념탑 가운데 가장 높은 높이 8.85m, 가로 4.5m로 3.1운동 당시 돌아가신 순국선열과 6.25동란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해 산화한 양양출신 315위의 넋을 추모하고자 1966년 6월 6일 건립되었다.
▲ 충혼탑 현산공원에 설치된 기념탑 가운데 가장 높은 높이 8.85m, 가로 4.5m로 3.1운동 당시 돌아가신 순국선열과 6.25동란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해 산화한 양양출신 315위의 넋을 추모하고자 1966년 6월 6일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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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혼탑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은 국권회복을 위해 일제에 항거하다 돌아가신 순국선열과,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영령의 희생과 애국정신의 바탕 위에서 이룩되었다. 국난극복을 위해 스스로를 버리고 국가와 민족이라는 대의를 취한 선열들의 위국헌신 정신은 후대까지 기려야 된다.

충혼탑은 높이 8.85m, 가로 4.5m로 3.1운동 당시 돌아가신 순국선열과 6.25동란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해 산화한 양양출신 315위의 넋을 추모하고자 1966년 6월 6일 건립되었다.

필승탑 현산공원에 설치된 기념탑 가운데 유일하게 누가 왜 건립했는지를 밝혀놓지 않은 탑이다. 그러나 이 기념탑은 1950년대 국군에 태권도를 도입한 최홍희 소장이 쓴 글씨다. 당시의 문화로 보았을 때 건립도 군장병들이 동원되어 세워졌으리라 유추된다. 1980년 이전까지는 정면에서 보아 왼쪽 아랫부분에 글자가 각되어 있었다.
▲ 필승탑 현산공원에 설치된 기념탑 가운데 유일하게 누가 왜 건립했는지를 밝혀놓지 않은 탑이다. 그러나 이 기념탑은 1950년대 국군에 태권도를 도입한 최홍희 소장이 쓴 글씨다. 당시의 문화로 보았을 때 건립도 군장병들이 동원되어 세워졌으리라 유추된다. 1980년 이전까지는 정면에서 보아 왼쪽 아랫부분에 글자가 각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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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승탑

이 탑은 필력이 뛰어나다. 웅혼한 힘이 느껴지는 필승(必勝) 두 글자를 4개의 화강암을 세우고 각을 했다. 이 글씨를 쓴 이는 1950년대 육군 장성으로 태권도와 관련해 오도관을 창설한 최홍희 소장이 쓴 글자로 확인됐다.

탑비의 아래(정면으로 보아 왼쪽)엔 어떤 연유에서인가 글을 쓴 최홍희란 이름을 지운 흔적이 있다.

3.1만세운동 기념비 화강석 기단에 높이 3.15m의 만세상은 청동제로 한 여인이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조성하고, 화강석 바탕에 오석의 기념비 앞면에는 양양지방 만세운동의 역사적 의미와 건립취지가 새긴 양양군의 대표적 기념비다.
▲ 3.1만세운동 기념비 화강석 기단에 높이 3.15m의 만세상은 청동제로 한 여인이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조성하고, 화강석 바탕에 오석의 기념비 앞면에는 양양지방 만세운동의 역사적 의미와 건립취지가 새긴 양양군의 대표적 기념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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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만세운동 기념비

양양은 영동권에서 만세운동이 태동한 곳이다.

1919년 2월 20일 지역유림 20여명이 양양향교 등이 위치한 이곳에 모여 고종황제의 승하를 슬퍼하는 망곡(望哭)을 한 뒤 유림 10여 명을 서울로 보냈다. 이것이 만세운동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기념비는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희생되거나 투옥된 순국선열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동아일보 창간 45주년 기념사업으로 동아일보사와 양양군 협찬회 공동으로 1974년에 건립했다.

화강석 기단에 높이 3.15m의 만세상은 청동제로 한 여인이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조상됐다. 화강석 바탕에 오석의 기념비 앞면에는 양양지방 만세운동의 역사적 의미와 건립취지가 새겨져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정덕수의 블로그 ‘한사의 문화마을’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가난은 불편하지만 부끄러움은 아니다. 한계령 바람같은 자유를 늘 꿈꾸며 살아가며, 광장에서 오늘을 역사로 기록하고 시로 표현한다.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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