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현실적인 삶을 사는 중국사람은 신의 존재를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중국사람이 숭배하는 종교의 창시자는 모두 사람입니다. 중국사람의 정신세계를 담당하는 종교로는 유교·불교·도교가 있는데, 이 세 종교사상의 기초를 닦은 사람은 각각 공자·석가모니·노자입니다.

중국사람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위의 세 사람에게 예를 표합니다. 예를 표하는 '제사'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한국과 다릅니다.

한국에서는 '제사'를 신령이나 죽은 사람의 넋에게 음식을 바쳐 정성을 나타내는 의식이라고 풀이합니다. 중국에서는 신령이나 조상에게 음식을 바쳐 숭배하고 보호해주기를 바라는 의식이라고 풀이합니다.

중국 사람은 '제사'라는 예(禮)를 표하면 당연히 '제사'의 대상이 되는 신령이나 성인이 나를 보호해준다고 생각합니다. 보호해준다는 단어는 내게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내게 좋은 일이 생기게 해준다는 의미도 포함합니다.

중국에서는 내가 바라고 원하는 내용을 빨간 나뭇조각이나 천에 써서 걸어놓는데, 이런 표찰을 허원패(許願牌)라고 합니다. '소원을 적은 표식'이라는 의미지요.

종교를 대하는 중국사람의 자세... '필요하면 가져다 쓴다'

도교사원(왼쪽)과 공자 공묘 대성전(오른쪽)에 있는 소원을 적어 놓은 ‘허원패’
 도교사원(왼쪽)과 공자 공묘 대성전(오른쪽)에 있는 소원을 적어 놓은 ‘허원패’
ⓒ 김기동

관련사진보기


중국사람은 유원지에 놀러 갔는데 그곳에 절이 있으면 소원을 적은 표식 '허원패'를 걸어 놓고, 등산 갔는데 그곳에 도교 사원이 있으면 또 '허원패'를 걸어놓습니다. 마찬가지로 유교 공간인 공묘나 문묘를 방문했을 때도 역시 '허원패'를 걸어놓습니다. 불교나 도교나 유교를 종교로 믿는 게 아니라, 모두 훌륭한 성인인데 예(禮)를 표하면 소원을 들어줄 것이라 생각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유교·불교·도교 창시자 공자·석가모니·노자의 사상이 다르기는 하지만, 객관적으로 모두 타당성이 있기 때문에, 필요할 때마다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종교를 가져다 쓰는 겁니다.

대학 입시나 입사 시험을 앞두고는 훌륭한 선생님이었던 유교의 공자가 필요하고, 사업에 실패하거나 연애하던 대상이 헤어져 마음이 심란하면 불교의 석가모니가 필요하고, 건강이 나빠지거나 장사를 시작할 때는 도교의 노자나 재물신 관우(關羽)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상황에 따라 필요한 종교가 다르고, 또 종교의 창시자를 기리는 공간이 다른 장소에 있다 보니 불편했나 봅니다. 그래서 중국사람들은 공자와 석가모니와 노자를 함께 모시는 삼수당(三修堂)이라는 종합 공간을 만들게 됩니다. 한국에서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중국 산동성 ‘홍예구’에 있는 삼수당(三修堂)
 중국 산동성 ‘홍예구’에 있는 삼수당(三修堂)
ⓒ 김기동

관련사진보기


삼수당(三修堂)에 같이 모셔져 있는 ‘도교 노자’ ’불교 석가모니’ ‘유교 공자’
 삼수당(三修堂)에 같이 모셔져 있는 ‘도교 노자’ ’불교 석가모니’ ‘유교 공자’
ⓒ 김기동

관련사진보기


삼수당(三修堂)에서 '수(修)'는 한국 한자에서는 '닦다, 익히다'라고 해석하지만, 중국어에서는 '고쳐서 완전하게 만든다'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니까 중국사람은 삼수당(三修堂)이라는 공간을 찾아 각각 다른 능력을 갖춘 공자와 석가모니와 노자에게 이루고자 하는 바를 한꺼번에 말하는 겁니다. 마치 한국의 중국 음식점에서 자장면과 짬뽕을 한 번에 먹을 수 있는 '짬짜면'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중국사람은 각각의 종교가 서로 다른 사상을 가지고 있고, 또 그 다른 사상이 서로 모순된다고 할지라도,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필요한 부분을 가져다 사용하는 실용적인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사회생활은 유교로 개인 생활은 도교로

청나라 옹정황제(1678~1735)는 "불교로는 마음을 다스릴 수 있고, 도교로는 몸을 다스릴 수 있으며, 유교로는 세상을 다스릴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또 실제 그렇게 생활했고요. 황제 신분으로, 먹는 문제 즉 경제 생활은 풍족했기 때문에 돈을 벌게 해준다는 '관우'(關羽)는 필요하지 않았나 봅니다.

일반 중국사람은 공인으로 생활할 때는 유교를, 개인(私人)으로 생활할 때는 도교를 사용해 살아갑니다. 중국사람은 사회생활에서 공인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야 할 때는, 철저히 유교 사상에 따라 국가에 충성하고, 자신이 속한 사회 조직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합니다. 즉 유교 사상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마음으로 '나'보다는 '남'을 위해 살겠다고 목소리 높여 말하지요.

하지만 개인 생활 공간으로 돌아오면, 사회생활 공간에서 내가 언제 공자님 같은 말을 했냐는 듯, 그런 말은 깨끗하게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개인 생활에 필요한 도교 사상에 따라 건강하게 오래 살고, 돈을 버는 데 힘씁니다. 

그러니까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유교 공자 말씀처럼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개인 생활을 하면서는 도교의 신선처럼 오래 살기 위해 좋은 음식을 먹고, 또 이런 좋은 음식을 언제든지 먹을 수 있는 돈을 버는 데 최선을 다하는 거지요.

설령 낮에 사회생활을 하면서 말한 내용과 저녁에 개인 생활을 하면서 행위하는 내용이 서로 모순될지라도, 각각의 상황에서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대처 방안을 실용적으로 판단해 행동했기에 스스로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다고 여깁니다.

'관포지교'의 교훈

'관포지교'는 친구인 관중과 포숙 두 사람 이야기인데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져 있지요. 중국 춘추시대 제나라에 정변이 일어나자 관중은 왕자 '규'를 포숙은 왕자 '소백'을 수행하고 이웃 나라로 피합니다. 제나라에서 정변을 일으킨 왕(제후)이 죽자, 관중이 모시는 '규'왕자와 포숙이 모시는 '소백'왕자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왕위에 오를 수 있게 됐습니다.

관중은 서둘러 모시던 '규'왕자를 귀국시키고, 자신은 '규'왕자의 동생 '소백'을 암살하려고 '소백'왕자가 지나는 길목에 숨어 기다립니다. 관중은 '소백'왕자가 나타나자 활을 쏘아 '소백'왕자를 죽이고, 자신이 모시는 '규'왕자를 왕으로 추대하기 위해 여유롭게 제나라로 향합니다.

하지만 이때 관중이 쏜 화살이 '소백'왕자의 복부를 명중시키기는 했지만, 불행하게도 화살이 왕자의 허리띠 장식을 맞혔습니다. '소백'왕자는 위험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죽은 척하면서 관중은 속인 것이었습니다.

그후 '소백'왕자가 왕권 다툼에서 승리하자, '규'왕자를 지지했던 신하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자결합니다. 하지만 관중은 도망가서 목숨을 보전하지요. '소백'왕자는 제나라 15대 왕에 올라 환공이 됩니다. 환공은 왕이 된 후 그동안 옆에서 보좌했던 포숙에게 재상(총리)을 추천하라고 합니다. 이때 포숙은 친구인 관중을 추천합니다. 실용주의자인 환공은 관중이 자신을 죽이려 했던 원수지만, 능력을 높아 사 그를 총리에 임명합니다. 관중은 환공을 도와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어, 제나라 환공을 춘추시대 오패(다섯 패자) 중 첫 번째 패자로 만듭니다.

그후부터 사람들이 진정한 친구 사이를 말할 때, 관중과 포숙을 이야기하면서 '관포지교'라는 고사성어가 생긴 거지요.

산동성 ‘제나라 박물관’
 산동성 ‘제나라 박물관’
ⓒ 김기동

관련사진보기


제나라 박물관에 있는 관중(왼쪽)과 환공(오른쪽)
 제나라 박물관에 있는 관중(왼쪽)과 환공(오른쪽)
ⓒ 김기동

관련사진보기


'관포지교'는 친구 사이의 우정을 의미하는 고사성어지만, 이 이야기에서 제나라 환공의 실용주의적인 사고방식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환공은 어떤 인재가 꼭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그 사람이 과거에 자신을 죽이려고 한 원수였다는 사실 같은 건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이런 중국사람의 실용주의적인 사고방식과 생활태도는 공자 이야기를 쓴 <논어>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공자와 제자들이 관중의 환공 암살 미수 사건을 토론한 내용이 <논어> 현문편에 나옵니다.

제자 '자로'가 공자에게 묻습니다. "왕자 '규'를 모시던 신하들은 '규'가 왕권 다툼에서 패하자, '규'를 따라 자결해 신하로서 해야 할 도리를 지켰는데, 가장 가까이서 '규'왕자를 수행했던 최측근 관중은 도망쳐 목숨을 연명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규'왕자의 적이었던 환공 밑에서 재상(총리)까지 지냈으니 관중이 인(仁)을 행했다고 말할 수 없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공자는 제자 '자로'의 질문에 "너는 한 사람의 행동에서 인의(仁義)를 찾으려고 하지만, 나는 천하 질서를 회복하는 데서 인의(仁義)를 찾으려고 한다"라면서 "나는 관중이 의(義)를 거슬렸다고 보지 않는다. 관중이 이룬 업적으로 말미암아 춘추시대 백성이 편해졌고, 특히 오랑캐의 침략을 막아 중원(춘추시대 중국을 총칭하는 지역명)의 문화를 지켰다"라고 말합니다.

실제 결과가 중요하므로,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실용주의적인 사고방식이 필요하다는 가르침입니다.

어제의 역적이 오늘의 충신으로

중국 국영 CCTV 연속극 ‘스랑대장군’
 중국 국영 CCTV 연속극 ‘스랑대장군’
ⓒ 출처:바이두

관련사진보기


2006년 중국 CCTV(중국 국영 텔레비전 방송국)는 <스랑대장군(施琅大將軍)>이라는 연속극을 방영합니다. '스랑'은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왕권(황권)이 교체되는 시기의 장수였습니다.

'스랑'의 인생은 다사다난했습니다. 처음에는 명나라 장수로 일하다가 부대장과 같이 청나라로 투항해 청나라 장수가 됩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명나라로 돌아와 명나라 장수가 됐다가, 다시 청나라로 귀순해 명나라 멸망에 앞장섭니다.

이 시기 마지막까지 명나라 왕조(황조)를 지키기 위해 싸운 정성공(鄭成功)이라는 장수도 있었습니다. 정성공은 대륙에서 명나라가 멸망하자, 근거지를 타이완으로 옮기고 최후까지 명나라 부흥을 위해 힘씁니다. 하지만 청나라로 귀순한 '스랑'이 타이완을 공격해 명나라는 결국 멸망하고 맙니다.

그후 청나라 황제와 역사가들은 '정성공'은 마지막까지 국가를 위해 싸운 충신으로, '스랑'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 나라, 저 나라를 왔다 갔다 한 배신자로 기록합니다. 

새로 국가를 세운 청나라 입장에서는 '스랑' 장군이 비록 청나라를 위해 싸우기는 했지만 배신자이고, 하나의 나라에 끝까지 충성한 '정성공'이 충신이라며 앞으로 청나라 장군은 오직 청나라를 위해서만 싸우라는 본보기가 필요했던 것이지요. 마치 우리나라에서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세운 이성계가 마지막까지 고려 왕조를 위해 애쓰다 죽은 정몽주를 충신이라고 치켜세우는 것과 같은 겁니다.

그래서 최근까지 중국사람은 '정성공'은 충신이고 '스랑'은 배신자라는 등식을 머릿속에 새기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2006년 중국 국영 텔레비전 <스랑대장군> 연속극에서는 '스랑' 장군이 타이완을 대륙에 복속시킨 중국 통일 영웅으로 그립니다.

연속극을 제작한 연출가는 타이완이 중국 일부라는 역사적 사실을 상기시켜 인민들이 타이완 문제에 관심을 갖게 하기 위해 새로운 시각으로 '스랑' 장군을 해석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니까 '스랑' 장군은 중국 역사에서 300년 동안 배신자였다가, 2006년 갑자기 중국 통일 영웅이 된 겁니다.

원칙과 일관성은 없다, 다만 예측 가능하다

이런 저런 분야에서 중국과 관련된 일을 하는 한국사람은 "중국사람은 어제 한 말과 오늘 하는 말이 다르고, 과거에 했던 행동 방식과 지금 하는 행동 방식이 다르다"면서 "의뭉스러워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이런 인식 때문에 중국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지 예측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중국사람은 같은 일이라도 매번 당시 주위 상황과 여건에 따라 다르게 대응합니다. 현재 상황에서 가장 실용적인 최선의 대응 방안을 찾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떤 일을 처리할 때 원칙을 지키는 '일관성'이 부족합니다.

중국사람은 맞닥뜨린 상황을 파악하고 대처할 때, 정해진 원칙이나 법칙이 없기에 과거 5000년 역사 속에서 유사한 사례를 찾곤 합니다. 중국사람에게 역사는 종교와 같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판단하기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항상 과거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응했는지 그리고 그렇게 대응해 어떤 결과를 얻었는지 참고합니다.

그러니까 중국사람을 상대할 때 '지금까지 이랬으니, 이번에도 일을 이렇게 처리하겠지?'라고 추측하면 빗나갈 가능성이 큽니다. 중국사람과 마찬가지로 중국 5000년 역사에서 지금의 상황과 가장 유사한 사례부터 찾아봐야 합니다. 물론 중국 역사 외에 중국 문화 그리고 중국 고전 책도 참조해야 하겠지요. 

[About story] 한국에서 무역 일로 중국 사업가를 만나면서, 중국에서 장사 일로 중국 고객을 만나면서, 중국대학교에서 가르치는 일로 중국 선생님과 중국 대학생을 만나면서 알게 된 중국사람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되도록이면 제가 직접 경험한 일들을 쓰려고 합니다. 나무만 보고 산을 못 보는 우를 범할 수도 있겠지만, 중국에 관한 개략적인 이야기는 인터넷에 넘쳐 나므로 저는 저의 주관적인 기준으로 글을 풀어가겠습니다. 이런저런 분야에서 중국과 관련된 일을 하시는 분들의 피드백을 부탁합니다.


태그:#중국, #중국사람, #중국문화, #국가, #실용주의
댓글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중국에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중국사람이야기>,<중국인의 탈무드 증광현문>이 있고, 논문으로 <중국 산동성 중부 도시 한국 관광객 유치 활성화 연구>가 있다. 중국인의 사고방식과 행위방식의 근저에 있는 그들의 인생관과 세계관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어, 중국인과 대화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