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의 신작 <밤의 해변에서 혼자> 포스터.

홍상수의 신작 <밤의 해변에서 혼자> 포스터. ⓒ ㈜영화제작전원사


자본에 휘둘리고, 관객들의 보편적 취향까지 염두에 두고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한국적 상황을 감안할 때 홍상수는 '비교적 행복'한 감독이다. 누구 눈치 볼 것 없이 작품을 생산해도 해외 유수 영화제에서 주목하는 것은 물론, 이 나라에도 적지 않은 마니아들이 때마다 그의 영화를 주목하고 있으니.

최근에는 영화가 아닌 '어떤 사건' 때문에 사람들의 입길에 오르내리고 있으나, 그 문제와는 별개로 홍상수는 '영화감독'이다.

"아내와의 관계를 완벽히 정리하지 못한 채 젊은 여배우와 사랑에 빠졌다"는 건 부차적 상황인 동시에, 타자가 개입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이다. 홍상수의 행위가 '한국적 잣대'로 볼 때 비도덕적이라 할지라도.

러시아와 유럽 평론가들은 이미 1세기 전부터 예술을 접한 후 그 작품을 논의할 때 '작가'와 '작품'을 개별적 존재로 인식했다. 프랑스의 표상주의 시인 보들레르의 시(詩)는 시 자체로 해석했고, 유부녀와 매춘부 사이를 오갔던 보들레르의 사생활은 시와는 다른 영역의 프라이버시로 인정했다.

영화 이외의 이야기는 거세하고 본 <밤의 해변에서 혼자>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일신 우일신'하는 연기를 보여준 배우 김민희.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일신 우일신'하는 연기를 보여준 배우 김민희. ⓒ ㈜영화제작전원사


영역을 예술이 아닌 역사로 확장해보면 우리가 '불요불굴의 혁명가'라고 칭하는 이들 중에도 아내를 두고 밀애(密愛)를 즐기거나, 이혼하지 않고 새로운 여성과 연애를 한 사람들이 없지 않다. 물론, 홍상수가 그런 이들의 범주에 속한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서두가 길어졌다. 어쨌건 이 글에선 홍상수의 '사생활'이 아닌, 그가 시종여일해 온 '예술적 태도'만을 이야기하기로 한다.

최근 개봉된 김민희 주연의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홍상수 감독이 초기 작품에서부터 놓지 않고 있는 '권태로운 생'과 '서로에게 무관심한 사람들'이란 키워드가 예상을 빗나가지 않고 변주되고 있다. 홍상수의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한 소설가의 표현을 차용하자면 모두가 '익명의 섬'이다.

제 이름을 내놓기 거부하는 '익명'의 인간들이란 사람살이의 내밀함과 서로의 체온을 나누려 하지 않는다. 그저 물 위에 뜬 낯선 부유물처럼 서로가 서로의 주위에서 겉돌 뿐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런 관계에선 진정한 위로나 위무가 생겨날 수 없다.

여기 '유부남 감독'(문성근 분)과의 연애로 인해 궁지에 몰린 '미혼의 여배우'(김민희 분)가 있다. 영화에선 상세하게 묘사되지 않지만, 세인들의 조롱과 힐난은 불을 보듯 빤한 일. 그것들을 피해 독일의 한 도시로 떠난 여배우. 그러나, 문제는 그 문제로부터 멀리 떠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다.

세상과 인간으로부터 지치고 상처받은 여배우는 결국 한국으로 돌아와 지인들이 사는 바닷가마을로 간다. 그러나, 거기라고 뭐가 다를까? '익명의 섬'으로만 존재하는 사람들에게서 마음의 상처를 진정으로 다독이는 말을 듣는다는 건 날개 달린 개를 볼 가능성보다 낮다.

답을 주지 않는, 그래서 의미 있는 홍상수의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익명의 섬'처럼 보인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익명의 섬'처럼 보인다. ⓒ ㈜영화제작전원사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바로 이 여배우의 '떠돎'에 카메라를 가져다 대고 그의 행적을 끈질기고 미세하게 따라간다. 관객들은 궁금하다.

'저 여자가 안식 혹은, 편안함 비슷한 것에라도 이를 수 있을까?'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홍상수는 그 궁금증과 기대를 배반한다. 그곳이 독일이건 한국이건, 또 다른 어떤 도시건 '타자'의 아픔과 고통에 진실로 공감하며 함께 울어줄 이들은 지극히 드물다. 아니, 거의 없다. 이런 건조하고 비관적인 세계관은 '홍상수 영화의 힘'이기도 하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는 주인공 외에도 여러 명의 등장인물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출몰이 영화의 흐름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많은 말을 쏟아내도 그저 무심한 세상 속을 무언(無言)으로 오가는 유령 같은 존재들로만 보였을 뿐이다.

만약 그렇게 느낀 또 다른 관객이 있다면 그 역시 '익명의 세상'에서 '위로받는 것'을 일찌감치 포기한 사람이 아닐까 싶다. 비록 슬픈 일일지라도.

그리고, 마지막 하나. 잡지 모델로 시작해 대사 처리조차 미숙했던 초짜 배우를 거친 김민희의 연기는 갈수록 좋아지는 듯하다. <아가씨>에 이어 이번 <밤의 해변에서 혼자>까지 거듭 탈피(脫皮)의 과정을 거치고 있는 그가 나비가 될 날이 머지않은 것 같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 홍상수 김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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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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