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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서울현충원의 역사

지하철 9호선 동작역에 있는 표지
 지하철 9호선 동작역에 있는 표지
ⓒ 손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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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서울현충원'이 낯선 분들도 계시더군요. 그 분들은 '동작동 국립묘지'가 더 익숙하세요. 국립서울현충원이라 불리기 전에는 다들 국립묘지라 불렀기 때문이죠. 국립서울현충원의 시작은 1953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50년 6.25전쟁으로 군인만 13만 명이 전사하였습니다. 이 분들을 안장하기 위해 동작동 한강변에 국군묘지를 만들었어요. 그러나 13만 명의 전사자 중 이곳 동작동 국군묘지에는 채 1/10도 모시지 못하였고, 나머지 분들은 아직도 치열했던 전쟁터에서 모셔오지 못하고 있어요.

1965년 독립 운동가들과 국가유공자들을 모시면서 국립묘지로 승격하게 됩니다. 나라를 위해 희생하시는 분들은 늘 있지요. 당초 5만기를 예상하고 조성하였지만 1970년대에는 이미 만장이 되어 더 이상 모실 공간이 없어서 1979년엔 대전에 새로운 국립묘지를 만들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국립묘지는 서울과 대전에 만들어졌어요.

1996년 국립묘지는 "현충원"이라고 이름이 바꾸는데요. '현충'이란 '충성스러움을 드러내 보인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름에 걸맞게 현충원에서는 안장되신 분들의 충성스러움을 알리기 위해 다양한 체험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어요.

전시관 견학, 근.현대사 강의, 참배, 묘역순례, 호국영화관람 등의 체험프로그램과 함께 묘역정화 활동을 하는 봉사활동 프로그램도 있습니다. 이런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원하시면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과에 전화(02-826-6251)로 신청하시면 된답니다.

국립서울현충원에는 어떤 분들이 모셔져 있을까요?

6.25 전쟁에서 전사한 10만 여명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현충탑 지하의 위패봉안관
 6.25 전쟁에서 전사한 10만 여명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현충탑 지하의 위패봉안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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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포로로 잡혀 있다가 1994년 귀환한 조창호 중위가 직접 지운 자신의 위패가 있던 자리를 표시한는 노란 테두리
 북한에 포로로 잡혀 있다가 1994년 귀환한 조창호 중위가 직접 지운 자신의 위패가 있던 자리를 표시한는 노란 테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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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을 기념하여 현충탑의 높이는 31m이다.
 3.1운동을 기념하여 현충탑의 높이는 31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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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서울현충원에는 나라를 되찾기 위해 희생하신 독립운동가와 6.25전쟁 전사자와 베트남 전쟁 전사자 그리고 나라의 존속을 위해 희생하신 국가유공자들을 모시고 있어요.

이순신 장군은 충성스러움과 나라를 위한 희생은 어디에 내놓아도 부족함이 없는 나라를 구한 영웅이지만 현충원에는 충무공을 위한 그 어떤 추모시설도 없어요. 왜냐하면 현충원에 모셔진 분들이 희생했던 나라는 '대한민국'이기 때문입니다.

나라이름을 대한민국이라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지면서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200만 국민이 참여한 삼일운동의 결과로 국민이 주인인 공화정을 위해 세워지게 됩니다. 이 삼일운동을 기념한 기념물이 현충원에 있습니다. 바로 현충탑인데요. 현충탑의 높이가 31m입니다. 

현충탑 지하는 위폐 봉안관입니다. 6.25 전쟁 중 전사자만 13만 명이고 부상자와 실종자를 합하면 60만 명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것은 군인의 경우입니다. 여기에 민간인의 피해를 감안한다면 전쟁의 피해는 상상을 초월하는 어마어마한 피해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피해자는 여성과 어린이겠지요.

전사자 중 신원을 확인하지 못해 이름을 찾지 못한 7000여 무명용사들을 봉안한 곳
 전사자 중 신원을 확인하지 못해 이름을 찾지 못한 7000여 무명용사들을 봉안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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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자 13만 명 중 이곳 현충원에 안장된 전사자는 3만 명 정도입니다. 나머지 10만 여명은 아직도 전사한 곳에 남아 있습니다.

현충탑 지하 위패 봉안관에는 아직 유해를 안치하지 못한 분들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습니다. 검은 판 위에 하얀 글씨로 돌아가신 분들의 이름을 새겨 놓았습니다. 중간 중간 보이는 공간은 원래는 위패가 있었던 곳인데 이름을 지운 흔적입니다.

위패를 지운 경우는 두 경우입니다. 전쟁 중 전사자가 중복 신고되었던 것이 전쟁 후 정리된 경우와 유해발굴사업으로 유해를 찾아 안장하면서 위패를 지운 경우입니다.

유해발굴사업이란 전쟁이 치열했던 격전지에서 유해를 발굴하여 현충원에 모시는 사업입니다. 발굴된 유해는 DNA 검사를 통하여 가족을 찾아 신원을 확인합니다. 이렇게 신원이 확인되면 위패를 지우고 유골을 화장하여 충혼당에 모시고 있습니다.

많은 위패 중에 노란 테두리가 쳐진 위패가 있습니다. 이곳에는 조창호 중위의 위패가 있었습니다. 전쟁 중 전사 통지서를 받았지만 시신을 찾지 못해서 이곳에 위패를 모셨고 가족들은 이곳에서 조 중위의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조 중위는 살아 있었습니다. 포로로 북한에 잡혀 있었는데 몇 번의 탈출 시도 끝에 마침내 성공하여 1994년 귀환하였습니다. 가족과 상봉한 그는 손수 자신의 위폐를 지웠고 육군사관학교에서 전역식을 하였습니다. 조중위는 44년 3개월을 복무하여 우리나라 최장기 복무자라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애국지사묘역에서 바라 본 현충원 전경
 애국지사묘역에서 바라 본 현충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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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발굴사업으로 유골을 찾았지만 유족이 없는 경우 신원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이런 분들을 무명용사라 부르며 영현승천상 지하에 따로 모시고 있습니다. 이곳에 모셔진 무명용사가 7천여 명입니다. 전쟁이 아주 오래 전의 일이고 완전히 끝난 일이라 생각하지만 이곳에 오면 전쟁은 아직도 진행 중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현충원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은 애국지사묘역입니다. 이곳에는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하여 희생하신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모시고 있습니다. 순국선열은 일제에 항거하다가 목숨을 잃으신 분들을 가리키고 애국지사는 일제에 항거 하였지만 자연사하신 분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중 어느 분의 공이 더 큰지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부질없는 일이라 생각 합니다. 이분들이 계시지 않았다면 오늘의 우리나라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애국지사 묘역에 있는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의 묘
 애국지사 묘역에 있는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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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묘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분은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님이신데 한국 이름은 석호필이세요. 이분은 영국계 캐나다인으로 한국으로 귀화하지 않은 외국인이세요. 외국인도 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을까요? 물론 가능합니다. 외국인이지만 대한민국을 위해 공이 있다면 말입니다. 스코필드 박사님 말고도 강혜림씨와 위시팡씨가 국가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스코필드 박사님은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님이셨습니다. 1919년 3.1운동의 보복으로 일제는 제암리에 있는 교회에 마을 사람들을 모두 모아 놓고 밖에서 문을 잠그고 불을 질렀습니다. 교회 안에는 살아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말입니다. 깜짝 놀란 마을 사람들은 아이들이라도 살리기 위해 교회 창문으로 아이들을 내보냈습니다. 밖으로 나온 아이들을 일본 군인들은 총과 칼로 죽였습니다. 마을 하나가 통째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스코필드 박사님은 직접 제암리를 찾아가서 사진을 찍고 영문으로 기사를 써서 제암리의 학살을 외국에 알렸습니다. 만약 박사님께서 침묵하셨다면 제암리의 학살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이 일로 박사님은 추방당하였고 해방 후 다시 귀국하셔서 학생들을 가르치시며 어려운 학생들이 계속 공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셨습니다. 지병으로 돌아가시며 한국에 묻어 달라 유언을 하셔서 이곳 현충원에 안장되었습니다.

현충원의 봄

수양벚나무는 가지가 수양버들처럼 축축 늘어져 있다. 늘어진 가지에 매달린 벚꽃은 다른 곳의 벚꽃에서는 느길 수 없는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다.
 수양벚나무는 가지가 수양버들처럼 축축 늘어져 있다. 늘어진 가지에 매달린 벚꽃은 다른 곳의 벚꽃에서는 느길 수 없는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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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비가 내린 현충원의 벚꽃길
 꽃비가 내린 현충원의 벚꽃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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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원의 비석 하나하나에는 아름답지만 슬프고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이야기들이 숨어 있습니다. 현충원은 봄과 가을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특히 요즘 벚꽃이 피면 현충원은 눈부시게 아름답습니다. 현충원의 벚꽃은 수양벚꽃입니다. 수양벚꽃은 다른 벚꽃과 달리 수양버들처럼 가지가 축축 늘어져 정말 예쁩니다. 현충원의 모든 벚꽃이 수양벚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수양벚꽃을 볼 수 있습니다.

수양벚나무는 우리나라 중부지방에 자생하는 벚나무로 조선 효종 임금님께서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어요. 효종 임금님은 평생 청나라를 치기위한 북벌을 목표로 사셨습니다. 이 북벌계획의 일환으로 조선군의 주력 무기인 활을 만들기 위해 수양벚나무를 많이 심었답니다.

호국영령이 잠들어 있는 현충원에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심었던 수앙버들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눈부신 봄날에 국난극복과 나라사랑의 마음을 키울 수 있는 현충원 호국탐방길을 걸으시며 아름다운 수양벚꽃을 누려 보시길 권해 드립니다.

덧붙이는 글 | http://blog.naver.com/arabianna/220975842366
제 개인불로그에 올린 글입니다.



태그:#국립서울현충원, #호국탐방길, #나라사랑길, #수양벚나무, #꽃비가내리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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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컬리티 인문학이란 저평가 되어 있는 지역의 역사, 문화, 관광자원을 발굴, 개발하여 스토리텔링 하는일이다. 이것을 바탕으로 지속가능한 발전 방법을 찾아서 더 행복한 지역을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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