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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오후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매장에 <전두환 회고록>과 <이순자 자서전 - 당신은 외롭지 않다>가 나란히 진열되어 있다.
▲ 나란히 놓인 <전두환 회고록>과 <이순자 자서전> 4일 오후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매장에 <전두환 회고록>과 <이순자 자서전 - 당신은 외롭지 않다>가 나란히 진열되어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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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전두환의 자서전 <전두환 회고록>이 출간되었다. 책에서 전두환은 "나도 5.18의 피해자"라고 이야기했고 "폭동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는 구절도 나왔다. 당연히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다. 5.18기념재단을 비롯한 관련 단체들은 "역사에 대한 패악질"이라며 강도 높은 비판을 가했고, 광주광역시의회는 "역사의 철퇴를 맞은 자의 궤변"이라고 분노했다.

게다가 <한겨레>를 통해 1980년 5월 광주 민중항쟁 당시 그가 군의 자위권 발동 등 무력 진압에 직접 관여했다는 군 기록이 있음이 밝혀지기도 했다. 심지어 최근 기밀이 해제된 미국의 문서에서도 1980년 5월 당시 북한은 침공은커녕 군사행동의 움직임이 없다는 내용이 실려 있는데, 이는 전두환의 주장과도 전면 배치되는 것이다.

인터넷에서도 전두환의 자서전은 큰 공분을 일으켰는데, 그의 자서전을 두고 종이가 아깝다며 "나무야 미안해"라고 말하는 네티즌들도 다수였다. 5.18과 그 이전의 12.12 쿠데타, 5.17 쿠데타, 그리고 그 이후의 수많은 인권침해와 고문 사례들은 전두환이 가해자라고 명시되어 있고, 그 사건의 피해자들이 '가해자는 전두환'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오죽하면 광주 망월동에 있는 5.18 구(舊) 묘역에 들어가기 전에는 지난 1982년 전두환이 인근 담양에서 민박했던 것을 기념하는 비석을 발로 밟고 들어가는 것이 전통 아닌 전통이니 말이다.

<전두환 회고록>과 스티커

비슷한 시기(정확히는 자서전 출간에 조금 앞서)에 명동이나 종로, 을지로를 비롯한 서울 중심부에서 "점점 늘어나고 있는 5.18 유공자들이 공무원 시험에서 과목마다 10%의 가산점을 받는다. 청년들은 아무리 공부해도 소용이 없다" 라는 내용을 담은 스티커가 붙기 시작했고, '태극기 집회'의 참가자들이 그러한 내용을 담은 가짜 뉴스를 살포하기도 했다.

나도 태극기 집회 근처를 지나다 한 참가자에게 그 내용을 볼 것을 강권당한 적이 있는데, 거절하자 "머리에 뭐가 들었는지... " 같은 소리를 듣기도 했다. 심지어 한동안 자취를 감추기도 했던, '광수'라 불리는 북한 간첩들이 내려와 광주 시민들을 선동했다는 '5.18 북한 개입설' 이 다시 태극기 집회 내에서 등장하기도 했다. 나는 이것이 단순한 '우연의 일치' 라기보다는 꽤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두환은 한국 현대사에 크나큰 상처들을 입히고, 복잡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박정희가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암살당한 1979년 10.26 사건 이후 권력에는 크나큰 공백이 생겨났는데, 당시 보안사령관이던 그는 약 한 달 반 만에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 그리고 이듬해 5월 17일에는 내각과 행정부 대상의 쿠데타를 일으켜 계엄령을 전국적으로 확대했다(전두환은 이 일련의 쿠데타들도 '어쩔 수 없었다'는 말로 정당화하려 했다).

그리고 전두환과 신군부는 광주로 '화려한 휴가'를 떠났다.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신군부의 권위주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아는 1980년 5.18 광주 민중항쟁에 대한 간단한 이야기이다. 이 사건에서 전두환은 가해자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확실하다.

"나도 피해자다", 전형적인 가해자의 문법

전두환 자서전 서문에서조차 자신은 광주와 관련이 없고, 오히려 자신도 그 피해자라는 내용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그의 "나도 피해자"라는 문법은 마치 박근혜가 했던 것 같은 단순한 '유체이탈' 화법이 아니라 어찌 보면 전형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명백한 '가해자의 문법'이다.

전두환의 그 발언은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첫째로 5.18의 참상이나 원인이 알려지고, 결국 자신이 (그것 때문에) 옥살이를 한 것이 (물론 전두환이 그것만 잘못한 것은 아니지만 꽤 큰 부분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무척이나 억울했다고 느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나도 5.18(폭동에 공수부대 좀 투입했기로서니 잡아 가두고 콩밥까지 먹게 된 것)의 피해자라는 것이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고 다 너희들 때문이야"라는 말은 고소나 고발, 혹은 문제 제기를 당한 가해자가 피해자나 고발자들에게 흔히 사용하는 화법인데, "나는 억울하고 결백하며, 너희가 나를 가해자로 몰아서 나는 피해를 입고 있다" 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는 이와 연관해서, 전두환에게 있어서 자신이 가해자라는 인식 자체가 부재하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치학자인 러스토우(D. A. Rustow) 는 자신이 제 3세계의 민주화 과정에 대해 내놓은 '민주화 이행 모델'에서 민주화, 즉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국민 통합이라는 배경 조건이 형성된 후 '길고 끝없는 정치 투쟁' 이라는 준비 단계의 수행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당시 한국의 시대상을 보자면 1970년대 말엽에는 부산과 마산의 민주항쟁, 동일방직 사건이나 YH 사태 등을 비롯해 민주화 운동의 연쇄가 마치 들불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이를 두고 당시 한국 사회의 다수 구성원들은 박정희의 권위주의 독재체제를 끝내고 민주주의 체제로 나아가고자 한다는 일종의 통합된(혹은 비슷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고, '길고 끝없는 정치 투쟁'을 시작해 진행하고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10.26 사건 이후 생긴 일종의 정치적 공황 상황에서 전두환과 노태우를 위시한 신군부가 권력의 공백을 순식간에 제압해 버렸고, 이듬해에는 내각 쿠데타를 통해 행정부까지 장악해 버렸다. 그리고는 최전방의 병력까지 빼돌려 안보의 공백을 만들어 가면서까지 광주를 철저히 고립시켜 버렸다.

당시 광주 민중에게는 결국 다시 정치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는 선택밖에 남지 않았는데, 계엄군은 그러한 정치 투쟁의 시도를 힘으로 눌러버렸고, '광주'라는 도시이자 동시에 정치 공동체를 박살 내 버렸다. 군대가 자국민에게 총을 쏘고 몽둥이를 휘두르는 것을 넘어 학살극을 벌였고, 그 결과 아직도 "광주에는 오월에 제사 안 지내는 집이 없다" 는 말(그리고 현실)이 나오는 배경을 만들게 된 것이다.

민주화를 가로막은 전두환의 쿠데타

권위주의나 전체주의를 비롯한 비민주적 독재체제가 종식되고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는 필연적으로 기존 체제에 복무하고 그 도구로 사용된 군부의 영향을 어떻게 해소하고 병영으로 돌려보내, 민간-군부 간 관계에서의 전문성을 형성해 나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에서는 약 18년간 박정희 군부독재 체제에서 그 도구로 사용되어 정치 세력이 되어버린 군대를 병영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다. 만일 그러한 이행 과정에서 군부가 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서면 자신들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통제가 시작될 것을 예측하고 민주주의와 민주주의 선거를 통한 권력 형성을 타겟으로 삼아 일으키는 쿠데타를 '이행 쿠데타(Transition Coup D'etat)'라고 부른다.

박정희 사후 민주주의가 즉각 시행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12.12쿠데타를 완벽한 이행 쿠데타라고는 볼 수 없겠지만, 박정희 사후의 권력 공백의 장악뿐 아니라, 민주주의로의 이행 이후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군부의 약화를 우려, 그것을 저지하려 했다는 성격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5.18은 쿠데타의 정치·경제적 연장선

그리고 12.12뿐 아니라 5.17 내각 쿠데타와 5.18, 이른바 '광주 사태'는 12.12쿠데타의 연장선이라고도 볼 수 있다. 먼저 5.17은 계엄령의 전국적인 확대가 목적이었고, 그다음 날부터 시작된 일련의 '광주 사태'는 전두환이 "내가 이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메시지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이른바 '시범타' 라는 것이다.

게다가 광주와 호남 지역은 한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김대중의 정치적 고향이기도 했다. 물론 당시 전두환 본인과 신군부는 박정희 체제를 위협했고, 자신에게도 적이 될 게 뻔한 '빨갱이' 세력의 근원지를 접수하고 '민주화'한다는 어마어마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광주의 시민들이 시민군을 조직하고, 무기를 소지하고, 공동체를 만들었으니 '폭동'으로 보였을 것이고, 그 폭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사람 좀 때리고 총 좀 쏘고 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문법에서 말이다. "광주는 총을 들고 일어난 하나의 폭동이야. 그러니 진압하지 않을 수 없잖아?" 라는 유명한 말이 그러한 인식을 잘 보여준다.

게다가 5.18의 기반에는 박정희 정권부터 일어난 지역 차별과 호남에는 마땅한 공업이나 산업 기반이 발달하지 못했다는 등의 복잡한 정치경제적 문제들 또한 깔려 있다. 박정희 개발독재 시기인 1970년대 초중반부터 국가 차원의 중화학공업이 육성되고 있었던 영남이나, 인구가 많고 정치적 타격이 극심할 수밖에 없는 수도권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었던 '폭동'이고 그 '진압'이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못 사는 지역 사람들을 빨갱이들이 선동해서 폭동을 일으켰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진압할 수밖에 없었다" 라는 주장을 이야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인데, 이 역시 전형적인 가해자의 문법이다.

전두환은 별로 다른 상황을 생각하지도 않았고, 애초에 광주를 권력의 공고화를 위한 이른바 '첫빠따'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광주와 호남 지역은 김대중 때문에 박정희 시절부터 눈엣가시 같은 지역이기도 했거니와, 공격을 가해도 경제적으로 산업이나 개발 측면에서 별반 큰 리스크도 생기지 않으니 (원래라면 생기지 않았을) '폭동'이 일어난, '진압'의 대상이 된 것이다.

자신을 끊임없이 정당화하는 '가해자' 전두환

1980년 광주 민중항쟁은 이토록 정치·경제적 맥락이 얽혀있는, 복잡한 배경을 가진 사건이었다. 그런데 전두환은 자신이 자국민을 대상으로 한 학살과 내란의 가해자라는 사실을 지워버렸고, 그것은 '폭동'을 '진압'하는 행위였다고, 정당화했다. 자신은 옳은 일을 했을 뿐인데 억울하게 지탄을 받은 피해자라는 말도 함께 했다. 전두환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이 자국민을 학살했다고 인정하는 순간, 자신의 모든 정체성과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이 내파(implosion) 되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위에서 이야기한 대로 자신이 그 '폭동 진압'에 수도방위사령부 병력을 좀 빼돌리고(당시 그것을 지시한 것은 노태우였지만 결국 전두환과 신군부의 책임으로 수렴한다) 공수부대를 좀 투입했기로서니 자신이 내란죄 혐의로 구속까지 당하고 수십 년 째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는 것이 무척 억울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 또한 그 피해자라는(우리 입장에서는 한없이 어처구니 없고 화나는)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이고 말이다.

5.18이 북한에 의해 일어났고, 그 폭력의 가담자들이 '유공자'가 되어 가산점을 무려 10%나 받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그러한 내용의 (심지어 잘 떨어지지도 않는) 스티커를 곳곳에 붙이고 다니는 태극기 집회의 참가자들도 아마 비슷한 상황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국가와 독재자들을 뼛속 깊이 내면화하고 있는 그들로서는 광주와 5.18이 전두환의 주장대로 존재해야만 자신들이 스스로 정당성을 얻을 수 있고, 자신들의 세계가 무너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광주가 '빨갱이 세력'의 주장대로 민주화 운동이고, 전두환과 국가가 학살을 저지른 것이라는 것은 너무도 인정하기 힘든 사실일 것이다. 빨갱이 세력은 늘 틀려야만 하고, 북한에 나라를 바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기 때문이다.

전두환과 그 지지자들이, 그리고 '태극기' 세력이 자신의 실패와 틀림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문법들은 폭력적이고 옳지 않지만 때로는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받아들여여만 하는 사실도 있는 법이다.

유감스럽게도 전두환의 자서전은 그 자체로도 종이 낭비이고, 거기 들어있는 내용은 안 봐도 하나같이 구차할 것이 너무나 뻔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와 '태극기' 세력의 주장은 그 자체로 5.18 피해자들과 시민사회에 대한 광범위한 2차 가해이고, 한국 민주화운동의 굴곡진 역사를 폄훼하는 행위이다. 무엇보다 광주 항쟁은 폭동이 아니었고, 전두환은 계획적인 내란죄 사범이요, 학살자가 맞다.


태그:#전두환, #자서전, #5.18, #스티커, #피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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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글로 기억하는 정치학도, 사진가. 아나키즘과 인권 문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가장자리(Frontier) 라는 다큐멘터리/르포르타주 사진가 팀의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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