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일생>의 한장면

<여자의 일생>의 한장면 ⓒ 그린나래미디어(주)


헌신은 배신당하고, 애정은 응답받지 못한다. 1883년 기 드 모파상이 발표한 장편소설 <여자의 일생>(Une Vie)의 주인공 잔느 얘기다. 스무 살 무렵부터 쉰 즈음까지 그의 삶은 기구하다는 수식어로도 부족할 정도다. 난생처음 사랑에 빠진 잔느가 남편으로 맞아들인 남자는 부정을 저지르고 하녀를 임신시킨다. 속죄하는 그를 용서하고 그의 아이까지 낳았지만, 오래지 않아 남편은 또다시 유부녀 외간여자와 불륜을 저지른다. 이를 안 상대 여성의 남편은 이들을 총으로 쏴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제 하나 남은 아들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잔느에게도 여전히 행복은 멀기만 하다. 장성한 아들은 도시로 떠나고, 몇 번이나 손을 내밀며 잔느를 생활고에 빠뜨린다.

영화로 재탄생한 <여자의 일생>은 원작의 감성을 스크린 위에 충실히 재현한다. 19세기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 귀족 집안인 잔느(주디스 쳄라 분)와 부모가 함께 살아온 저택까지. 고즈넉하면서도 어딘가 슬픔이 묻어나는 로케이션은 잔느가 겪는 온갖 풍파를 가만히 담아낸다. 여기에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운 1.33:1의 화면비는 프레임을 인물로 가득 채우며 한 사람의 순간순간을 효과적으로 포착한다. 감독 스테판 브리제가 각본가 플로렌스 비뇽과 함께 20여년에 걸쳐 준비해 완성한 이 영화는 객관적이면서도 사색적이고, 영화적이면서도 문학적이다.

 <여자의 일생>의 한장면

<여자의 일생>의 한장면 ⓒ 그린나래미디어(주)


단선적인 시간의 흐름을 조금씩 비튼 영화의 편집은 소설이 주는 감동과는 또 다른 독특한 아우라를 형성한다. 부모와 함께 농장에 물을 주고, 남편 줄리앙(스완 아르라우드 분)과 사랑을 속삭이고, 아들 폴과 즐거운 한 때를 보내는 잔느의 모습은 영화에서 몇 번이나 반복되며 아릿하게 각인된다. 살아 움직이던 현재는 어느새 사그라들어 과거가 되고, 돌연 비집고 들어온 미래에게 그 자리를 내준다. 서사 속에 문득 끼어드는 플래시백(Flashback)과 플래시포워드(Flashback)는 30여년에 달하는 잔느의 일생을 마치 슬라이드 쇼처럼 뭉뚱그린다. 이같은 시간성의 미학은 마찬가지로 소설을 원작으로 한 최근 개봉작 <컨택트>의 그것과도 닮았다.

내내 잔느를 중심에 둔 채 서사를 이끌어 가는 영화 특유의 연출 또한 인상적이다. 핸드 헬드 쇼트와 클로즈업을 과감하게 사용한 카메라는 타인을 배제한 채 줄곧 잔느만을 쫓는다. 남편의 부정을 목격한 잔느가 그를 뿌리치고 절규하며 바닷가를 내달리는 장면은 그 중에서도 일품이다. 프레임 안에서 어둠 속 흐릿한 형체가 되어 강하게 흔들리는 잔느의 모습은 형언할 수 없는 그의 고통 그 자체로 비친다. 이에 반해 잔느의 주변 인물들이 겪는 굵직굵직한 에피소드들은 점프 컷 사이에서 빈 칸으로 남겨져 묘한 대비를 이룬다. 영화는 거대한 사건들을 부각해 시청각적 충격을 자아내는 대신, 그 앞과 뒤에 위치한 잔느의 표정에 방점을 찍는 셈이다.

 <여자의 일생>의 한장면

<여자의 일생>의 한장면 ⓒ 그린나래미디어(주)


"이건 모든 젊은 여성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고 여전히 꽤 모던하다." 주인공 잔느 역을 맡은 배우 주디스 쳄라의 말이다. 덧붙이자면, <여자의 일생>이 그저 여자라서(혹은 여자만) 겪는 삶을 다룬 것도 아니다. 영화는 개인 앞에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행복과 이를 붙잡으려는 덧없는 시도들을 포착한 뒤 기나긴 불행을 응시한다. 이는 극 중 잔느만이 아니라 스스로 삶을 개척할 성인이라면 누구나 감내해야 할 인생의 속성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은 생각만큼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다"라는 마지막 대사는 영화가 해낼 수 있는 최선의 위로일지 모른다. 사람들은 언제나 딱 기대한 만큼 실망할 수 있는 법이니까 말이다. 오는 6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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