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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이 비에 제주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라고 쓰인 백비의 모습
 "언젠가 이 비에 제주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라고 쓰인 백비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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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이 비에 제주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

제주 4.3백비에 쓰인 글이다. 백비란 어떤 까닭이 있어 글을 새기지 못한 비석을 일컫는다. 봉기, 항쟁, 폭동, 사태, 사건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온 제주4.3사건은 아직 올바른 역사적 이름을 얻지 못하고 있다.

제주 4.3사건은 올해로 69주년을 맞았다. 하지만 아직도 4.3사건은 진행형이다. 노무현 정부때 국가가 공식적으로 사과한 이후 두 번의 정권이 바뀌었지만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쟁아닌 평시에 수만명 희생된 제주 4.3사건

제주4.3공원내 행방불명된 희생자들의 묘비 모습
 제주4.3공원내 행방불명된 희생자들의 묘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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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공원내 행방불명된 희생자들의 묘비는 각 지역별로 수감되었으나 돌아오지 못한 묘비가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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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공원내 형무소에 끌려가면서 가족들을 뒤돌아보는 형상의 조형물의 모습
 제주 4.3공원내 형무소에 끌려가면서 가족들을 뒤돌아보는 형상의 조형물의 모습
ⓒ 심명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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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평화공원은 제주4.3사건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독선거. 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4.3 사건의 도화선은 1947년 3.1절 기념대회후 이날 시위행렬이 오후 2시 24분께 관덕정 앞 광장을 지날 때였다. 기마경찰이 탄 말에 어린아이가 치이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후 달아는 경찰을 향해 아이가 돌을 던졌고 경찰은 발포로 응했다. 경찰이 쏜 총에 북초등학교 5학년 허두용군을 비롯하여 6명이 사망하자 제주도민이 들끓기 시작했다. 이후 3.10총파업으로 이어지며 제주도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고 만다. 공무원인 도청부터 시작해 법원, 검찰 등 관공서와 금융기관, 학교 등으로 번져 166개 기관 4만1211명이 파업에 참석해 제주도민 6가지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당시 제주도청 공무원 파업 요구조건은 ▲ 민주경찰 완전 확립을 위해 무장과 고문을 즉각 폐지할 것 ▲ 발포책임자 및 발포경관은 즉시 처벌할 것 ▲ 경찰 수뇌부는 인책 사임할 것 ▲ 희생자 유가족 및 부상자에 대한 생활을 보장할 것 ▲ 3.1사건에 관련한 애국적 인사를 검속치 말 것 ▲ 일본 경찰의 유업적 계승활동을 소통할 것 등이었다.

군경이 이에 응하지 않자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민중들의 무장봉기가 시작된다. 이후 미군정은 강경진압으로 선회해, 군경수뇌부에서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노력하던 김익렬 연대장을 전격해임하고 박진경 중령을 임명하며 제주 초토화 작전이 시작된다. 이로인해 수많은 희생자가 쏟아졌다.

4.3평화공원에는 14,231명의 위패가 모셔진 위패봉안실 모습
 4.3평화공원에는 14,231명의 위패가 모셔진 위패봉안실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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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조사보고서에 의하면 4.3 희생자는 2만5천에서 3만 명으로 보고 있다. 지금까지 신고한 희생자는 1만4천여 명이다. 4.3평화공원에는 1만4231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지만 총살로 암매장되어 시신을 못 찾은 행불자 3천여 명의 위패가 따로 모셔져 있다. 당시 제주인구가 30만 명이었으니 전쟁도 아닌 평시에 1/10의 인구가 희생된 셈이다.

지난 2월 제주 4.3평화 공원을 찾았다. 4.3평화공원은 14만평의 크기다. 이날 제주4.3사건 희생자유족회 송승문 전 사무처장을 만났다. 그는 한손에는 물병을 들었다. 추모 후 비석에다 술대신 물을 따르며 비석을 촉촉히 적셨다. 공원에 형무소에 끌려가면서 가족들을 뒤돌아보는 형상의 조형물이 눈에 띄었다. 비석에는 까마귀 똥이 온통 하였게 깔렸다.

송 처장은 "작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친척 등 6명이 희생되어 아직 시신도 찾지 못했다"면서 "비석의 높이는 제가 제안했는데 4.3을 기억하자는 의미로 높이가 43cm의 크기다"라고 일러줬다. 아래는 그와 나눈 인터뷰다.

4.3때 수장된 희생자 대마도에도 모셔져...

제주도4.3사건희생자유족회 송승문 전 사무처장은 한손에는 물병을 들고 가족 묘비를 찾았다.
 제주도4.3사건희생자유족회 송승문 전 사무처장은 한손에는 물병을 들고 가족 묘비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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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후 물대신 술을 뿌리고 있는 송승문 전 사무처장의 모습
 추모후 물대신 술을 뿌리고 있는 송승문 전 사무처장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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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이 겪은 4.3사건에 대해 얘기해 달라.
"우리 어머니도 살아계시는데 4.3을 말하면 말을 꺼내지 못하게 한다. 너무나 잔인한 광경을 겪었다. 군정에서 인간으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임신한 어머니가 저를 유산시키려고 시도를 했는데 떨어지지 않아 정상적인 분만도 하지 않고 주정공장에서 거꾸로 낳았다. 육지형무소로 끌려간 아버지를 비롯해 우리 집안 6명이 희생되어 아직 시신도 못 찾았다."

- 희생자들이 대마도까지 떠내려갔다고 들었다.
"바다에 수장된 시신이 대마도까지 갔다. 이는 제주대 해양대학에서 MBC와 함께 과연 조류가 대마도로 가느냐 실험했는데 대마도까지 닿더라. 또 삼다수 물병이 대마도에 엄청 많이 밀려있다. 대마도에는 희생자 32명이 화장되어 절간에 모셔져 있다. 당시 포승줄에 묶인 분들이 일본에서 못 보던 제주에서 감물을 들여 만든 옷을 입고 있어 희생자로 추측하고 있다."

- 이곳에 추모하러 올 때 왜 물병을 가져오나.
"4.3재단 관계자분이 자기네 집안 분이 4.3사건으로 형무소에서 돌아가셨는데 살아계실 때 물을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고 들었다. 당시 교도소에서 물도 안 줘 많은 고통을 당했다. 그래서 그 분이 지금도 출근하면 물을 가지고 와서 여기에 들러서 분향한 후 물을 드리고 사무실에 온다. 저도 그 이후 물을 가지고 온다."

- 정치인들이 4.3사건에 대해 관심을 가지나?
"사실 4.3 행방불명 희생자가 모셔진 추모공원인 이곳을 봐야 실감이 난다. 하지만 대통령 후보든 국회의원 후보든 분향만 하고 가버린다. 시간이 없다고. 그래서 항상 유족회장한테도 얘기를 하지만 아픈 역사를 기억하려면 그분들이 추모비가 있는 이곳을 봐야한다."

- 4.3사건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시각은 어떠한가?
"4.3사건을 아픈 역사라고 하는데 일부 보수단체는 아직도 4.3사건이 북한의 지령을 받아 제주도를 공산화시키기 위한 계획적인 일 아니냐고 본다. 5.18은 오로지 민주화를 부르짖었기 때문에 큰소리친다. 하지만 일부 보수단체들이 4.3사건에 빨갱이라고 멍에를 씌우는 근거 없는 이런 주장 때문에 우리가 힘이 없다. 일부 남로당 핵심간부들이 연관이 되어 있지만 그것은 극소수다. 희생자 중 열 살 미만이 몇 백 명이다. 그분들도 빨갱이냐? 같이 싸잡아서는 안 된다. 특히 남로당 핵심간부는 희생자로 결정이 안 됐다. 그 분들은 죄가 있기 때문에 희생자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원희룡 도지사의 말뿐인 협치 필요 없다"

제주4.3사건 추모비
 제주4.3사건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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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별로 희생자가 모셔져 있다.
"제주도는 형무소가 없기 때문에 일렬로 세워놓고 마구잡이로 즉결심판이 진행되었다. 즉결심판 1차에 이어 2차로 이어지며 제주에서 사형집행이 됐다. 또 무기징역을 받은 이들은 서대문 마포형무소, 대전형무소 등 전국에 수감됐다. 형을 받은 이들은 육지형무소로 보내졌다. 특히 형무소에 있던 이들 중 이승만이 정권을 잡기 위한 자행한 예비검속자 즉 보도연맹사건으로 총살당한 사람들이 많다. 6.25사건이 터지며 폭도로 몰린 사람들을 다 죽이라고 한 것이다."

- 원희룡 도지사는 4.3사건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다고 보나?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 사람은 대권에 출마하기 위해 여기 왔다고 생각하는데 이제 대권 출마를 포기했다. 통 정치에 관심이 있지 행정에는 관심이 없다. 4년 동안 말로는 협치를 주장하지만 노인네는 협치를 모른다. 노인은 피부에 닿고 눈으로 봐야만 만족한다. DNA검사나 유해발굴, 1세대 5만원 수당 인상한달지, 의료보험혜택 5500원 지원하는데 천원을 올려주겠다든지 해야 하는데 말로만 협치를 할 뿐이다."

제주4.3평화기념관 모습
 제주4.3평화기념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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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민들이 특정후보를 지지를 않는 것 같다.
"제주도는 많은 핍박을 받아왔기 때문에 한 사람을 지정하지는 않는다. 만약 지정하면 자기가 매장되고 왕따 당하니 맘은 이미 결정을 했지만 밖으로 표현을 하지 않는다. 4.3사건은 전쟁으로 발생된 사건이 아니기 때문에 새 정부는 시신발굴을 하여 가족 품에 돌려줘야한다."

- 유족으로서 바람이 있다면?
"노무현 정부 때 공식 사과를 했지만 이후 이명박 대통령은 외면하고 박근혜 대통령 역시 한 번도 찾지 않았다. 가족의 신고로 위패가 모셔진 분만이 자료관에 전시가 되어 있다. 어느 정부가 들어서건 대통령이 공식사과를 했으면 다음 정부도 이행의무가 있는 것 아닌가? 보수대통령이 나오든 진보가 나오든 개의치 않는다. 임기 내 한 번쯤은 공식적으로 와야하지 않겠나. 박 대통령이 임기 내 오겠다고 했지만 한번도 오지 않았다. 그나마 추념일로 지정해 반갑지만 아직 배보상도 안됐다. 새정부가 들어서면 4.3사건을 외면 말아달라. 우선 유해발굴부터 빨리 해야 한다. 제주도에서 유해발굴을 시작해야 한다. 현재 모셔진 210여명에 대해 DNA검사를 못하고 방치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여수넷통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제주4.3사건 , #송승문, #백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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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하고 싶은 일을 남에게 말해도 좋다. 단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라!" 어릴적 몰래 본 형님의 일기장, 늘 그맘 변치않고 살렵니다. <3월 뉴스게릴라상> <아버지 우수상> <2012 총선.대선 특별취재팀> <찜!e시민기자> <2월 22일상> <세월호 보도 - 6.4지방선거 보도 특별상> 거북선 보도 <특종상> 명예의 전당 으뜸상 ☞「납북어부의 아들」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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