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은 2013. 9. 30.경 대통령 주재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피고인 김기춘 비서실장과 수석비서관들에게 '국정지표가 문화융성인데 좌편향 문화예술계에 문제가 많다, 특히 롯데와 CJ 등 투자자가 협조를 하지 않아 문제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였다."

"피고인 김기춘 비서실장은 2013. 12. 18.경 실수비에서 수석비서관들에게 '반국가적·반체제적 단체에 대한 영향력 없는 대책이 문제이다, 한편에는 지원을 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제재를 하고 있다, 문화계 권력을 좌파가 잡고 있다, 변호인과 천안함 프로젝트가 그렇다, 교육계 원로들이 울분을 토하더라, 하나하나 잡아 나가자, 모두 함께 고민하고 분발하라'고 지시하였다."

지난 2월, 박영수 특검이 문화계 블랙리스트 관련 김기춘 전 비서실장 외 3명을 기소한 공소장 중 일부다. 김기춘 전 실장과 조윤선 전 문체부 장관은 현재 구속, 수감돼 재판을 받고 있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는 박근혜 정권의 함몰된 도덕성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역사에 남을 전망이다.

그렇게, 우리는 지난 5년간 CJ엔터테인먼트와 롯데엔터테인먼트가 '좌 편향' 회사라고 인식한 정권 아래에서 살아왔다.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문화계 권력을 좌파가 잡고 있다"고 했고, 영화 <변호인>과 다큐멘터리 <천안함 프로젝트>를 대표적인 사례로 꼽았다. 한편에선 <연평해전>과 <국제시장> <인천상륙작전>과 같은 상업영화가 흥행에 성공했다.

"하나하나 잡아 나가자"라며 정권 차원의 관심(?)을 받았던 독립영화계는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대중영화 역시 '사회파' 영화이거나 소재가 논쟁적인 작품들은 투자 차원에서 음으로 양으로 배제되며 제작의 어려움을 겪어 왔다. 영화계가 어떻게든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시대였다.

그리고 2017년, 작년 연말 탄핵 정국을 거쳐 박 전 대통령이 구속됐다. 앞서 구속된 공범들이 재판을 받고 있다. 우선 영화인들은 블랙리스트 관련자들을 고소·고발했다. 뒤이어 김세훈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 사퇴와 위원회 개혁, <다이빙벨> 상영 논란으로 촉발된 부산국제영화제 사태 해결과 이용관 전 집행위원장 명예 회복, 모태펀드 투자 의혹 등 '박근혜 정권'이 남긴 적폐들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의 반영일까. 영화계에 일련의 실화 소재 영화들과 과거로 시계를 돌린 작품들이 속속 제작·개봉 소식을 알리고 있다. 편수도 편수거니와 제작진과 출연진의 중량감이 만만치 않다. 정치 소재나 이른바 사회파 영화들도 적지 않다. 대한민국 국민이 온몸으로 겪어 내는 '탄핵 정국'과 '촛불집회', 그리고 '조기 대선'이란 '정치의 계절'을 반영하는 흐름이라 봐도 무방할까.

<1987>은 고 박종철, <택시운전사>는 80년 오월 광주 

 영화 <택시운전사>의 스틸 이미지. 기대작으로 주목받고 있다.

영화 <택시운전사>의 스틸 이미지. 기대작으로 주목받고 있다. ⓒ 쇼박스


"대한민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가장 뜨거웠던 1987년의 6월 민주항쟁을 배경으로 평범하지만 진실을 향해 나아갔던 국민들의 모습을 그리겠다."

<지구를 지켜라> <화이>의 장준환 감독이 돌아온다. 4월 크랭크인을 알린 <1987>(가제)을 통해서다. 캐스팅이 만만치 않다. 김윤석, 하정우, 유해진, 박희순, 이희준, 설경구, 강동원, 여진구, 김태리가 출연한다. 공안경찰 박 처장과 조 반장은 김윤석과 박희순이, 부당한 사건 처리 과정을 의심하는 부장검사 역할은 하정우가, 사건의 실체를 파헤치는 기자는 이희준이 연기한다.

여기에 설경구가 민주화 운동의 핵심인물인 재야인사로, 유해진이 그들을 도와주는 교도관으로, 민주화 운동에 휘말리는 대학생들로는 강동원과 김태리가, 고 박종철 역할에 여진구가 캐스팅됐다. 이 중 강동원과 설경구, 여진구는 특별출연으로 알려졌다.

각본은 <카트>의 김경찬 작가가 집필했고, 투자/배급은 CJ 엔터테인먼트가 맡았다. 제작진은 <1987>을 "1987년 민주화 항쟁의 기폭제가 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둘러싸고 진실을 은폐하려는 세력과 목숨을 걸고 진실을 알리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로 소개했다.

1980년대를 그린 영화 한 편은 이미 개봉 중이고, 또 한 편은 올여름 개봉을 확정했다. 손현주, 장혁 주연의 <보통사람>은 지난달 23일 개봉해 2일까지 33만 관객을 동원했다. 역시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강력계 형사 성진(손현주)을 중심으로 안기부 실장 역의 장혁, 기자 역의 김상호가 연기한 인물들이 연쇄 살인사건에 휘말리게 되면서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이야기를 담았다.

<의형제> <고지전>의 장훈 감독이 연출하고 송강호가 주연을 맡은 <택시운전사>는 1980년 광주의 한복판으로 관객들을 초대한다. 송강호와 함께 유해진, 류준열, 그리고 <피아니스트> 등으로 국내 관객들에게도 얼굴을 알린 토마스 크레취만이 출연하고, 배급은 쇼박스가 맡았다.

<택시 운전사>는 독일 기자 피터(토마스 크레취만 분)를 태우고 우연히 광주로 향하는 택시운전사 만섭(송강호 분)이 겪는 '80년 5월 광주' 이야기다. '푸른 눈의 목격자'로 유명한 독일 공영방송 기자였던 고 위르겐 힌츠패터와 택시 기자 김사복씨의 실화를 영화화했다.

실화, 역사, 정치사회 소재 영화들이 쏟아진다

 영화 <군함도>의 런칭 포스터. 일제 강점기의 아픔을 다뤘다.

영화 <군함도>의 런칭 포스터. 일제 강점기의 아픔을 다뤘다. ⓒ CJ엔터테인먼트


1980년대만 부각되는 건 아니다. <택시 운전사>와 함께 올여름 기대작으로 손꼽히는 류승완 감독의 <군함도>도 역시 실화 소재 영화의 범주로 분류된다. <군함도>는 일제 강점기, 일본 군함도(하시마 섬)에 강제 징용됐다가 목숨을 걸고 탈출을 시도하는 조선인 이야기를 그린 대작으로, 황정민, 송중기, 소지섭, 이정현 등이 출연한다.

지난해 <동주>를 선보였던 이준익 감독은 다시 한번 일제강점기를 다룬다. 지난 2월 크랭크업한 <박열>은 일제강점기 당시 무정부주의 단체 '흑도회'를 조직했고, 일본 왕세자 히로히토 폭사를 계획했던 박열의 삶을 그린 작품으로 이제훈이 타이틀 롤을 맡았다. 이밖에 최희서, 김인우, 권율, 민진웅 등이 출연하는 <박열>은 연내 개봉을 준비 중이다.

실화와 시대극만 있는 건 아니다. 최민식이 3선에 도전하는 서울시장을 연기하는 <특별시민>은 오는 26일 개봉을 확정했다. 본격적으로 선거전을 다룬 정치영화로 알려졌다. <모비딕>의 박인제 감독이 연출을 맡고, 곽도원, 라미란, 심은경, 문소리 등 연기파 배우들이 출연한다.

작년 12월 갑작스레 유명을 달리한 고 홍기선 감독의 유작 <일급비밀> 역시 사회파 드라마로 올 상반기 내 개봉을 타진 중이다. 1급 군사기밀에 얽힌 군 내부비리 사건을 파헤치는 이야기로, 국방부 항공부품구매과로 발령이 나면서 사건에 휘말리는 군인 역을 김상경이, 군 내부비리를 추적하는 방송국 기자 역을 김옥빈이 연기했다.

지난 2월 개봉한 <재심>은 250만 관객을 동원하며 2017년 실화영화의 첫 포문을 성공적으로 열었다. 앞서 언급한 작품들 외에도 정치 사회적 배경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들이 속속 촬영을 준비 중이다. <내부자들> 우상호 감독의 <마약왕>이나 원신연 감독의 <제5열>, <변호인> 양우석 감독의 <강철비> 역시 이 범주에 들 수 있는 작품이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부터 광주민주화항쟁, 일제 강점기 시대극, 군 내부비리 사건, 서울시장 선거와 실제 재심 사건 등등. 한국영화에 묵직한 이슈들을 다른 대중영화들이 쏟아지는 작금의 현상은 비단 '박근혜 정권'이 낳은 억눌린 시대상의 반대급부로만 해석할 순 없을 것이다. 더욱이 실제 사건이나 역사와의 접점을 효과적으로 그려내야 한다는 영화적인 부담이나 중량감 있는 작품들을 훨씬 더 자주 마주해야 하는 관객의 피로도도 감안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일련의 경향이 한국영화의 소재나 장르의 확장에 기여할 것이란 사실이다. 또 새로운 정권 아래에서 극장에 선보이게 되는 이러한 작품들이 흥행 성적이 향후 영화계의 큰 흐름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2017년, 영화계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1987 택시운전사 보통사람 군함도 특별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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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오마이뉴스 23년차 직원. 시민기자들과 일 벌이는 걸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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