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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에서 한 달 가까운 시간을 보냈다. 정확히는 스물아홉 날. 그 중 닷새를 제외하고 계속 하노이의 최대 번화가인 호안끼엠에 있었다. 대만 한 달, 중국 한 달에 이은 여정. 베트남에 도착한 즈음 여독이 짙어져 심신이 상당 피로했다. 그 탓에 먹고 자고 숙소 주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일정을 반복했다.

당시에 적은 기록들이 그때의 내 상태를 잘 보여주는 듯하다.

'오래 걸어 발가락에 물집이 잡힌 것처럼…… 지금 내 사고 혹은 감정 안에도 기포 같은 공백이 있다. 정확히 어디쯤에서 왜 생겼는지, 언제 가라앉을 지 모를. 다만 물음표일 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의문들이 떠올랐다가 그 채로…… 물집처럼 자리잡고…… 억지로 터뜨리지 않고 가만 두기로.'

'그런 적 있는지. 모두가 신나서 떠드는 가운데, 혼자만 전혀 그럴 기분도 의지도 없을 때.'

이런 상태라면 여행을 멈춰야 하지 않을까, 스스로 몇 번이나 물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마저도 귀찮고 정말 여행을 끝내고 싶은 지도 확신이 안 섰다. 우습게도 그 극도의 무기력 덕분에 국적이 다른 여행자 둘과 친해졌다. 우리는 모두 비슷한 그로기 상태로, 그 역시 여행의 한 과정임을 서로 확인하며 위안 받았다.

여전히 눈에 선한 호안끼엠 호수 전경
 여전히 눈에 선한 호안끼엠 호수 전경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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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처럼 지친 여행자가 머물기에 하노이의 호안끼엠은 꽤나 적절한 장소 같았다. 그곳에서 '베트남다움'을 찾기란 어려웠으니까. 그곳은 그 나라 대다수 사람들이 사는 모습과는 아주 다른, 그보다 훨씬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나라에서 온 외국인들의 입맛에 맞춰진 장소였다. 한국의 여느 번화가와도 비슷한.

버스를 타고 10여 분만 나가도, 아니 호안끼엠 안에서도 좁은 골목 안쪽이나 숙소와 술집, 밥집 등이 밀집한 호안끼엠 호숫가 주변을 벗어나면 그곳 삶의 속살을 볼 수 있었다. 내가 10살이 되기 전, 그러니까 80년대 시골 같은. 하지만 자연과 단절된 채 인위적인 것들을 끊임 없이 소비하는 도시의 특성상 훨씬 난잡하고 비루한.

하노이를 벗어난 건 사파에 갔던 딱 닷새인데, 사파는 해발 3천 미터가 훌쩍 넘는 고산과 그 대자연 가운데 사람들이 개미처럼 일군 계단식 논의 풍경이 이색적이고도 경이로운 곳. 하지만 그곳에도 불어닥친 개발 광풍, 익숙한 쾌락을 좇는 관광객, 그들이 주는 '돈맛'을 알아버린 주민들은 급속도로 전통과 자연을 등지고 있었다. (관련 기사 : '베트남 사파, 안개가 길을 열었다')

사파에도 불어닥친 개발 광풍
 사파에도 불어닥친 개발 광풍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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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러한 단절, 파괴의 모습은 여행 내내 목격했는데 그때마다 안타까움과 좌절감을 느꼈다. 한 경주를 예로 들면, 모두가 먼저 빨리 달려야 이기는 줄 알고 있지만 실은 모두가 같이 가야 이긴다는 규칙을 나만이 아는 듯한. 하지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현실. 그렇게 거머쥔 조악한 메달 격인 현대화된 도시는 지친 여행자에게 그저 익숙한 도구일 뿐 감동은 없다.

좀 다른 얘기인데 나는 이번 여행 중에 '마흔'이란 나이와 만났다. 무척 낯설고, 동시에 무언가 달라진 것도 같은. 그리고 하노이에서의 생활처럼, 나에 대해 아무런 정의가 서질 않았다. 누군가 혹은 무엇으로부터의 공감, 조언이 목말랐는데 마침 무라카미 하루키의 <먼 북소리>란 책을 찾았다. 나는 여행 중 거의 매번, 그때의 나를 이끄는 책과 만난다.

'아무리 멀리 가도 소용없어, 붕붕붕붕. (중략) 당신은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마흔을 맞이하게 될 거야. 그리고 그렇게 나이만 먹어갈 거야. 아무도 당신을 좋아하지 않을 테고, 그건 날이 가면 갈수록 더 심해질 거야. 아니, 그렇지 않아! 하고 나는 말한다. (중략) 사라지는 것은 너희들이야.' 

하루키 같은 이도 마흔이란 나이는, 아마도 쉰, 예순, 일흔……, 그 사이사이 예기치 못한 삶의 고비고비마다 이렇듯 자기 불안과 의무감, 막연함 같은 감정을 느꼈구나 하는 안도감.

'마흔 살이라는 나이는 우리의 인생살이에서 꽤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인생의 고비가 아닐까 하고, 나는 오래전부터(라고는 해도 서른 살이 지난 후부터이지만) 줄곧 생각해 왔다. (중략) 내가 두려웠던 것은 어느 한 시기에 달성해야 할 무엇인가를 달성하지 않은 채로 세월을 헛되이 보내는 것이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러한 버거운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스스로를 일으켜 가고자 하는 길을 꿋꿋이, 지금보다 훨씬 더 열심히 나아가야 한다는 사명감. 기회는 한 번 뿐이란 보다 명확해진 자각.

깔끔하기 그지 없는 현대식 게스트하우스 바로 옆에 현지민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이러한 푸세식 화장실이 있는데 그 주변으로 늘 쥐가 다녔다.
 깔끔하기 그지 없는 현대식 게스트하우스 바로 옆에 현지민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이러한 푸세식 화장실이 있는데 그 주변으로 늘 쥐가 다녔다.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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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에서의 스물아홉 날 중 실제로 '베트남을 여행한' 시간은 현지인인 호아(Hoa)의 집에서 카우치서핑을 한 나흘과 그리고 사파를 여행한 닷새라 할 수 있겠다. 나머지 스무 날은 익숙한 편의를 누리며 흐릿한 내 안을 들여다보고 혹은 헤매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지난 11월 9일에 시작한 여행을 85일 만인 1월 29일에 끝냈다.

아직 환한 오후, 마지막으로 호안끼엠 호숫가를 산책하던 날. 한참을 걷다 어느 벤취에 누워 생각했다. '이 여행 전보다 나는 나를 더 사랑하게 되었나?' 대답이 나오질 않았다. 그렇게 몇 시간이 더 흘러 평상시보다 조금 깊숙한 골목 어느매서 어둠을 맞이했다. 이제 숙소에 맡겨둔 짐을 찾아 공항으로 가야 할 시간. 그때 문득 앞서 하지 못한 대답이 새어나왔다.

'내 나라, 나 사는 곳의 소음과 냄새와 풍경이 그립다. 이 여행을 시작하며 거리를 두고 바라보고 싶던 내 자신은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말 같지만 나는 나로서 몽땅 옮겨왔고, 어디에 있건 똑같은 나다. 외로워서 몸부림치던 일상을 보다 잘 견디며, 지금 '해야지' 생각하는 일들을 즐겁게 꿋꿋하게 해낼 수 있을 지……. 여행을 시작할 때처럼 걱정과 설렘 사이에서.' 

관광객을 위한 도시 '하노이 올드쿼터'
 관광객을 위한 도시 '하노이 올드쿼터'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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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여행은 결국 나의 일상에서 누군가의 일상을 오가는 여정.
고로 내 일상에선 멀고 낯선 곳을 여행하듯 천진하고 호기심어리게,
어딘가 멀고 낯선 곳을 여행할 땐 나와 내 삶을 아끼듯 그렇게.

지난 2016년 11월 9일부터 세 달간의 대만-중국-베트남 여행 이야기입니다.
facebook /travelforall.Myoungj



태그:#하노이, #베트남여행, #먼북소리, #무라카미하루키, #마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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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니 삶은 정말 여행과 같네요. 신비롭고 멋진 고양이 친구와 세 계절에 걸쳐 여행을 하고 지금은 다시 일상에서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닷가 작은 집을 얻어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멋진 '영감'과 여행자들을 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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