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최고의 중국영화 한 편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패왕별희>라고 말할 수 있다. 중국 고대사와 현당대사를 훑으며, 중국적인 전통 예술 장르인 '경극'을 소재로 정치와 예술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현실과 예술의 경계를 오갔던 장궈룽(장국영·張國榮, 1956~2003)의 비극적 삶이 영화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묘한 끌림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영화 <패왕별희>의 주인공 청뎨이와 그 역을 연기한 장궈룽은 공통점이 많다. 남성으로 여성을 연기하다 자신의 성 정체성에 혼란을 겪고, 무대와 스크린 밖 현실 세계에서도 동성애자가 되었다는 점, 예술에 대한 불같은 열정,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는 점이 그렇다. 그래서 영화 <패왕별희>를 볼 때면 장궈룽의 연기와 그의 삶이 어쩔 수 없이 하나로 오버랩 된다.

세계사에 남을 명작, 패왕별희

중국영화 최고의 명작, 패왕별희 영화의 처음과 끝은 1977년, 문혁 이후 다시 만난 두 사람의 공연 장면이다.

▲ 중국영화 최고의 명작, 패왕별희 영화의 처음과 끝은 1977년, 문혁 이후 다시 만난 두 사람의 공연 장면이다. ⓒ 탕천(湯臣)영화사


영화 속 주인공 청뎨이, 그를 연기한 장궈룽 영화 <패왕별희>를 볼 때면 장궈룽의 연기와 그의 삶이 어쩔 수 없이 하나로 오버랩 된다.

▲ 영화 속 주인공 청뎨이, 그를 연기한 장궈룽 영화 <패왕별희>를 볼 때면 장궈룽의 연기와 그의 삶이 어쩔 수 없이 하나로 오버랩 된다. ⓒ 탕천(湯臣)영화사


최근 불거진 문화계 블랙리스트는 문화예술이 권력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를 돌아보게 한다. 영화 <패왕별희>는 군벌 시기 지주, 국민당, 일본 제국주의, 공산당으로 권력이 이동하는 동안 예술이 어떻게 자리매김 되고, 예술인의 삶은 어떻게 달라져 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리비화(李碧華)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천카이거(陳凱歌) 감독의 1993년 작품인 영화 <패왕별희>는 칸 영화제 대상에 빛나는, 볼 때마다 새로운 메타포를 던져주는 중국 영화사 아니 세계 영화사 명화의 반열에 우뚝 선, 명작 중의 명작이라 칭할 만하다. 

어린 청뎨이를 경극단에 맡기는 엄마 연홍 버림 받은 아이의 상처를 가진 청뎨이는 자신을 챙겨주는 샤오러우에 빠르게 마음을 뺏기고 평생 그를 사랑하게 된다.

▲ 어린 청뎨이를 경극단에 맡기는 엄마 연홍 버림 받은 아이의 상처를 가진 청뎨이는 자신을 챙겨주는 샤오러우에 빠르게 마음을 뺏기고 평생 그를 사랑하게 된다. ⓒ 탕천(湯臣)영화사


묘한 삼각관계 뎨이가 사랑하는 샤오러우는 유곽에서 쥐센을 만나 결혼을 약속하며, 세 사람의 묘한 갈등과 애증이 영화 내내 계속된다.

▲ 묘한 삼각관계 뎨이가 사랑하는 샤오러우는 유곽에서 쥐센을 만나 결혼을 약속하며, 세 사람의 묘한 갈등과 애증이 영화 내내 계속된다. ⓒ 탕천(湯臣)영화사


영화는 장궈룽이 주연을 맡은 경극 배우 청뎨이(程蝶衣)의 예술인생 일대기다. 1924년 군벌 시기, 창녀인 어머니는 아들이 자라 더는 사창가에서 키울 수 없게 되자, 육손이의 엄지손가락 옆 작은 손가락을 자르고 경극단에 아들을 맡긴다. 여자 배역인 단(旦)을 맡기 위한 일종의 거세로 볼 수 있으며, 그가 이름을 날리는 작품이 거세의 아픔을 겪은 사마천의 <사기> '항우본기'를 소재로 한 '패왕별희'라는 점도 흥미롭다.

청뎨이는 고된 훈련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갔다가 경극 배우에 환호하는 관객과 공연장에서 멋진 연기를 하는 배우를 보고, 제 발로 경극원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사람은 자신의 운명에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관사부의 가르침과 항우와의 사랑을 위해 죽음으로 절개를 지키는 우희 역에 심취해 점점 경극의 세계에 깊숙이 빠져든다.

청뎨이는 결국 남녀와 현실과 예술의 구분을 잊고, 예술과 경극의 가치를 국가, 민족, 이념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며, 자신을 지켜주는 현실 속 사형이자, 우희를 사랑하는 경극 속 패왕인 돤샤오러우(段小樓)를 현실과 경극 무대에서 동시에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과 해방 후 국민당, 공산당의 집권은 경극과 배우들의 새로운 위상과 역할을 요구한다. 뎨이와 달리 샤오러우가 경극보다 현실의 삶에 더 중요한 가치를 두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한다. 샤오러우가 화만루(花滿樓) 유곽에서 만난 쥐센(菊仙)과 결혼하던 날, 뎨이는 자신의 후원자 위안쓰예(袁四爺)의 동성애 파트너가 된다. 샤오러우는 자본과 권력의 노리개가 된 경극을 다시 돌이키려 하지만, 이미 세상은 달라졌다. 문화대혁명의 광풍 속에서 낡은 전통으로 치부되는 경극은 타도의 대상이 되고, 두 사람의 운명 또한 비극적 종말을 향할 수밖에 없다.

# 역사

경극은 타도의 대상 문화대혁명 시기 낡은 가치로 치부되는 경극, 경극배우는 타도의 대상으로 인민재판을 받는다.

▲ 경극은 타도의 대상 문화대혁명 시기 낡은 가치로 치부되는 경극, 경극배우는 타도의 대상으로 인민재판을 받는다. ⓒ 탕천(湯臣)영화사


영화는 군벌 시기인 1924년부터 1977년 문화대혁명이 완료되는 시점까지의 중국 현당대사의 소용돌이를 관통한다. 동시에 경극 '패왕별희'를 통해 진말 항우와 유방의 최후 일전을 품고 있다.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면, 예술은 그 역사의 아름다운 패자를 위한 진혼곡이다. 영화 <패왕별희>는 중국 현당대사의 격동 속에서 '경극 배우'라는 예술가로 대변되는, 힘없는 민중의 삶을 진솔하게 드러낸다.

영화는 주인공 뎨이처럼 예술에 몰입해 자신의 모든 것을 그 예술에 던져도, 샤오러우처럼 예술에서 한 발 빠져나와 현실과 손을 잡아도 결과는 모두 막다른 골목이고, 결국 '죽음'뿐인 선택지의 시대, 그 모순된 현실과 역사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다.

# 경극

경극의 위상은 최고에서 최악으로 곤두박질친다. 전통의 함의를 담고 있는 경극은 권력의 입맛에 따라 위상이 높았다, 낮았다 널을 뛴다.

▲ 경극의 위상은 최고에서 최악으로 곤두박질친다. 전통의 함의를 담고 있는 경극은 권력의 입맛에 따라 위상이 높았다, 낮았다 널을 뛴다. ⓒ 탕천(湯臣)영화사


"사람이라면 경극을 봐야 하고 경극을 모른다면 사람이 아니다. 개나 돼지는 경극을 모르기 때문에 짐승인 거다. 그래서 경극이 있는 한 우리는 존재한다. 경극이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이렇게 인기가 절정인 시대는 없었다. 네 놈들은 행운아인 줄 알아라."

관사부가 제자들을 엄격하게 훈육하며 던지는 말이다. 관사부의 이런 경극에 대한 신앙과 같은 믿음과 투철한 가르침은 청뎨이에게 그대로 전해지며, 우희가 자신의 사랑과 절개를 위해 자결한 것처럼 청뎨이도 이런 신념을 지키기 위해 고난의 길을 가다 결국 죽음의 길을 택하게 된다.

경극의 배역은 인물의 성격에 따라 생(生), 단(旦), 축(丑), 정(淨)으로 분류되는데, 한번 배역이 정해지면 평생 그 배역을 맡아야 한다. 또 20세기 중반까지도 남녀가 함께 공연할 수 없었으므로, 남자가 여자역, 즉 남단(男旦)이 되어야만 했다. 최고의 남단이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최대한 여성화시켜야 한다. 영화 속 뎨이처럼 평생 무대 위에서 여자 배역으로 살다 보면 성 정체성의 혼란이 생길 수밖에 없으며, 무대 아래에서는 사회적 신분이 낮아 돈과 권력 있는 자의 동성애 대상으로 전락하기에 십상이었다.

문화대혁명 시기 경극이 노동이 아닌 감정만을 드러내는 낡은 전통으로 치부되자, 경극 배우들은 거리에서 자아비판, 인민재판에 내몰린다. 더 이상 존재 의미가 사라지고 만 것이다. 결과적으로 경극배우에게 당시 중국의 현실은 군벌, 일제, 국민당 때보다 더 못해진, 최악의 상황이었음을 폭로한다.

# 성 정체성

어릴 적 청뎨이 샤오러우는 담뱃대를 강제로 뎨이의 입에 넣으며 여성으로 인식시킨다.

▲ 어릴 적 청뎨이 샤오러우는 담뱃대를 강제로 뎨이의 입에 넣으며 여성으로 인식시킨다. ⓒ 탕천(湯臣)영화사


어릴 적 뎨이는 극장주 앞에서 "나는 본래 계집아이로 태어나 사내아이도 아닌데"라고 해야 할 대사를 "나는 본래 사내아이로 태어나 계집아이도 아닌데"로 계속해 틀린다. 샤오러우는 담뱃대를 강제로 뎨이의 입에 넣으며 여성으로 인식시킨다. 처녀막이 터지듯 뎨이의 입에서 붉은 피가 흐르고, 이후 뎨이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여성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인식을 가져다준 샤오러우를 자신의 남자로 평생 사랑한다.

영화 마지막에 뎨이가 "나는 본래 사내아이로 태어나 계집아이도 아닌데"로 틀린 대사를 읊는 것은 문혁으로 모든 희망을 잃은 그가 예술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돌아왔음을 나타내고, 곧 여자 배역을 맡은 경극 배우로서 더는 존재할 의미가 사라졌음을 의미하므로, 그의 선택은 죽음일 수밖에 없다.

# 색과 빛

영화는 푸른 조명 아래의 경극 장면으로 시작해, 마지막도 그 몽환적인 푸른빛의 경극 장면으로 끝난다. 경극은 배우의 분장이 중요한 의미를 전달하는데, 붉은색은 충성과 용기를 상징한다. 영화 속 청뎨이의 얼굴 분장이 붉은색이고, 행복의 의미를 전달하는 경극 장면과 샤오러우의 결혼식 장면은 온통 붉은색으로 넘친다.

그러나 뎨이가 장내시, 위안쓰예, 일본군 대좌 아오키와 함께 있을 때, 경극이 야유를 받을 때는 어김없이 푸른빛이 감돈다. 중국영화 5세대 천카이거 감독의 치밀하게 연출된 영상미를 잘 보여주면서, 동시에 지나치게 서구적 입맛에 맞췄다는 비판도 함께 받는 대목이다.

청뎨이의 최고 가치는 오직 '예술'이었다. 청뎨이에게 민족, 국가, 이념은 중요하지 않고, 다만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 세계만이 지상 최고의 가치였다.

▲ 청뎨이의 최고 가치는 오직 '예술'이었다. 청뎨이에게 민족, 국가, 이념은 중요하지 않고, 다만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 세계만이 지상 최고의 가치였다. ⓒ 탕천(湯臣)영화사


"창녀에겐 정이 없고, 배우에겐 의리가 없네. 창녀는 침대 위에서만 정을 주고, 배우는 무대 위에서만 의리를 지킬 뿐이네."

소설 <패왕별희> 프롤로그에 나오는 구절로, 소설의 복선이다. 그러나 창녀가 정을 버리고, 배우가 의리를 지키지 않는 것은 침대와 무대로 대표되는 공간의 문제가 아닌, 혹독한 정치적 폭력의 문제였다. 그 광풍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자유로운 인간 존엄의 발현인 예술을 송두리째 파괴하고, 창녀든, 배우든 할 것 없이 모든 이들의 삶을 망가뜨렸다. 영화 <패왕별희>는 이 문제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며, 우리에게 지금 다시 묻는다. 권력 앞에서 예술의 자리는 어디이며, 또 어떻게 기능해야 하는지를.

패왕별희 장국영 장궈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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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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