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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의령 '의병 박물관' 1층 내부의 홍의장군 동상
 경남 의령 '의병 박물관' 1층 내부의 홍의장군 동상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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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우는 일개 서생(벼슬을 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국가가 변란을 당하였을 때 죽기로 맹세하고 힘을 다하였는데, 임진년 이후 정암진을 지켰고, 정유재란 때에도 화왕산성을 지켰습니다. 남쪽 사람들은 곽재우를 장수들 중 으뜸이라 합니다.(<선조실록> 1604년(선조 37) 2월 16일자 비변사 건의문 중)

항상 붉은 옷을 입고 스스로 홍의 장군이라 일컬었는데, 적진을 드나들면서 나는 듯이 치고 달려 적이 탄환과 화살을 일제히 쏘아도 맞출 수 없었다. 충의롭고 곧고 과감하였으므로 군사들의 인심을 얻어 사람들이 자진하여 전투에 참여하였다. 임기응변에 능하여 다치거나 꺾이는 군사가 없었다. 이미 의령 등 여러 고을을 수복하고 군사를 정진강 오른쪽에 주둔시키니 하도(경상도 남쪽)가 편안히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으며 의로운 소문이 크게 드러났다.(<선조수정실록> 1592년 6월 1일자)'

곽재우 의병군이 일본군을 격파했던 경남 의령 정암진
 곽재우 의병군이 일본군을 격파했던 경남 의령 정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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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 의병박물관의 게시물 「1. 임진왜란 소개」는 임진왜란을 1592년(임진년) 4월 13일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여 1598년 11월까지 약 7년간에 걸쳐 벌인 전쟁이라고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대체로 임진왜란(임진전쟁)이라고 하는 이 전쟁을 일본에서는 '분로쿠 · 게이쵸노 에끼(文祿 · 慶長の役, 일본 연호인 문록 · 경장 연간에 일어난 전쟁)'라 부르고, 중국에서는 '항왜원조(抗倭援朝, 왜국에 대항해서 조선을 도운) 전쟁'이라 부른다.

이이화는 <조선과 한국의 7년 전쟁>에서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임진왜란과 문경의 역) 두 가지 명칭 모두 보편타당성이 없어 이 책에서는 조선과 일본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라는 개념에 따라 조일 전쟁이라고 하였다'라고 밝히고 있다.

소서행장? 고니시 유키나가?


이 기사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인의 이름을 '고니시 유키나가'가 아니라 '소서행장'으로 표기한다. 小西行長은 한자식으로 읽으면 '소서행장'이 되고 일본식으로 읽으면 '고니시 유키나가'가 되는데 우리나라 외래어 표기법은 '고니시 유키나가'로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즉, 기자는 외래어 표기법을 따르지 않겠다는 것이다. 1592년∼1598년 전쟁 중에 조선인들이 그들을 "고니시 유키나가" 식으로 불렀을 리 없다. 참고로, 1597년 1월 23일자 <선조실록>에 보면 선조는 소서행장을 "왜추(倭酋, 왜적 우두머리)"로 부르고 있다.

이이화는 '조일 전쟁'이라는 용어 사용

게시물은 '한민족 역사상 최초로 일본 민족의 공격을 받아 전국을 유린당한 전면 전쟁'인 임진왜란은 '조선은 물론 일본 그리고 중국에까지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전반에 걸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라고 분석한다. 이어 게시물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게 된 원인에 대해 설명한다. 

1591년 3월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은 대마도 도주 종의지(소 요시토시)를 통해 가도입명(假道入明, 명으로 가려고 하니 길을 빌려 달라)을 요구했다. 그런데 형식상의 천황을 제외할 때 일본의 실질적 최고 권력자였던 풍신수길의 본래 요구는 가도입명이 아니었다. 길만 비켜달라는 수준이 아니라 길을 안내하라는 것이었다. 풍신수길은 정명향도(征明嚮導, 명을 정벌하려고 하니 길을 안내하라)라고 했다. 명을 치는 데 협조하라는 뜻이었다.

경남 의령은 '호국 의병의 발상지'를 자부하고 있다. 군립 박물관의 이름도 '의병 박물관'이다.
 경남 의령은 '호국 의병의 발상지'를 자부하고 있다. 군립 박물관의 이름도 '의병 박물관'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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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지는 오랜 교역(무역) 경험으로 미뤄볼 때 조선 조정이 정명향도를 받아들일 일은 결코 없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문구를 몰래 바꾸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조선과의 교역은 끊길 것이고, 풍신수길은 물자와 군사의 조달을 요구할 터이다. 경제적으로 이득을 얻을 일은 없어지고,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에 해당되는 전쟁 물자 조달 책임은 떠안게 될 터이다. 대마도에는 피해만 발생하는 것이다. 종의지는 정명향도를 가도입명으로 조작해서라도 전쟁을 막고 싶었을 것이다.

전쟁 피하고 싶었던 대마도

하지만 가도입명이라 한들 그것을 조선 조정이 받아들일 리는 만무했다. 1592년 4월 14일 부산진성을 함락한 일본군이 동래부사 송상현에게 '전즉전의 부전즉가도(戰則戰矣 不戰則假道,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우리에게 길을 빌려 달라)', 즉 가도입명을 요구했을 때 송상현은 '전사이 가도난(戰死易 假道難,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이라고 대답했다. 명나라를 200년 동안 섬겨온 조선이 일본의 가도입명 요구를 들어주는 것은 처음부터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부산 앞바다에 진을 친 1592년 4월 13일 이래  '동래 읍성'은 부산진성 북문설정이 그렇게 되는 입장이었지만 복원된 유진오, 이정람, 류성롱 들  0
 부산 앞바다에 진을 친 1592년 4월 13일 이래 '동래 읍성'은 부산진성 북문설정이 그렇게 되는 입장이었지만 복원된 유진오, 이정람, 류성롱 들 0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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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신수길은 과연 가도입명, 즉 명을 치기 위해 조선 땅을 지나가는 것으로 만족했을까? 「1. 임진왜란 소개」는 풍신수길이 조선만이 아니라 중국까지 정벌하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고, 강화 교섭에서도 마지막까지 조선 남부(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의 영토 할양을 요구했다고 지적한다. 풍신수길의 최대 목적은 결국 영토 획득에 있었다는 결론이다.

풍신수길은 무엇 때문에 자꾸 영토를 확대하려 했을까? 「1. 임진왜란 소개」는 일본의 전국 대명(戰國大名, 센고쿠 다이묘) 제도와 통일 후 풍신수길의 입장에서 원인을 찾는다. 전국 대명은 일본 내에서 작은 나라의 임금 정도의 권력을 가진 지방 실력자들이다.

외침으로 얻은 땅을 실력자들에게 나눠주려 한 풍신수길

전국 대명들은 풍신수길이 1587년 일본 전역을 통일할 때까지 서로 치열하게 싸웠다. 풍신수길은 자신의 편을 든 대명들에게 영토를 나누어 주었고, 대명들은 또 자신을 위해 열심히 싸운 가신(家臣, 나라 아닌 집안의 충신)들에게 재차 땅을 나누어 주었다.

통일을 이루고 나자 풍신수길은 더 이상 대명들에게 나눠줄 영토가 없었다. 따라서 대명들도 가신에게 나눠줄 땅이 없었다. 풍신수길은 땅을 조선, 중국, 인도에서 구하려고 했다. 임진왜란은 풍신수길과 그 휘하 대명들의 영토 확장 전쟁이었다는 설명이다.

국내 곳곳의 임진왜란 관련 박물관에 흔히 걸려 있는 풍신수길의 초상
 국내 곳곳의 임진왜란 관련 박물관에 흔히 걸려 있는 풍신수길의 초상
ⓒ 칠천량해전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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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풍신수길은 총 15만 8천명에 달하는 대군을 보내 조선을 침략했다. 1592년(선조 25) 4월 14일 상륙한 부산에 일본군은 20일 만에 한성(서울)을 점령했고, 의주까지 피란한 선조는 명에 원군을 요청했다. 그 이후 전쟁의 경과를 「1. 임진왜란 소개」는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일방적으로 밀리던 전세는 조선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이 일본군에 막대한 타격을 입히고,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이 바다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며 해상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반전되기 시작하였다. 전쟁 발발 이듬해(1593년) 정월에 조선군과 명나라 원군이 합세하여 평양성을 탈환하는 등 대공세를 펴자 일본군은 경상도 남해안으로 후퇴하여 머물면서 4년여 동안 강화 회담을 이어갔다.'

4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강화 회담이 벌어진 배경이 궁금하다. 교육부가 논란 끝에 2017년에 펴낸 <고등학교 한국사>는 '명은 전쟁이 자국으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였다. (중략) 명과 일본 사이에 휴전 협상이 진행되면서 전쟁이 장기화되었다.'라고 설명한다. 일본군이 중국 안으로 진격해 올 가능성이 없어지자 명은 조선을 배제한 채 일본과 강화 회담을 벌였다는 뜻이다. 강화 회담에서 풍신수길은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를 일본에 할양하라는 등 영토 확장에 혈안이 된 무리한 요구를 했고, 그 결과 강화 회담은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강화 회담 결렬되자 정유재란 터져

강화 회담이 결렬되자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일본군은 한때 전라도를 점령하고 한성을 향해 북상하지만 9월 7일 조 · 명 연합군에 의해 경기도 직산에서 격퇴되었다. 또 9월 16일에는 이순신에게 명량 해전의 참패를 당하였다.

일본군은 다시 남해안으로 후퇴하여 왜성을 쌓고 버텼지만 1598년 8월 18일 풍신수길이 죽자 본국으로부터 완전 철수 명령을 받았다. 11월 19일 노량 해전에서 마지막으로 적을 격파한 이순신은 그 싸움에서 전사했다. 적은 11월 24∼26일 사흘에 걸쳐 나누어 바다를 건너갔다(이형석 <임진 전란사>). 이로써 7년에 걸친 전쟁은 막을 내렸다.

충무공 이순신이 전사한 관음포 바다(노량 옆)
 충무공 이순신이 전사한 관음포 바다(노량 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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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은 세 나라의 운명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조선이 입은 피해에 대해 「1. 임진왜란 소개」는 '조선은 직접 전쟁터가 되었던 까닭에 피해가 가장 극심하였다.' 라고 간명하게 정리해준다. 조금 더 자세하게 알아보기 위해 <고등학교 한국사>를 읽어본다.

'조선은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인명 피해, 질병, 기근으로 인구가 크게 감소하였고, 전국이 황폐화되어 경작지가 크게 줄었다. 토지 대장과 호적이 대부분 사라져 국가 재정이 궁핍해졌고, 신분 질서도 동요하였다. 또한 불국, 경복궁, 조선왕조실록 등 많은 문화재가 불타거나 약탈당하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일본에 잡혀갔다.'

임진왜란이 일본에는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침략 당사자인 일본은 풍신수길의 후계 문제로 양대 세력이 대립했다. 한쪽은 뒷날 동군으로 불리는 덕천가강(도쿠가와 이에야스), 가등청정(가토 기요마사), 흑전장정(구로다 나가마사), 등당고호(도도 다카토라) 등이었고, 다른 한쪽은 서군으로 불리는 석전삼성(이시다 미쓰나리),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 도진의홍(시마즈 요시히로), 우희다수가(우키타 히데이에) 등이었다. 이들은 1600년 양군을 합해 17만 명의 군대가 동원된 대결전을 벌이고 덕천가강 측이 승리한다.

의령 '의병 박물관'에서 보는 왜군 장수의 복장
 의령 '의병 박물관'에서 보는 왜군 장수의 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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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명은 피해 막심, 일본은 전성기 기반 마련

일본은 조선과 마찬가지로 전쟁으로 경제적 파탄이 심했으나 조선에서 약탈한 문화재와 포로로 데려간 사기장 등의 각종 기술자, 인쇄술 등의 선진 기술, 학자와 서적 등을 수용하여 장기적으로는 국가의 경제적 이득과 문화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1. 임진왜란 소개」).

<고등학교 한국사>는 일본군에 잡혀간 (조선인) 민간인 가운데는 유학자나 인쇄공 및 도공이 많았는데 이들은 일본의 성리학, 인쇄술 그리고 도자기 문화 발달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고 말한다.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도 일본은 임진 · 정유 왜란으로 문화의 급진전을 가져와 강호(江戶, 동경) 막부(덕천가강의 군사 정권)의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한편 명은 조선에 무리하게 원정군을 파견하면서 군사적 · 경제적인 부담으로 국력이 약해졌다. 이 틈을 타 만주에서는 여진이 급속하게 성장하여 후금을 세웠다(<고등학교 한국사>).  중국은 만주에서 새로 일어난 청이 쇠약해진 명을 대신하게 되었는데 (명은 결국 후금의 세운 청에 1644년 멸망당한다.) 이 과정에서 명은 조선에 대한 파병을 빌미로 막대한 양의 은과 군대의 파견, 명군의 주둔지 마련을 요구하기도 하였다(「1. 임진왜란 소개」).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궁극적으로 이익을 보았고, 조선과 명은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는 뜻이다.


태그:#곽재우, #의병박물관, #풍신수길, #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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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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