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두 사람이 만나 잘 살기 위해선 서로의 도움과 지지가 필요합니다. 내조만큼 외조가 중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어 자신의 반려자를 위해 노력하는 '외조의 끝판왕'들을 만나봤습니다. [편집자말]
아이의 탄생. 새인생의 시작.
 아이의 탄생. 새인생의 시작.
ⓒ 최지용

관련사진보기


새벽 2시에 양수가 터졌다. 결혼 전부터 아내와 함께 살던 고양이 두 마리를 처형에게 맡기고 돌아온 밤이었다. 처형은 헤어지면서 "열매(태명)야 내일 보자"라고 말했다. '곧 만나자'는 인사였지만 말이 씨가 됐다. 예정일은 2주나 남아 있었다. 아내가 옷을 챙겨 입는 사이 대충 필요한 짐을 챙겼다. 새벽 공기는 차가웠고 차 안도 쌀쌀했다. 진통이 길게 이어졌다. 그리고 2016년 11월 3일 오후6시. 아내는 딸을 낳았다.

핏덩이 아기를 아내 품에 잠시 놓았다가 탯줄을 끊고 따뜻한 물에 씻겼다. 도와주던 간호사가 말했다. "오른쪽 손가락 다섯 개, 왼쪽 다섯 개, 발가락도 열 개 다 잘 있어요." 이미 뱃속에 있을 때부터 초음파로 다 확인했었다. 그럼에도 그 말이 귀에 꽂혔다. 나도 모르게 아기 손가락을 세어 보았다. 아기는 마치 세상에 잘 나왔다고 인증하는 것처럼 내 손가락을 꼭 쥐었다. 

대부분의 아빠들이 그렇겠지만, 그 순간의 감정을 말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아파하는 아내에게 미안함, 아이를 안았을 때 알 수 없는 감격, 겪어보지 못한 무게의 책임감, 그리고 앞으로 일들에 대한 불안함이 뒤엉켰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수없이 보던 장면이었는데, 이 감정을 온전히 전달한 배우는 없었던 것 같다. 아내는 분만실에서, 아기는 신생아실에서, 나는 복도에 서서 각자 다른 울음을 터뜨렸다.

가장이 된 아내, 일과 가정의 양립 고민하는 남편

아내를 만난 건 3년 전이다. 나보다 다섯 살이 어렸고 막 서른이 됐던 참이다. 직업은 한의사. 무려 전문직이다. 소개를 시켜준 회사 동기가 준 정보는 많지 않았다. 대개 사람들이 생각하듯 남자 보는 눈이 높을 거라고 생각하며 조금 위축됐다. 소개팅에도 익숙하지 않았다.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나 고민이 됐지만, 막상 얘기를 시작하니 통하는 점이 많았다. 아내는 기자라는 직업에 호기심이 많았다.

반면 나는 그렇지 않았다. 한의대가 있는 학교를 나와 주변에 친한 한의사들이 꽤 있었다. 아내가 일하는 의료생활협동조합이 어떤 곳인지도 대략 알고 있었다. 아내는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보통 받는 질문들을 내가 하지 않는 것에 신기해했다. 불필요한 물음들을 걷어내니 금방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멋진 여성이었다. 여행과 고양이를 좋아했다. 자기 일을 사랑하고 꿈이 많았다. 과감하고 긍정적이고 활발한 모습에 매력을 느꼈다.

아내 자랑은 팔불출이라지만 조금 더 해보련다. 아내가 원장으로 일했던 안산의료생협은 영리를 추구하기보다 지역사회에 질 좋은 의료서비스를 합리적 비용으로 제공하는 곳이다. 대학 때부터 꾸준히 사회 공익적인 활동을 해왔고 직장도 그런 곳으로 잡았다. 또 행동하는의사회 일원으로 한국여성의전화에서 운영하는 '쉼터'에서 수 년 동안 심리 상담과 의료 활동을 했다. 쉼터는 가정폭력 피해 여성들이 머무르는 곳이다.

이 사람과 만난다면 배울 점이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아내도 나를 마음에 들어 했다. 아니, 오히려 관계를 주도했다. 먼저 연락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고 데이트에서도 적극적이었다. 살면서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라 살짝 당황스럽기도 했다. 나중에 왜 그랬는지 아내에게 물으니 직장 가까이 이사할 때 도우러 간 일이 있었는데, 그때 "가스레인지 환풍기 후드 닦아주는 모습에 반했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서울-안산을 오가는 장거리 아닌 장거리 연애를 시작했다. 모두의 연애가 그렇듯 마냥 좋은 일만 있지는 않았다. 아내는 "기자가 그렇게 바쁜 직업인 줄 몰랐다, 일주일에 기사 한두 개만 쓰면 되는 줄 알았다, 속았다"라는 말을 자주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안산으로 달려갔지만 아내에게는 충분하지 못했다. 아내는 내가 자신보다 일과 자기 시간을 우선순위에 두는 것 같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고, 나는 미안하면서도 답답했다.

나 역시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 연애였다. 업무로 바쁘기도 했지만, 나만의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나는 대부분의 여가시간에 술을 마시거나 운동을 했다. 술을 마셨으니 운동을 했고, 운동을 했으니 술을 마셨다. 농구하고 술 마시고, 야구하고 술 마시고, 당구치고 술 마시는 게 인생의 낙이었다. 꽤나 건전한 취미생활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먼 거리의 연애는 이 모든 것을 제약했다. 처음에는 괜찮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미안함보다 답답함이 커졌다.

다행히 나와 아내는 현명한 편이었다. 무엇이 더 소중한지 알고 있었다. 양보와 타협이 이뤄졌다. 물론 각자가 좀 더 손해를 봤고 양보를 많이 했다고 생각하는 건 여전했다. 그때부터 결혼을 생각했던 것 같다. 이 사람과 오래 함께 할 거라면 결혼을 하는 게 좋지 않을까? 결혼을 하면 아내의 불안함도 조금은 덜어지지 않을까? 그럼 나도 좀 더 안정적으로 일과 '취미생활'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연애를 한 지 1년쯤 됐을 때다.

아내는 직장을 그만뒀다. 남자의 월급은 정규직 노동자 평균임금에 훨씬 못 미쳤고, 부끄럽게도 모아둔 돈도 없었다. 결혼을 한다면 아내가 실질적인 가장이었다. 안산보다는 서울에 가까운 안양에 터를 잡고 대출을 받아 한의원을 개업했다. 시장 골목 허름한 건물 2층에 작은 '동네한의원'이었다. 아내는 직원을 세 명 뒀다. 규모에 맞지 않았지만 아내는 직원들이 힘들면 좋은 서비스를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처우도 다른 곳보다 좋았다. 망하는 한의원도 많다는 때에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아내의 의욕이 대단했다. 또 실력과 판단을 믿었다. 아내는 가끔 "40대에 '명의'가 되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명의'라는 자격증 시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하면 명의라고 할 수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 모습이 보기 좋았다. 마치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게 꿈이라고 말하는 아이를 보는 것처럼. 아내는 일하면서, 사회활동을 하면서도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의원 개업은 아내의 꿈에 한 발 다가서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와 결혼 하는 게 그 꿈에 방해가 돼서는 안됐다. 아내에게 프러포즈를 하면서 "서로의 삶을 소모하지 말고, 더 풍요롭게 만들자"라고 말했다. 낭만적인 말은 아니었다. 다만 그런 마음으로 산다면 서로를 원망하는 결혼 생활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특히 더 이상 '속았다'라는 말을 듣고 싶지는 않았다. 한국사회에 많은 여성들의 고민인 '일과 가정의 양립'이 나의 고민이 되는 순간이었다. 아내가 '명의'를 꿈꾸듯 나 역시 '좋은 기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 자취방에 어떤 여자가 와서 살고 있어"

우리는 한의원과 가까운 광명에 집을 얻었다.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양가 부모님의 관여는 최소화했다. 양해를 구했고, 이해해주셨다. 거의 모든 준비를 둘의 의지대로 진행했다. 아내의 의견을 대부분 수용했고, 정 맞지 않는 부분은 서로 설득했다. 결혼식을 7개월가량 앞두고 우리는 동거를 시작했다. 어머니와 여동생 말고 다른 여성과는 처음 한 집에서 살게 된 것이다. 당연히 쉬울 리 없었다.

평소 결혼하는 친구나 후배들에게 '가사는 도와주는 게 아니라 같이 하는 것'이라는 말을 자주 했었다. 이제 내가 그 말에 책임을 져야 할 때가 됐다. 나는 보통 오전 7시에 집을 나섰다. 그때 아내는 거의 대부분 잠들어 있다. 한의원까지는 8시40분에 출근해도 넉넉한 거리다. 그리고 진료를 마치고 집에 오면 7시 20분 정도 됐다. 일 때문에 늦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난 퇴근 시간이 일정하지 않았고 야근도 잦았다.

아내가 집에 더 오래 있지만 가사노동은 6:4 정도로 내가 많이 했다. 그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일단 내가 체력적으로 월등했다. 나는 하루 평균 5~6시간만 자도 됐지만, 아내는 최소 8시간 이상을 자야했다. 집안일은 결국 체력으로 하는 거다. 능률도 내가 높았다. 청소시간도 적게 걸리고 더 깔끔했다. 아내는 청소해서 힘들고, 나는 집 상태가 마음에 안 들어 기분 나쁜 상황을 굳이 만들 필요가 없었다.

그동안 해먹은 밥. 꽤 먹을만 하다.
 그동안 해먹은 밥. 꽤 먹을만 하다.
ⓒ 최지용

관련사진보기


주방일은 더 확연히 차이났다. 나는 대학시절 레스토랑 주방에서 일했고, 여러 번 농활을 다니면서 어지간한 한식도 익혔다. 독립해 살면서 음식을 자주 해 먹고, 사람들을 초대해 대접하는 일도 많았다. 남들에게 자랑할 정도는 아니지만 음식을 꽤 하는 편이었고, 특히 '빨리' 할 수 있었다. 반면 아내는 요리하는 걸 좋아했지만, 손이 느려 오래 걸렸다. 내가 식사와 청소를 전담하는 게 효과적이었다. 그래야 두 사람의 휴식시간 총량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아내가 설거지를 주로 하고 빨래를 전담하면 대략 6:4 정도의 비율이라고 판단했다.

초기 3개월 정도는 이 비율이 잘 지켜졌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비중이 늘어갔다. 일단 청소가 문제였다. 함께 살고 있는 두 마리 고양이는 먹은 사료를 똥 싸고 털 뿜기에 전부 사용하는 것 같았다. 청소하고 이틀만 지나도 발바닥에 털이 붙어 다녔고, 사흘이 지나면 털 뭉치가 뒹굴었다. 또 두 사람이 사니 혼자 살 때 보다 두 배로 빨리 지저분해졌다. 2~3일 간격으로 청소를 해야 했다.

또 집안일에 주방일과 청소, 빨래만 있는 게 아니었다. 화장실 청소에 각종 쓰레기도 버려야한다. 집에서 밥을 해 먹으니 장도 자주 봐야했다. 그밖에도 잡다한 일이 수 없이 많았다. 게다가 아내의 체력은 생각보다 '저질'이었다. 한의원은 운영이 쉽지 않았다. 기진맥진해서 들어올 때가 많았다. 내 설거지 횟수가 점점 늘어났고, 빨래는 건조대에서 내려올 줄을 몰랐다. 청소하다가 개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결국 어느 날 아내에게 "우리가 같이 사는 게 아니라, 내 자취방에 어떤 여자가 와서 살고 있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누군가가 "집안일 좀 나눠서 하냐"라고 물으면 "가사 분담 안 하고 내가 전담한다"라고 말하는 지경이었다. 아내는 최근 당시 가사분담 비율이 8:2 정도 됐다고 회상했다. 나는 9:1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의 푸념 후에 7:3 정도로 조정됐다고 본다. 그 정도면 할 만했다.

나를 '청소 지옥'으로  몰아넣은 고양이들. 턱시도를 입은 녀석이 루루, 갈색 고등어가 라라다. 루루와 라라
 나를 '청소 지옥'으로 몰아넣은 고양이들. 턱시도를 입은 녀석이 루루, 갈색 고등어가 라라다. 루루와 라라
ⓒ 최지용

관련사진보기


사실 집안일을 많이 하는 게 힘들어서가 아니라 내가 하는 걸 아내가 당연히 여기는 것 같아서 불편했다. 나 역시 하루 종일 일했고, 피곤했다. 직장을 다니면서 집안일까지 해야 하는 여성들이 어떤 기분일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만약 내가 집안일을 하는 게 힘들고, 상대방이 내가 하는 걸 당연히 여기고 함께 하지 않는다면 정말 폭발해버렸을 것 같다. 다행히 아내는 다시 설거지를 열심히 했고, 내게 고맙다는 말을 더 자주했다.

단지 남자가 집안일을 많이 하는 게 '외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딱히 '외조'라는 말을 쓰는 것도 탐탁지 않다. 말 자체에 성역할을 규정하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아내'라는 말에도 같은 의미가 있지만, 계속 사용하는 이유는 아내가 타인에게 자신을 말할 때 그렇게 불러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는 '누가 어떤 일을 하는 게 가장 합리적인가'라는 기준으로 역할을 맡는 게 옳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정말 '외조'를 해야 할 상황은 그 후에 발생했다. 2016년 1월 결혼식을 올리고 난 직후 아내가 임신을 한 것이다. 모든 상황이 바뀌었다. '9:1'이든 '10:0'이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집안일 따위는 내가 하는 게 당연했다. 아내는 차로 출퇴근을 했는데, 배가 불러 운전을 한다는 것도 걱정됐다. 당장 한의원 가까이 이사를 가고 싶었다. 출산 후 육아를 생각해서라도 둘 중 한 명이 가까운 곳에 있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고, 결국 출산 직후 우리는 이사를 했다.

'외조의 끝판왕'은 없다

딸이 태어난 날, 나는 사흘째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아끼고 아끼던 '5년 근속 안식월 휴가' 한 달과 남은 연차 휴가, 그리고 육아휴직 4개월을 합해 총 5개월 3주 동안의 긴 휴가를 막 시작한 시점이었다. 2017년 대선 후보 경선이 본격화 될 봄까지는 여유가 좀 있다고 생각했다. 설마 국정농단 사건이 일어나고 대통령이 탄핵되고 5월에 대선을 치르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휴직을 일주일 앞두고 JTBC의 '최순실 태블릿' 보도가 나오면서 정말 '휴직을 해도 되는 걸까' 걱정이 됐다. 하지만 다행히 회사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큰 사건이 터진 시기에 자리를 떠나려니 동료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역시나 붙잡는 사람은 없었다. 참 고마운 일이다. 솔직히 몇 주 미룰까 생각도 했지만,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휴직을 하려 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미룰 수는 없었다.

아내와 나는 우선 우리 힘만으로 아기를 돌보자고 결의(?)했다. 사람을 쓸 수밖에 없고, 부모님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더라도 그 전까지는 어떻게든 우리가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내가 일을 쉬어야 했다. 일을 하면서 단순히 육아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또 처음부터 '주양육자'로 경험을 쌓아야 일을 하더라도 어느 정도 육아 능력을 갖출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마땅히 지어야 할 책임을 아내에게 전가하고 싶지 않았다. 아내는 이미 10개월 동안 임신한 상태로 일을 했다. 출산이라는 큰일도 치렀다. 몸은 말할 것도 없고, 정신적으로도 많이 지쳐 있었다. 게다가 후 출산 2개월밖에 쉬지 못하고 다시 한의원에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 기간만이라도 아내가 스트레스 없이 아기와 보낼 수 있길 바랐다.

5개월 동안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
 5개월 동안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
ⓒ 최지용

관련사진보기


막상 아이를 안고 집에 왔을 때, 정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육아책을 몇 권 읽었지만, 마치 연애를 글로 배운 사람처럼 답답했다. 식구가 늘자 가사노동의 강도는 더욱 높아졌다. 여성이 일하면서 육아를 책임지고 가사까지 돌본다는 건 정말 '불가능한 일'이라고 느꼈다. 아니, 육아와 가사만 전담한다고 해도 숨이 막힐 것 같다. 하지만 그런 불가능한 일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고, 숨 막히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아내와 함께 아이를 봤던 두 달 동안은 아내가 아이와 보낼 수 있는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는 것에 집중했다. 아내에게 수유 외에는 다른 일을 맡기지 않았다. 처음 한동안 아내가 밤수(새벽에 모유수유를 하는 일)를 하려고 새벽에 한 번씩 일어났다. 그 외 밤중에 벌어지는 상황은 내가 챙겼다. 우리는 다른 방에서 아이를 따로 재웠고, 아이가 잠들면 내가 들어가 잤다. 나중에는 밤수도 미리 유축을 해놓고 내가 젖병으로 먹였다.

아내는 다행히 비교적 건강한 상태로 복귀했다. 이후 3개월은 낮 시간 동안 혼자 아이를 돌봤다. 아 정말 육아가 이렇게 외로운 일인 줄 몰랐다. 하루종일 아이와 씨름하다 보면 세상과는 완전히 단절된 기분이 들었다. 일할 때는 쉴 틈 없이 울리던 전화기도 소리내는 법을 잊은 지 오래됐다. 겨울 아이라 외출도 쉽지 않았다. 틈만 나면 지인들을 불렀다. 이 자리를 빌려 찾아와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혼자하는 육아는 힘들었지만 또 즐거웠다. 딸은 봐도 봐도 예쁘다. 아이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유대감이 생긴 느낌이다. 아내는 복직 첫날 아이가 너무 보고 싶어 울었다고 한다. 지금도 아내는 출근 전까지 아이를 챙기는 일과 퇴근 후 아이를 재우는 일을 도맡아 한다. 그때가 아니면 아이를 볼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일을 나가게 되면 그것조차 하기 어려워진다. 이제 곧 복직을 앞둔 지금, 그게 가장 두렵다.

그만큼 어느새 내가 육아에 상당부분을 책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육아휴직을 결정했을 때 기대했던 일이다. 아내에게도 무엇이 좋았는지 물었다. 아내는 "다른 것보다 내가 낳은 아이를 남편이 정말 사랑하고 있다는 게 느껴져 정말 좋다"라고 말했다. 또 "아기를 어떻게 볼지, 분유를 언제 얼마나 먹일지, 낮잠을 언제 재울지, 욕조는 뭘 쓸지, 같이 고민하고 결정할 수 있어서 좋았다, 앞으로도 그럴 거니까"라고 말했다. 

이런 일은 아내가 전문직이고 남편보다 수입이 많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반대의 상황이었다면 어떤 모습이 펼쳐졌을까? 내가 전문직에 종사하고 아내가 적은 임금을 받는 기자였다면, 아내는 출산과 육아를 하면서도 '좋은 기자'라는 꿈을 계속 가져갈 수 있었을까? 대개는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내가 일을 그만두지 않는 것도, '외조의 끝판왕'이라는 주제로 이런 글을 쓰는 것도 '남성'이라서 가능한 건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이 글이 전혀 특별하지 않은 글이 되길 바란다.


태그:#외조, #남편, #외조의 끝판왕
댓글3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43,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